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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이광수 장편소설 『유정(有情)』

by 언덕에서 2022. 12. 27.

 

이광수 장편소설 『유정(有情)』

 

 

이광수(李光洙. 1892∼1950)의 장편소설로 1933년 10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작자의 정신주의 애정관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작품이다. 이광수의 작품에서의 애정 문제는 계몽주의나 민족주의적인 문제의식 못지않게 중요한 기초였다. 민족주의가 가장 강렬하게 설교되거나 종교적인 이상이 거의 전적으로 추구되는 작품의 경우에도 그것이 애정 문제와 결부되지 않고 별개로 묘사된 예는 거의 없다. 이러한 작가의 근대적인 애정 의식은 그의 이상주의적인 경향이 종교적으로 심화, 확대됨에 따라 형이상학적인 정신 지상주의로 상승 발전되어 간다. 이러한 그의 이상주의적 애정관이 처음으로 체계화되어 나타나는 작품이 바로 『유정』이다.

 춘원의 소설은 본래 남녀 간의 삼각관계로 인한 갈등이나 치정 등 연애의 통속적 에피소드에 의존하는 일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유정』은 중학교 교장인 중년의 가장이 자신의 수양딸과 사랑에 빠져 세간의 추문에 휩싸인 채 해외로 도피한다는 매우 자극적인 설정을 하고 있다. 가장 통속적인 소재로 대중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고 이야기에 대한 접근성을 높임으로써, 이야기에 담긴 교훈적 메시지를 가능한 한 많은 이에게 널리 전달하는 것은 그의 출세작인 <무정(無情)>(1917) 이래로 일관된 경향이다. 또한 <무정>에서 시작된 이광수의 ‘정(情)’에 대한 탐색은 <재생>과 <흙>을 거쳐 『유정』에서 완성되고 있다.

 끝내 시베리아의 호반에 마련한 은거지에서, 남정임이 도착하기 직전에 그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품은 채로 죽는 주인공 최석은 세상이 그에게 덮어씌운 억울한 누명 앞에서도, 그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던 애욕의 번민 앞에서도 떳떳하게 승리한 자가 된다. 또한, 순백의 눈으로 뒤덮인 시베리아, 투명하고 맑은 바이칼호는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인간’인 최석의 죽음이 갖는 고결한 성격을 뒷받침하는 배경이 된다. 이 소설은 1966년 김수용에 의하여, 1976년 강대진에 의하여, 1987년 김기에 의하여, 2018년 황일에 의하여 각각 영화화되었다.

 

영화 [유정], 1966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최석은 N형한테 다음과 같은 내용들의 편지를 부친다.

 최석은 친구 남상호가 죽자 북경서 중국인 부인과 딸 정임을 데려다 자신의 집 근처에 집을 얻어 살게 하였다. 최석이 기미년에 옥에 들어가 삼 년 후에 집에 돌아와 보니 상호의 부인은 죽고 딸 정임은 집에 와 있었다. 정임은 얼굴이나 몸이나 다 예뻤고, 공부도 잘하여 부인과 딸에게 구박을 받고 살 수밖에 없었다. 최석의 부인과 딸은 불쌍하여 정임을 잘 대해주는 아버지를 미워하게 되었고 특히 부인은 정임이가 16세가 되어 처녀티가 나자 질투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정임이 고등보통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여 일본 유학을 가게 되자, 최석은 마음은 섭섭하였으나 집안은 평온을 되찾았다.

 부인이 폐병에 걸려 어린 아들을 에미에게서 떼어놓느라고 애를 써 마무리를 짓자 정임이 아프다는 편지를 받았다. 최석은 일방적으로 정임에게 가겠다고 선언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정임의 병을 어느 정도 돌보아 주고 돌아오니 부인은 정임이와 부정한 짓을 하고 온 것처럼 대하였다. 그 이유는 부인의 감시인이었던 정임의 방 동료가 보내준 일기 때문이었다. 부인이 증거로 보여 준 일기에는 최석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써 있었다. 최석이 부인에게 일기장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여기저기 감추다 딸 순임의 도움을 받게 되고 순임은 어머니가 여러 사람에게 보여 주며 남편인 자신을 비방하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어느 날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훈화를 할 때 학생들이 웃어 질책을 하고 칠판을 보니 ‘에로 교장 최석, 에로 여자 고등 사범학교 남정임’이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그것은 K교무 주임의 교장자리를 노린 음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날 석간신문에 ‘에로 교장’이라는 문구가 수없이 난 기사가 실렸다. 최석이 교장 자리를 내놓게 되자 딸 순임은 울었으나, 부인은 말을 함부로 하며 남편을 계속 비방하였다.

 최석은 유언장을 쓰고 재산을 분배하여 공증증서를 만들고 아는 이가 없는 만주로 떠나려다 정임을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 동경으로 갔다. 병원에 있는 정임을 보고 학교를 사직했고 여행길을 가려고 한다고 말을 하고 여관으로 와 편지를 남기려 하다 정임이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때 정임이가 찾아와 아버지와 하루만이라도 같이 살고 싶으니 데려가 달라고 하였다. 자신의 일기 때문에 아버지가 곤경에 처한 것을 슬퍼하는 정임에 대해 북받쳐 오르는 사랑의 감정을 억누르며 내일 만나 보고 떠날 터이니 병원으로 가자고 돌려보내었다. 보내고 나니 정임이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북받쳐, 억누를 수 없게 되었을 때 노크를 하며 정임이가 다시 찾아와 다시는 못 뵐 것 같아 왔다고 하였다.

 정임에게 내가 준 재산으로 공부를 하고 힘 있게 살라고 하며 보내려 할 때 한 번만 안아 달라고 하여 사람의 마음을 억제하며 안아주자 아버지가 써 논 편지에서 죽으려고 하는 것을 알았던 정임은 돌아가시지 말고 살아달라고 부탁한다며 떠나갔다.

 정임과의 영원한 이별을 생각하며 뒤척이다 다음날 여행을 떠났다. 잘 아는 아라사 장군에게 여행증을 얻어 북만주 광야를 지나다 석영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기차에서 뛰어내려 여관에 짐을 맡기고 아름다운 호수들을 지나치며 사막 속으로 계속 걸어가다 앞에 나타난 호수 속에서 사랑하는 정임의 모습을 찾다가 선생과 제자 사이에 사랑의 도피를 해 여기에서 사는 조선인 부부를 만나게 되었다. 그 부부와 헤어져 바이칼호로 가서 정임에 대한 사랑의 마을을 외치다 최후의 방랑 길을 떠났다.

 여기까지가 최석이 보낸 편지들의 내용이었다. N은 최석의 편지를 아직도 남편을 미워하는 부인에게 주고 집에 돌아와 있는데 정임이가 온다는 전보를 받는다. 정임이 또한 최석의 편지를 받고 최석을 찾아 떠나가려고 경성으로 온 것이다. 최석의 편지를 본 부인은 남편과 정임이 사이에 부정한 일이 없었다는 것을 믿게 되었고 아버지와 정임이의 사이를 이해하는 순임이는 아직 병중인 정임이를 데리고 아버지를 찾아 떠난다. N은 순임에게서 여행 도중에 일어났던 내용과 정임이와 아버지의 사이를 더욱 이해하고 동정하는 내용의 편지를 받는다.

 그 후 N은 정임에게서 자신은 병으로 인해 바이칼호반 최석이 머물렀던 여관에 누워있고 순임은 주인 노파와 아버지 있는 곳으로 떠났다는 편지를 받는다. 정임의 편지를 받은 십여 일 후 순임에게서 온 아버지 병이 중하니 돈을 가지고 오라는 전보를 받는다. N은 순임이 있는 곳으로 가 병석에 누운 최석을 만난다. 최석은 N에게 자신의 일기를 보고 남이 보지 않게 태워 버리라고 한다. 일기 내용은 정임에게로 향한 그리움과 사랑의 감정을 쓴 것이었다. 최석의 병이 조금 나아지자 N은 정임을 데리러 떠난다. N과 함께 순임이 병든 몸을 이끌고 왔을 때 최석은 이미 죽어 있었다.

그 후 N은 정임이 최석이 있던 방에 가만히만 있다는 편지를 주인 노파에게서 받고 정임이가 죽었다는 기별이 오면 둘을 나란히 묻어 주겠다고 생각한다.

 

1987년 영화 [유정]

 

 『유정』은 비록 연애와 사랑에 관한 삽화를 다루지만, 그 본질은 ‘죄’에 대한 철학적 고찰에 가깝다. 한편으로는 종교적으로 승화된 보편적 사랑을,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영혼의 순정한 아름다움을 갈구하는 자기애를 그려내고 있다. 이와 같은 사랑이란 모두 육신을 지닌 인간이 저지르곤 하는 죄악을 넘어설 수 있을 때야 가닿을 수 있는 경지를 가리키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 소설은 일인칭서술로 되어 있으며, 편지ㆍ일기 등이 삽입되어 고백적 소설의 양식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여행의 주제를 아울러 사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주제와 형식이 잘 조화된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하는 이 작품은, 이광수의 소설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애정 문제를 소재로 한 연애소설로 볼 수 있는데, 여기서도 절대적 애정과 이상적 사랑을 추구하는 작가의 연애관을 볼 수 있다.

 사제 간이고 부녀지간이며, 이성지간이기도 한 최석과 남정임의 미묘한 애정 관계를 종교적인 세계로 승화시킨 작자의 애정 윤리를 엿볼 수 있다. 「유정」은 선생과도 같으며 아버지 대신 자기를 길러준 부친과도 같은 최석에 대한 남정임의 정신적인 애정을 취급한 작품으로, 도덕적인 애정관을 넘어선 정신 지상주의적인 애정관을 제시해 보인다.

 

 

 이 작품은 독자가 혼동할 만큼 사건의 사실성을 강조하였고, 편지와 일기 형식이 잘 조합되어 있다. 자세히 보면 이 소설의 대부분은 춘원에게 보낸 친구 최석의 편지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해결하려고 한 일기 형식의 글로써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의 특징으로 실제 작가가 개입한 뒷부분은 다른 소설에서처럼 작가의 행동이 어색하지 않게 하고 앞부분 최석의 편지와 작가의 실제 행동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작품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항목으로 구성하였다.

 『유정』은 최석과 독립운동을 하다 감옥에서 죽은 친구의 딸 남정임의 정신적인 사랑을 편지와 일기 등의 형식을 빌려 서술한 고백 소설이다. 부인과 딸, 사회로부터 오해와 비난을 받는 최석과 남정임의 마음이 사랑으로 변해가는 과정과 그들이 사랑을 확신한 후의 행방을 통해 작가 이광수가 추구했던 이상적인 사랑이 무엇이었는지 그 경지를 보여준다.

 『유정』은 ‘계몽’에서 ‘이상’으로 , ‘기독교’에서 ‘불교’로 옮아가는 후기 이광수 문학의 새로운 양상과 전환을 보여주는 소설 작품이다. 장편소설 『유정』의 성취는 이광수 문학의 특질인 계몽주의나 문명개화 예찬론 같은 교훈적인 주제가 배제되어 있다. 사회규범에서 벗어난 개인의 사랑과 좌절을 일인칭으로 그려낸 이 작품을 통해 작가가 추구하고자 한 이상적 사랑의 경지를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