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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설렁탕'의 어원

by 언덕에서 2023. 4. 27.

 

'설렁탕'의 어원

 

 

쇠머리ㆍ쇠족ㆍ쇠고기ㆍ뼈ㆍ내장 등을 모두 함께 넣고 장시간 백숙으로 푹 고아서 만든 곰국. 국물이 뽀얗고 맛이 농후하다 하여 설농탕이라고도 한다.

 설렁탕의 유래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먼저 설렁탕은 조선시대에 왕이 선농단으로 거동하여 생쌀과 생기장, 소·돼지를 놓고 큰 제전을 올린다. 그런 다음에 친경(親耕: 임금이 친히 전답을 가는 의식)을 하던 행사를 한다. 행사가 끝나면 미리 준비해 둔 가마솥에 쌀과 기장으로 밥을 하고, 소로는 국을 끓여 구경꾼 가운데 60세 이상의 노인을 불러 먹였던 데서 나왔다는 것이다.

 <조선요리학>에서도 세종이 선농단에서 친경을 할 때에 갑자기 심한 비가 내려서 촌보를 옮기지 못할 형편이 되었다. 그리고 배고픔을 못 견디어 친경 때에 쓰던 소를 잡아 맹물에 넣고 끓여서 먹었다. 이것이 설렁탕이 되었다고 그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또 하나의 설은 몽고의 고기를 맹물에 끓이는 조리법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설렁탕이 되었다는 것이다. <몽어유해(蒙語類解)>에는 고기 삶은 물인 공탕(空湯)을 몽고어로는 슈루라고 한다고 되어 있고, <방언집석(方言輯釋)>에서는 공탕을 한나라에서는 콩탕, 청나라에서는 실러, 몽고에서는 슐루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 실러ㆍ슐루가 설렁탕이 되었다는 것이다.

 설렁탕은 서울의 명물음식으로서 일찍부터 대중음식으로 시판되었다. 설렁탕집에는 항상 2, 3개의 큰 무쇠솥에 설렁탕이 끓고 있었다. 그 옆에는 설렁탕을 골 때에 넣었던 여러 부위의 편육을 부위별로 썰어서 채반에 담아놓았다. 손님이 설렁탕을 청하면 뚝배기에 밥을 담고 뜨거운 국물로 토렴하여 밥을 데운다. 그다음에 국수 한 사리를 얹고 채반에 놓여 있는 고기를 손님의 요구에 따라 집어넣고 뜨끈뜨끈한 국물을 듬뿍 부어 내주었다. 그러면 곱게 썬 파와 소금ㆍ고춧가루ㆍ후춧가루 등을 식성에 따라 넣어 먹었다. 지금도 설렁탕은 대중음식으로 애용되고 있다.

 

 

 소의 머리ㆍ내장ㆍ족ㆍ무릎도가니 따위가 고아진 국물에다 그 고기조각들이 섞인 국밥이 설렁탕인데, 요즘에는 설렁탕인지 곰탕인지 구별을 할 수 없는 상태로까지 되었다. 설렁탕 국물은 뽀얀 편이어서 누렇게 뜬 기름기가 싫은 사람에게는 술 마신 이튿날의 해장으로도 그럴싸한 것이었는데, 시중에서 파는 설렁탕이란 것은 그야말로 황우도강탕(黃牛渡江湯)이다 싶게 싱거운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제대로 국물을 뽑기로 든다면 그 값에 밑천 건지기 어렵다는 말도 나오게 될 테니 말이다.

 모든 간판이 한글로 되면서는 눈에 안 띄게 되었지만, 그 전에는 ‘설농탕(雪濃湯)’이라 쓴 간판 하며, 메뉴판이 걸려 있는 것을 많이 볼 수가 있었다. ‘雪濃湯’이라니 무슨 뜻인가 생각도 들었지만 그 국물이 보얗게 짙어서 그럴싸한 한자 맞춤자였구나 하고 뒤늦게 깨닫기도 했던 설렁탕이었다. ‘雪濃湯’이었건 ‘雪農湯’이었건, 지금의 표준말로는 '설렁탕', 주당이 이튿날 아침에 그 국물을 마실 때 설렁설렁한 기분이 안 드는 것도 아닌 때문에 붙은 설렁탕인가.

 지난날 (종로구)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터에 선농단(先農壇)이라는 것이 있었다. 지금도 그 흔적이 있지만, 농사짓는 법을 가르친 신농씨와 후직씨를 제사지냈던 곳이었으니, 농경민다운 습속을 이어받은 때문이었다고 할 일이었다.

 해마다 절기가 봄으로 접어들 때, 즉 경칩이 지난 돼지날(亥日)을 가려 지낸 이 제사에서는 적전지례(耤田之禮: 임금이 친히 밭을 가는 의례)를 행했으며, 비가 안 오면서 가물 때에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던 조선 왕조 성종 6년(1475) 정월에 임금께서 이곳에 납시었다. 종친 월산대군에 재상 신숙주도 끼었으며, 거기에 서민이 합세하여 밭을 갈았다. 그리고서 백성을 위로하여 국말이밥과 술을 내렸는데, 이때 선농단(先農壇)에서 먹게 된 국밥을 ‘선농탕(先農湯)’이라 이름지어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름이 오늘날까지 내려오게 된 ‘설렁탕’이라는 말로 된다는 것이었다.

 ‘곤난(困難)’이 ‘곤란→골란’으로 발음됨은, 이른바 닿소리의 이어바꿈(자음접변) 현상이다. 우리말은 ‘ㄴ’과 ‘ㄴ’이 이어질 때 ‘ㄹ+ㄹ’로 발음되는 것이어서, ‘한남동’이 ‘할람동’ ‘논난(論難)’이 ‘놀란’으로 말해지고 있는 것이니, ‘선농탕’을 ‘설롱탕’이라 말하는 동안, 그 한자인 ‘先’ 자를 ‘雪’ 자로 갈아 끼웠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때 ‘雪’과 ‘濃’의 두 글자에서 뜻을 찾으려 함은 애당초 잘못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나와서의 말이지만, 오늘날의 ‘설렁탕’과 ‘先農壇’과는 아예 관련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굳이 말밑을 캐다 보니, 그쪽으로 기울어 해석하게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에서다. ‘先農壇’의 ‘先農’과 여항에서 말하는 ‘설롱탕’ 혹은 ‘설렁탕’의 ’설렁‘이 비슷한 음이어서 갖다 붙여 본 것일 수도 있지 않겠냐 함인데, 어쨌거나 '설렁탕'의 유래를 ‘先農壇’에 갖다 댄 것은, 농경민이었던 내 조상의 냄새를 그대로 풍겨준다는 뜻에서도 그렇게 어색하지는 않다.

 

 

- 박갑천 : <어원수필(語源隨筆)>(1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