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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현대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남아있는 나날(The remains of The day)』

by 언덕에서 2023. 10. 17.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남아있는 나날(The remains of  The day)』

 

 

일본계 영국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 カズオイシグロ, 石黑 一雄, 1954~)의 장편소설로 1989년 발표되었다. 인생의 황혼녘에 비로소 깨달은 삶의 가치 그리고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허망함과 애잔함을 내밀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일본계 영국 작가 이시구로는 영국 귀족의 장원을 자신의 세상 전부로 여기고 살아온 한 남자 스티븐스의 인생과 그의 시선을 통해 근대와 현대가 교차하면서 가치관의 대혼란이 나타난 1930년대 영국의 격동기를 작가 특유의 시선과 문체로 풀어내고 있다. 작중 주인공 스티븐스가 ‘위대한 집사’가 되기 위해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사랑하는 여인과 아버지 그리고 30년 넘게 모셔 온 달링턴 경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우리 인생에서 정말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 준다. 

 1989년에 [부커상]을 수상한 『남아 있는 나날』은 1993년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영화로 제작되었다. 영국 배우 앤서니 홉킨스와 에마 톰슨이 스티븐스와 켄턴 양으로 호흡을 맞춰, 황혼 녘에 깨닫는 사랑 이야기로 또다시 화제가 된 바 있다. 이시구로는 2017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영화 [남아있는 나날], 1993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소설은 영국의 한 저명한 대저택의 집사로 평생을 보낸 스티븐스가 생애 첫 여행을 떠나는 현재와 그곳에서의 지난 시절에 대한 회상이 짜임새 있게 교차하면서 진행된다. 스티븐스는 여행하는 내내 ‘위대한 집사’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이야기한다. 위대한 집사란 주인에 대한 절대적 믿음, 복종, 이를 넘어선 헌신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자신이 현재까지 헌신해 온 영국 최고의 저택인 달링턴 홀과 그의 주인 달링턴 나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스티븐스가 개인적인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맹목적인 믿음으로 모셨던 주인은 '선량하고 명예를 중시할 뿐 아니라 현실을 보는 눈도 어두웠기 때문에' 나치에게 이용당한 후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후 대저택은 미국인 거부 패러데이에 팔렸고 스티븐슨은 일괄 거래의 한 품목으로 저택과 함께 새주인에게 양도되었다. 이에 허망함과 상실감을 느낀 스티븐스는 그런데도 집사라는 직분에 최선을 다한 자신의 직업관을 끊임없이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의 지난 시절을 정당화하려 든다.

 스티븐스가 여행을 떠난 계기는 새 주인의 권유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목적도 있다. 오래전, 달링턴 홀이 명성을 떨치던 시절 총무로 같이 일했던 켄턴 양을 만나는 것이다. 여전히 그에게는 ‘미스’ 켄턴인 그녀의 갑작스러운 편지를 받고, 그는 그녀가 다시 달링턴 홀로 돌아오고 싶어 하고 그가 그녀에게 그러한 제안을 해 주길 기다리고 있다고 믿게 된다.

 6일간의 여행 내내 스티븐스는 자신에게 각별했던 그녀에게서 받은 편지를 한 줄 한 줄 읊으며 지난날을 회상한다. 켄턴 양은 적극적으로 스티븐스에게 여성으로서 다가섰다. 스티븐스 또한 그녀에게 이성으로서 사사로운 감정이 있었으나, 집사라는 직업에 충실하기 위해 애써 자신의 마음을 외면했다. 결국, 그녀는 그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했고 이 때문에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이십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같이 일할 것을 제안하기 위해 그녀를 찾아간다. 스티븐슨의 행동은 결국 또다시 자신의 감정은 감춘 채 공적인 업무를 전면에 내세우는, 그의 살아온 방식일 뿐이다. 그런데 황혼을 맞이한 지금에야, 달링턴 홀의 전성기에 함께 일한 짧은 시간 동안 그녀를 진실로 사랑했음을 그는 절절하게 깨닫는다. 하지만 그는 그녀와 재회했을 때조차 진심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가슴에 묻어 둔 채, 그녀를 또 한 번 떠나보낸다. 이후 켄턴이 떠난 선창에 불이 들어오자 뒤의 군중들이 환호성을 울리며 이벤트를 반겼다. 스티븐슨은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간 사람의 말이 맞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저녁은 하루 중 가장 좋아하고 기다려지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이젠 나이가 들어 황혼을 여유롭게 맞이할 수도 있는 스티븐스은 새 주인을 위해 헌신하겠다며 새롭게 각오를 다지려 한다. 젊은 날 놓쳐 버린 것들의 소중함을 깨달았으나, 자신이 살아온 인생 전체를 부정하고 새로운 길을 가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변화를 택하기보다는 다시 부조리하고 모순적인 일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일본계 영국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 カズオイシグロ, 石黑 一雄, 1954~)

 

 집사의 품위에 앞서 존중되어야 했던 인간으로서의 품위에 대한 성찰이 부족했던 스티븐스는 결국 ‘성실하게 일상을 반복함으로써 악을 돕고 악에 이용당해’ 왔다. 이러한 스티븐스와 달링턴 경의 관계는, 영국의 지나간 역사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자신만의 절대적 가치에 매달리는 우리를 고민하게 하는 지점인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달링턴 홀이라는 극히 한정된 공간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그 공간을 찾아오는 숱한 정치가들의 시선을 통해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 사이에 있던 격동기의 영국과 세계정세를 극적으로 보여 준다. 또한, 대영제국의 구시대적 사고방식이 미국의 현실주의적인 기반으로 넘어가는 상황, 그 변화의 시대에서 시대착오적인 가치관에 얽매이는 것이 얼마나 부조리한가를 여실히 보여 준다. 스티븐스가 고집스레 지키고자 했던 장인정신은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기엔 너무 꽉 막힌 ‘시대의 잔재’로 상징된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사랑마저 외면하며 견고하게 자신만의 성을 쌓고, 황혼기에 이를 깨달아 가슴 아파하지만 흘러간 시간만큼이나 변해 버린 현실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스티븐스를 통해 독자는 지나간 사랑의 미열을 앓게 된다.

 이시구로는 1954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1960년 해양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영국으로 이주해 켄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이스트앵글리아대학에서 문예 창작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일본을 배경으로 전후의 상처와 현재를 절묘하게 엮어낸 첫 소설 <창백한 언덕 풍경>(1982)으로 [위니프레드 홀트비 기념상]을 받았다. 일본인 예술가의 회고담을 그린 <부유하는 세상의 예술가>(1986)로 [휘트브레드 상]과 [이탈리아 스칸노 상]을 받고, [부커상] 후보에 올랐다.

 1989년에 발표한 세 번째 소설 『남아 있는 나날』로 [부커상]을 받으며 이시구로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주었으며, 2017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1993년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영화로 제작되어 또 한 번 화제가 된 바 있다.

 

 

 


 

남아 있는 나날

                                                          신현림(1960~)

 

오랜만에 만난 이 레스토랑은

고운 비단 실은 낙타가 지나간 사막 같으오

한시절 우리가 엮은 비단은

기억 속에서 펄럭이고 밤이 오는 사막을

술로 적시며 당신과 친구가 되어 있다니

여전히 당신 손가락은 백합 같으오

해질녘이면 몰려오는 백합 냄새로 괴로웠소

어제 [남아 있는 나날]이란 영활 보았소

사람들이 밤에 불을 켤 때

최고의 시간이 되길 기대하기 때문에

항상 환호를 한다는 말이 생각나오

 

나의 나무에 환한 등불이 열린

잊을 수 없는 한시간 반이었소

은은히 빛나는 당신 머리색이 아프오

그만 일어설 시간이 다가오오

 

- 시집 <세기말 블루스>(1996) [창작과비평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