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현대소설

이상 단편소설 『실화(失花)』

by 언덕에서 2023. 1. 18.

 

이상 단편소설 『실화(失花)』

 


이상(李箱·김해경. 1910∼1937)의 단편소설로 작가 사망 2년 후인 1939년 3월 잡지 [문장]에 유고 형태로 발표되었다. 단편소설 『실화』는 국문에 한자를 혼용하고 있는데 이상(李箱)의 소설 가운데 동경 생활을 배경으로 쓰인 유일한 작품이다. 특히 작중 이야기의 배경으로 1936년 12월 23일이라는 날짜가 나타나므로 그 창작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단편소설 『실화』는 실험성이 강하게 나타난 이상(李箱) 김해경 대표작으로 시간과 공간의 몽타주 기법으로 이뤄진 작품이다. 이 작품은 총 9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 이야기의 전개 과정에서 플롯(구성)의 기능이 상당히 위축되어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전통적인 이야기 형식인 총체적인 사건들의 연속과정으로서의 진행되지 않고 전위적인 실험문학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 소설을 지배하는 것은 객관적인 현실이 아니라 주인공 ‘나(李箱)’의 주관적인 의식 세계이다. 이런 심층 세계는 역동적인 의식의 활동에 따라 무질서하고 혼동된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 소설의 진행은 주관적이고 분열적인 시간의 연속으로 인과율에 의한 시간적 진행이 이뤄지지 않는다. 또한, 공간도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의식의 흐름을 따라 환상과 추상의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역전의 시간 속에서 진행된다. 난해하기 짝이 없는 이 작품은 공간적 통일성마저 파괴되고 있다.

 

이상(李箱;김해경. 1910-1937)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나’ 이상(李箱)이 흠모하는 연(姸)이라는 여인이 '나' 이상(李箱)과 Y, S 세 남자를 꿰차면서 촌극이 벌어진다.
 C양은 ‘나’에게 희생적인 사랑에 관해 끊임없이 질문한다. 어느 날 그녀가 내게 꽃을 선물하며 방을 꾸미라고 하지만, ‘나’는 그것을 잃어버리곤 자조한다.
 ‘나’는 ‘비밀이 없는 것이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C양의 방에서 눈을 감고 앉아서 C양의 이야기를 듣는다. (동경에 오기 전) 서울에서 나는 S로부터 연의 부정(不貞) 사실을 들었다. 나는 동경 C양의 방에서 다른 남자들과 외도하는 연의 행실을 떠올린다. 서울에 있을 때 (연을 방에 두고) 연의 집을 나오면서 자살을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나는 C양의 방을 나와 Y 군과 함께 카페 엠프레스에 갔다가 카페 노바에 간다. 서울에서 ‘나’는 친구 김유정을 만나 떠난다고 말한 뒤 다시 연에게 돌아왔었다.
 지금 동경에서 ‘나’는 카페 노바의 여급 나미코를 만나 자신의 슬픔을 표출한다. 이후 ‘나’는 진보초☜의 누추한 집에서 발열하고 기침하다가 동료 소설가 김유정과 흠모하는 여인 연(姸)의 편지를 받는다.

 "저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거든 오늘이라도 돌아와 주십시오. 밤에도 자지 않고 저는 형을 기다리겠습니다. 유정."  

 "이 편지 받는 대로 곧 돌아오세요. 서울에서 따뜻한 방과 당신의 사랑하는 연(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연 (姸) 서(書)."

 

소설가 김유정 (金裕貞, 1908-1937)


 이 작품은 매우 특이한 서사 구조로 되어 있다. 소설에서 화자가 이야기하는 시간은 '하루 저녁'에 불과하다. 이 시간 속에 소설은 아홉 개의 단락으로 진행된다. 아홉 개의 단락은 주인공 ‘나(이상(李箱) 이라는 인물로 호칭함)’의 의식 속에서 재구성되는 과거와 현재라는 두 개의 공간에서 이뤄진다. 하나는 서울에서의 기억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의 동경이다. 두 개의 시공간은 주인공의 내면 의식에서 그대로 하나가 되어 이어진다. 여기서 영화 이야기의 원리가 되는 몽타주 기법이 활용된다. 몽타주 기법은 영화에서 주제와 연관된 필름을 모아 하나의 연속물로 결합하는 편집 기술이다.

 이 작품에서는 작가 이상(李箱)의 경험적 자아와 개인적 체험이 반영되고 있다. 이 체험은 사실 자체가 왜곡되기도 하고 부분적으로는 무질서하게 나타난다. 매우 섬세한 소설적 장치와 전략에 의해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시도하는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따라서 작품 속 문장들의 상호관계를 정밀하게 해석하지 않으면 독자들은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단편소설 『실화』는 주인공(李箱)이 개인사라는 동기에서 시작된 자신의 동경행을 반성하면서 끝이 난다(현실에서, 그는 동경제국대학 부속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했다 (1937.4.17 )).

 


 작품 속 '꽃'은 이상(李箱)이 강사로 나가는 교실의 학생인 C양이 준 물건으로, 이상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을 의미한다. 작중 '나'는 비밀에 관한 격언으로 소설의 막을 여는데 대략 이런 식이다.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이 문장은 작중 여러 번 반복되며 말미에 가서는 '비밀이 없어진 이상(李箱)'을 자조하면서 끝을 맺는다.
 '꽃을 잃다'는 작품의 제목이 암시하는 영역은 사랑이라든지 연애 등의 사적 영역의 실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대적인 문명 공간을 꿈꾸던 작가 자신(李箱)이 병고로 인하여 꿈과 열정을 상실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실화’는 '꽃을 잃어버린다'는 의미인데 여기에서 '꽃'은 작가 이상(李箱)이 진정한 근대의 발상지라 믿었던 동경과 이 동경이 가지는 비밀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논자도 있다. 하지만 주인공은 자신이 믿었던 동경은 한낱 이미지에 불과했고 진정으로 자신이 원했던 모습을 동경에서 찾을 수 없게 되자 절망하게 된다는 분석도 있다.
 주인공의 사적인 내면세계를 나타내기 위해 타인 및 상상과의 접촉을 여러 번 끌어들인 이 작품은 결국 하나의 패러디를 표현하며 끝난다. 죽음을 앞둔 작가 이상(李箱), 그가 꿈꾸던 공간은 누군가의 발길에 짓밟힌 한 송이 국화처럼 참담할 뿐이다.

 
 
 

 

 

☞진보초(神保町) :

 

일본 도쿄 지요다구 간다에 있는 지명이다. 현재는 고서점가가 위치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