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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아름답다'의 어원

by 언덕에서 2023. 4. 3.

 

 '아름답다'의 어원 (1)

 

 

한자 ‘美’는 ‘羊’과 ‘大’가 합친 글자이다. 중국 사람은 양고기는 맛이 있어서 많이 먹는다고 하는 데서 羊과 大가 합친 자인데, 양고기는 맛나다고 해서 ‘미(美)’의 뜻을 지닌 말이라 하겠다. 우리말 ‘아름답다’의 어원은 무엇일까.

 학생답다. 여자답다, 소녀답다와 같이 ‘답다’는 명사 뒤에 붙은 접미사로 명사를 형용사로 전성시키는 구실을 하고 있다. 따라서 아름답다의 ‘아름’은 명사가 된다고 하겠다. 이 ‘아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알다(知)’라고 하는 동사의 어간 ‘알’에 ‘음’ 접미사가 붙어서 된 명사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견해는 우리 민족의 미 의식은 알다(知)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동사의 어간에 ‘음’ 접미사가 붙어서 된 전성명사에 ‘답다’ 접미사가 붙어 형용사가 되는 경우를 찾아볼 수 없다. 졸음답다, 웃음답다, 울음답다와 같은 조어법은 없는 것이다.

  ‘아람’을 한 아름, 두 아름, 할 때의 아름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이 ‘아름’은 ‘안다(抱)’라고 하는 말의 어간 ‘안’에 ‘음’ 접미사가 붙은 ‘안음’이 ‘아름’으로 변한 것으로 설명해야 된다. 17세기 문헌에 보이는 ‘아람’과 ‘아남’이 ‘아름답다’가 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아름답다의 ‘아름’은 동사에서 바뀐 명사가 아니라 본디부터 명사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5세기에는 ‘아람답다’로 표기되어 있다. ‘아람’이라고 하는 명사가 15세기에서 나(私)의 뜻을 지니고 있다. ‘아름답다’는 '나답다'의 뜻이 되겠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 함함하다면 좋아한다'는 속담이 있다. 이 속담은 칭찬을 받지 못할 일이나 행동이라도 좋다고 추어주면 좋아한다는 뜻이 된다. 그것은 새끼가 지기 몸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추어주면 좋아한다.

 아무리 곰보일지라도 서로 사랑하게 되면 오목오목한 데마다 사랑이 샘솟는다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얼굴이 곰보로 보이지만, 사랑하게 되면 거기서 사랑이 솟는 것과 같이 예쁘다는 말이 된다.

 내 사람, 내 사랑이기 때문에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나 아닌 것을 나답게 여기는 것이 아름답다에서 보여주는 우리 민족의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라 하겠다.

 

- 서정범 : <어원별곡(語源別曲)>(범조사. 1989) - 

 


 

 

 '아름답다'의 어원 (2)

 

 

시인묵객은 아름다운 내 강산을 노래한다. 청춘이 아름답고, 그러다 보니 그 사랑이 아름답고, 추억이 아름답다. 어머니의 사랑이 아름답고, 풍요한 인정이 아름답다. 사람에게 있어 아름다움은 마음의 고향이다, 아름다움은 메마른 정서에 윤기(潤氣)를 뿌려주며, 그래서 활력을 돋우어준다.

 아름답다는 말을 듣는 여성은, 그것이 세계에 이름을 드날리는 대스타건, 시골구석의 아낙이건 입이 헤벌어진다. 그런 아름답다는 생각에도, 철학이 가미되면 조금 더 어려워진다.

 일찍이 노자(老子)의,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세상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만 알지만, 이건 이미 악이다, 또 선을 선으로 알지만 이 또한 선이 아니다. 그러므로 유무가 상생하고 난아는 상성 하며 장단은 상교하고 고하는 상경하며 음성은 상화하고 전후는 성수하는 법이다.) 거창한 말씀에서 대립적 개념은 상대적 구별일 뿐, 서로 연관ㆍ한정ㆍ전화(轉化)함으로써 하나의 통일을 볼 수 있는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이 말에서 우리는 하나의 패턴 속에 정반대의 개념이 동시에 포괄될 수 있다는 깊은 철리를 느끼게 된다.

 그건 그렇다 치고, 한자에서의 ‘美’ 자는 ‘맛이 좋다’는 데서 출발되고 있음을 설문은 말해 준다. ‘美’ 자는 ‘羊’ 자와 ‘大’ 자로 이루어져 있다. 양(羊)은 말ㆍ소ㆍ개ㆍ돼지ㆍ닭 따위와 함께 사람의 음식상에 오르게 되는데, 그 살찌고 큰 것은 특히 맛이 좋기 때문에 처음엔 그 맛 좋음을 나타냈다가 나중에는 모든 좋은 것, 또는 보기 좋은 것으로 뜻을 넓혀 갔다는 것이다.

 우리말의 ‘아름답다’는, 중세어에서는 ‘아름답다’ㆍ‘아롬답다’ 또는 ‘아람답다’ 같이 표현되었다. 그래서 우리 미학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우현(又玄: 高裕燮)은 ‘아름’은 ‘알다’의 동명사로서, 미의 이해 작용을 표상하고, ‘답다’는 형용사로서 격(格) 즉 가치를 말하는 것이어서, 아름다움은 알음(知)의 정상(正相)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알음이 단지 추상적 형식논리에 그침과는 달리, 종합적 생활 감정의 이해 작용에 근저를 둔 것으로서 바로 예지적ㆍ지격적(知格的)인 것이라고 풀이했다.

 이에 대해서 국어학에서 대계를 세워놓은 ☞무애(无涯 : 양주동)는 우리 옛날에서의 ‘아람’(私有라는 뜻)과 ‘답’(같다의 뜻)으로 ‘아름답다’를 풀이한다. 그러니까 ‘자기가 가지는 것 같다’는 뜻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는 것이니, 이에 의할 때 자기의 미의식에 맞는, 자기의 가치기준에 맞는 것이 곧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게 된다. 미학자 ☞백기수(百琪洙)는 이러한 것을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서의 ‘주관적 보편타당성’과 대비시킴으로써 우리의 ‘아름답다’가 ‘내가 가진 것과 같다’는 뜻에서 출발한 '철학적 배경'을 제시해 주고 있기도 하다.

 아름다운 것은 결국 자기가 느끼는 것이었다. 노자의 말도 거기에서 출발한다. 자기가 아름다운 것이라 해서 반드시 남에게 또한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름다움은 곧 아름다움이 아닐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제 눈에 안경’이라는 우리의 속담은, 곰보도 어떤 이에겐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는, 아름다움의 상대적인 개념을 뒷받침해 주었던 것일까?

 

 

  - 박갑천 : <어원(語源) 수필><을유문화사. 1974)  -


양주동(梁柱東, 1903∼1977) :  국문학자. 호 무애(无涯). 개성 생. 황해도 장연으로 이사, 5세 전후 ‘유합(類合)’을 배워 썼으며, 1914년 중동중학교 졸업, 평양고보 입학. 곧 자퇴하여 한학과 한시에 몰두했다. 1920년 상경하여 중동학교 고등 속성과 입학, 1년 동안 중학 전과를 마치고 도일, 와세다 대학 예과 불문과 입학, 1923년 시지(詩誌) [금성] 발간, 1928년 와세다 대학 졸업, 같은 해 와세다 대학에서 영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평양 같은 해에 숭실 전문학교 교수로 임용되었다.

 1929년 [문예공론] 발간, 시집 <조선의 맥박> 간행, 1935년경부터 신라 향가 연구에 전심하여 1937년 서울의 일본인 학자들이 중심이 된 [청구학총(靑丘學叢)] 19호에 <향가의 해독-특히 ‘원왕생가’에 취(就) 하야>를 발표하여 이때까지 향가 해독의 독무대를 차지했던 경성제대 교수 ‘오쿠라’(小倉進平)의 소론을 논박하였다. 1940년 경신중학(儆新中學) 교사, 동국대 교수(47), 학술원 회원(54), 1957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62년 다시 동국대 교수가 되어 동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양주동은 살아생전 스스로를 '국보'라고 칭했는데 이에 영향을 받은 철학자 도올 김용옥은 자신을 '우주보'라 칭하고 있다. 

 신라 향가(鄕歌) 등 한국 고가(古歌)를 연구하여 초기 국어학계에 큰 업적을 남겼다. 학술원상(1956), 국민훈장 무궁화장(1970). 1945년 광복 후에는 동국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여(1947), 중간에 수년간 연세대학교 교수로 옮겨 있었던 것(1958-1961)을 빼고는 종신토록 동국대학교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이 두 학교 이외의 다른 대학들에도 출강하였기 때문에 그로부터 직접ㆍ간접의 영향을 입은 후학들이 많다. 1957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54년부터 죽을 때까지 학술원 회원으로 있었다.


백기수(百琪洙, 1930~ ) : 미학자. 서울 출생으로,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했다. 동경대학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서울대 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저서에 <미학개설> <예술학개설> <미학, 예술학 서설> 등이 있다.


고유섭(高裕 , 1905-1944) : 미술사학자, 호 우현(又玄). 1925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부터 1930년까지 경성대학 철학과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한 뒤 경성대학 연구실의 조수가 되었다. 1933년 개성박물관장을 지낸 뒤 연희전문·이화여전 교수를 역임하면서 국내의 명승·고적·사찰을 답사·연구하였다.
 저서에 《송도고적(松都古蹟)》 《조선탑파(朝鮮塔婆)의 연구》 《조선미술사논총(朝鮮美術史論叢)》 《고려청자(高麗靑瓷)》 《전별(餞別)의 병(甁)》 《한국미술사급미술논고(韓國美術史及美術論攷)》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