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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이상 단편소설 『김유정』

by 언덕에서 2022. 12. 20.

 

이상 단편소설 『김유정』

 

 

이상(李箱·김해경. 1910∼1937)의 단편소설로 작가 사망 2년 후인 1939년 [청색지]에 발표되었다. 모더니스트 이상은 동료 문인인 김기림, 박태원, 정지용, 김유정 등 무려 네 명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구상했는데, 이 작품은 김유정을 주인공으로 한 내용이다. 수필 형식으로 쓴 이 작품에는 주인공 ‘나’와 실명의 ‘김유정’ 그리고 ‘S’와 ‘B’가 등장한다. 함께 자살을 도모할 정도로 절친이었던 소설가 김유정을 주인공으로 한 이 소설은 이상이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함께, 그 자신의 삶(생명)에 대한 애정을 에둘러 보여주고 있다.

 이상은 1936년 [조광(朝光)]에 단편소설 <날개>를 발표함으로써 시에서 시도했던 자의식을 소설로 승화시켰다. <날개>는 그의 첫사랑 금홍과의 2년여에 걸친 무궤도한 생활에서 얻어진 작품으로, 그 자신의 자화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박제된 천재’의 번득임이 나타나 있다. <날개>를 발표할 무렵, 같은 폐병을 앓고 있던 작가 김유정과 동반 자살을 기도한 적도 있었던 사실을 미뤄 볼 때 이 작품은 1930년대 중반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이상 사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소설적인 구성이라기보다는 문우 사이의 어느 하루 에페소드를 담은 수필로도 읽어진다. 1936년 여름, 이상 김해경은 친구인 화가 구본웅의 여동생과 돈암동 흥천사에서 결혼했으나, 생활을 비참했고, 몸은 극도로 쇠약해져 갔다. 이해 암담한 생활과 자신에 대한 후회의 눈물을 남긴 채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이듬해 도쿄 거리를 굶주림과 병마에 시달리며 배회하다가 사상불온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곧 풀려나왔다. 이후 자기 생활의 결산과도 같은 장편소설 <종생기> 한 편을 남기고 그 해 4월 17일 도쿄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사망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김기림, 정지용, 박태원, 김유정은 각각 개성이 강한 분들이고, '나'는 그들을 소재로 소설을 쓸 예정이다.

 어느 날 초저녁에 ‘나’가 술을 먹고 곤히 자는데 새벽 한 시가 넘어 김유정이가 'S'와 ‘B'와 함께 술에 취해서 대문을 두드렸다. 나는 벙거지를 쓰고 그들을 따라나섰고 단박에 취해버렸다. 그들은 가무음곡(歌舞音曲)으로 동네를 소란케 하더니 주파(酒婆)를 탄압했다. 이후 취중 문학담을 주고받던 유정과 ’S'는 서로 주먹질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싸움의 주제는 춘원(春園)의 문학적 가치에 관해서였다.

 주파(술을 파는 늙은 여자)의 요청으로 ‘나’와 'B'는 유정과 ‘S'를 술집 밖으로 데리고 나왔으나 이들은 대로 한복판에서 활극을 벌였다. 싸움을 말리던 B가 유정의 턱을 때렸고 유정이 피하자 B는 S를 걷어찼다. 이후 유정과 S가 B를 공격하는 등 포복절도할 지경으로 싸움은 번져갔다. 마침내 골목을 순행하던 경관이 이들을 보며 집으로 가라고 소리쳤다. 나는 이들이 추운 날 유치장에 들어가면 큰일이겠으므로, “곧 집으로 데리고 가겠습니다. 용서하십쇼. 술들이 몹시 취해 그렇습니다.”하고 고두백배(叩頭百拜)했다.

 유정은 폐가 거의 결딴이 나다시피 못쓰게 되었다. 그가 웃통을 벗은 것을 보았는데 기구한 수신(瘦身: 마르고 야윈 몸)이 나와 비슷하다. 그는 나더러 술을 끊으라더니 이제는 정릉리 어느 절간에서 요양 중이다. 그가 건강을 회복하기를 독자와 함께 기원한다.

 

소설가 김유정(金裕貞1908.1.11-1937.3.29)

 

  (전략) 암만해도 성을 안 낼 뿐만 아니라 누구를 대할 때든지 늘 좋은 낯으로 해야 쓰느니 하는 타입의 우수한 견본이 김기림이라.

 좋은 낯을 하기는 해도 적이 비례(非禮)를 했다거나 끔찍이 못난 소리를 했다거나 하면 잠자코 속으로만 꿀꺽 없이 여기고 그만두는 그러기 때문에 근시 안경을 쓴 위험인물이 박태원이다.

 없이 여겨야 할 경우에 “이놈! 네까진 놈이 뭘 아느냐”라든가 성을 내면 “여! 어디 뎀벼봐라”쯤 할 줄 아는, 하되, 그저 그럴 줄 알다 뿐이지 그만큼 해두고 주저앉는 파에, 고만 이유로 코밑에 수염을 저축한 정지용이 있다.

 모자를 홱 벗어 던지고 두루마기도 마고자도 민첩하게 턱 벗어던지고 두 팔 훌떡 부르걷고 주먹으로는 적의 볼따구니를 발길로는 적의 사타구니를 격파하고도 오히려 행유여력(行有餘力)에 엉덩방아를 찧고야 그치는 희유의 투사가 있으니 김유정이다. - 본문에서

 단편소설 『김유정』의 서두 부분이다. 이상은 이 작품만을 남긴 채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가 되어버리고 말아, 안타깝게도 독자는 김기림과 박태원, 정지용이란 소설은 만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동반 자살을 도모할 정도로 절친이었던 ‘희유(稀有:흔하지 아니함)의 투사’ 김유정만은 소설 속 인물로 만나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이상의 연인 금홍과 권순영, 아내 변동림으로 이어지는 그로테스크한 로맨스와 이를 통해 전하고 있는 이상의 다양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이상은 흔히 실험적 구성과 파격적 문체를 통해 혼란스럽고 불안한 인간의 내면 심리를 형상화한 작가이다. 이상의 난해한 시가 그렇듯 이상의 소설들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한 세계, 정확히는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독자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상의 소설들은 그 내용을 기준으로 볼 때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평론과 소설과 수필 사이에 있어 그 장르 규정의 문제가 오랫동안 학계에서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김유정』만은 앞에서 이야기한 이상의 다른 작품들과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소설 『김유정』은 ‘교만의 예술’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이상의 예술론이라 할 수 있고, ‘희유의 투사’ 김유정이 주인공인 소설이라 할 수 있으며, ‘이상이 기억하는 김유정’ 정도의 수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작품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주인공 유정을 포함한 세 명의 술꾼들의 드잡이를 그린 관찰자의 이야기다. 중요한 것은 서문에서도 느껴지지만, 이 작품이 김유정에 대한 극진한 애정을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아래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전략) 김형이 그저 두 달만 약주를 끊었으면 건강해지실 텐데.”

 해도 막무가내하더니 지난 칠월 달부터 마음을 돌려 정릉리 어느 절간에 숨어 정양 중이라니, 추풍이 점기(漸起)에 건강한 유정을 맞을 생각을 하면 나도 독자도 함께 기쁘다. - 본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