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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손창섭 장편소설 『유맹(流氓)』

by 언덕에서 2023. 1. 25.

 

손창섭 장편소설 『유맹(流氓)』

 

 

손창섭(孫昌涉. 1922~2010)의 장편소설로 1976년 1월 1일부터 같은 해 10월 28일까지 252회에 걸쳐 [한국일보]에 연재한 작품이다. ‘떠도는 유랑민’이라는 뜻의 제목으로 한 장편소설 『유맹』에는 해방 이전부터 식민지 노동자로 살다 일본에 정착한 재일조선인 1세대와 그의 자식들인 2세대의 삶이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장편소설 『유맹』은 고향인 북한으로 가지 못하고 남한으로 이주한 최원복 노인, 그의 귀환을 전송하는 재일조선인들 그리고 남한에 귀환하고 싶지만 가지 못하는 서술자 ‘나’, 자살한 성기, 아프리카로의 망명을 요청하는 다케오 형제 등 인물 대부분이 작품의 제목처럼 ‘유맹’ 즉 디아스포라임을 암시한다. 손창섭의 『유맹』은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재일조선인들의 비극적 삶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한 수준 높은 문학작품이라는 점에 그 의의가 깊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서술자 ‘나’는 중학교 2학년 딸, 일본인 부인과 함께 일본에서 살고 있다. 어느 날 딸아이가 같은 반 남자아이로부터 괴롭힘을 당한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한다. 그 소년의 집을 찾아가 문제를 해결해 보기로 한 ‘나’는 최인기 부부와 만나게 되고, 최인기의 아버지 최원복 노인을 알게 된다.

 최원복은 식민지 말기 농촌의 어려운 삶을 견디지 못하고 평양에 가서 밥벌이를 시도하나 여의치 못하여 일본으로 이주하여 탄광노동자, 식당잡역부 등 고된 일을 하며 재일조선인으로 사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는 조선인의 정체성을 고수하며, 환국을 꿈꾼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같은 재일조선인 1세대인 다카무라 사장은 일본에서 돈을 벌기 위해 귀화하고, 완벽한 일본인으로서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들의 자식 세대, 즉 재일조선인 2세대는 정체성의 혼란을 보여준다. 최원복 노인의 막내아들 최성기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 때문에 자살하고, 성기의 친구인 백청년은 조총련계 학교 출신 아내와 극심한 사상적 불화 끝에 이혼한다. 그리고 다카무라 사장의 아들 다케오는 가정을 돌보지 않고 귀화한 아버지 때문에 조선인을 혐오하며 물의를 일으킨다.

 이후 ‘나’는 최원복 노인의 귀국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다. 최 노인처럼 환국을 시도하지는 않으나 한국의 개울가에서 소년과 함께 즐겁게 가재를 잡는 모습은 ‘나’가 한국에 대해 여전히 애정을 품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본으로 돌아온 ‘나’는 한국으로 떠나는 최원복 노인을 환송한다.

 

 

 이 소설은 작가 손창섭이 1973년 도일한 이후 겪었음직한 일들이 그려져 있다는 점에서 자전적 소설로 평가받는다. 재일조선인 1세대라 할 수 있는 최원복 노인의 과거 이야기와 서술자 ‘나’가 재일교포의 의식 경험을 관찰하는 현재 이야기가 교차적으로 진행된다.

 서술자 `나`는 일본에서 만난 재일조선인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인물이다. 먼저, 최원복 노인은 재일조선인 1세대로 일제식민지 시대를 힘겹게 살아온 인물이다. 최원복은 역사적·실존적 상흔을 치유하려는 방법으로 `한국적인 것`을 지켜나가며 민족 동일성을 회복하고자 노력한다. 최원복의 아들인 최성기는 재일조선인 2세대로 자아정체성 형성에 극심한 혼란을 느끼다 자살한다.

 또 다른 재일조선인 2세대인 다케오는 일본인으로서 ‘비국민’이라는 존재에서 ‘일본 국민’이 되기 위해 노력을 한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다케오는 재일조선인 1세대와는 달리 조국에 대한 개념이 약하다. 소설 속 서술자 ‘나’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일본에 남은 이주민, 즉 디아스포라의 삶을 선택한다.

 장편소설 『유맹』은 손창섭의 도일(渡日) 후 일본 생활을 추측할 수 있는 자료의 기능도 가질 만큼 자전적인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손창섭은 이 소설을 통해 자신의 가족들이 겪은 에피소드는 물론이고, 재일 교포들의 여러 유형을 등장시켜 당시 일본 내에서 재일 교포들이 겪을 수 있는 고민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그들이 가진 민족과 국가에 대한 인식은 개인의 삶을 구성하고 유지하는 데 주요하게 작용하는 요소이다.

 그뿐만 아니라 『유맹』에는 동포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의 양식이 그대로 등장할 정도로 사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 재일 교포 사회 내부와 관련된 기사나 연구 자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소설은 일제 말기에서 해방공간으로 이어지는 시대,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으로 이주해 간 최원복 노인의 이야기를 통해 홋카이도 징용 노동자들의 수난사를 재구성한다. 동시에 작가 자신의 분신 격인 ‘나’의 이야기를 병치시켜 그 시대 재일 한국인들의 보편적인 운명을 밀도 있게 다룬다.

 1922년 평양에서 태어난 손창섭은 일본에서 수학하고, 해방 이듬해 귀향했다가 1948년 월남했다. 1952년 <공휴일> <비 오는 날> 등의 단편소설로 문단에 데뷔한 뒤 <혈서> <잉여 인간> 등의 문제작을 발표하며 전후 한국 문단의 대표작가로 떠올랐으나 1973년 돌연 아내가 있는 일본으로 건너가 자취를 감췄다.

 손창섭은 남한에서 고통스러운 밑바닥 생활을 체험했는데 해방 후 만주와 일본 등지에서 귀국한 이른바 ‘해방 따라지’들과 자활건설대를 조직하거나 미군 부대 통역관을 구타한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1개월간 복역한 것도 해방 이후였다. 출소 이후 38선을 넘어 고향인 평양을 찾아갔다가 반동분자로 찍혀 1948년 월남한 그는 교사, 편집자, 출판 사원을 전전하던 중 한국전쟁을 만났고 피난지 부산에서 남편을 찾아온 일본인 아내와 기적적으로 상봉한다. 아내는 아들을 친정 호적에 올려놓고 대한해협을 건넜다.

 1953년 단편소설 <사연기>가 김동리에 의해 추천 완료되어 등단한 이래 그는 자신만의 문학적 아성을 쌓아갔다. 그러나 그는 홀연히 아내의 조국인 일본으로 건너가 국내 문단과는 소식을 끊었다. 대표적인 전후(戰後) 1세대 작가인 손창섭은 1973년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부인과 단둘이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됐지만 구체적인 근황이 확인되지 않다가, 2010년 사망 소식이 국내에 전해졌다.

 이처럼 『유맹』은 작가 손창섭의 디아스포라 체험이 잘 드러나 있다는 점과 이러한 체험에 근거,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식민지 경험과 뒤를 이은 분단, 일본으로의 이주 등 손창섭이 겪은 한국 특유의 다단한 역사적 경험 속에서 형성된 이질적인 문화적 접촉 혹은 다양한 민족적, 개인적 정체성의 문제를 환기하는 작품이다.

 

 

☞ 단편소설 「사연기」 : https://yoont3.tistory.com/11303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