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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이상 단편소설 『지주회시(蜘蛛會豕)』

by 언덕에서 2022. 12. 12.

 

이상 단편소설 『지주회시(蜘蛛會豕)』

 

 

이상(李箱, 김해경. 1910∼1937)의 단편소설로 1936년 [중앙] 지에 발표되었다. 이 작품의 제목 ‘지주회시’에서 지주(蜘蛛)란 거미를 뜻하고 시(豕)는 돼지를 뜻한다. 즉, ‘거미가 돼지를 만난다’라는 뜻이다. 소설 속의 '그'는 카페 여급인 아내를 뜯어먹고 살며, 아내는 손님들의 주머니를 노리며 산다. 남편과 아내, 이들 두 거미에게 양돼지 전무가 뜯어 먹히는 사건이 기본 줄거리이다. 이 작품에서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거미는 ‘아내’이나, 아내를 뜯어먹는 '그'는 실질적인 거미다.

 이상은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는 다재다능한 재주꾼이었다. 1934년 [중앙일보]에 <오감도>를 발표하여 난해시란 비난을 받았다. 1936년 [조광(朝光)]지에 문제작 <날개>를 발표했는데, 당시는 세계적으로 자의식 문학이 유행하여 일약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종생기>(1937) <동해> <실락원>등 그의 대부분 소설은 심리주의적 경향이 농후하여 생활의 표현이라기보다 극도로 피로한 인테리의 신경과 그 신경이 가져오는 자의식의 분열을 집요하게 추구하였다. 오랜 폐렴을 지니고 무질서하고 빈곤한 생활의 저변을 헤매다가 갱생을 도모하고 도일(渡日)했으나 1937년 도쿄대 부설병원에서 병마로 요절하였다.

 

좌로 부터 정인택, 박태원, 이상 김해경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그'는 카페 R 회관의 여급인 아내(나미꼬)를 뜯어먹고 산다. 그리고 아내는 카페에서 손님들의 주머니를 노리며 생활해 간다. 또한, A취인점(거래점)의 주임(主任)인 오(吳) 군은 '그'의 친구인데 역시 카페 R 회관의 여급인 마유미를 뜯어먹는다. 이처럼 말라깽이인 '그', 아내, 오(吳) 세 명은 살찐 인간들(마유미, 뚱뚱 주인과 뚱뚱보 신사)이 걸려들기를 기다렸다가 그들을 밥으로 삼는 거미들이다.

 '그'의 아내는 A취인점(거래점)의 전무인 뚱뚱보 신사가 고객 초대 망년회 전날 카페에서 술을 마시다가 자신을 말라깽이라고 자꾸 놀리자 그에 대하여 뚱뚱한 양돼지라고 되받아 버린다. 술기운이 있던 전무는 화가 나서 그녀를 층계 위에서 밀쳐 굴러떨어지게 한다. 그래서 그녀는 다친다. 이것을 목격한 카페 R 회관의 종업원들이 분개하여 경찰에 신고한다. 뚱뚱보 신사는 경찰에 구속되고 그리하여 뚱뚱보 신사와 뚱뚱 주인은 ‘그녀’와 '그'를 무마시키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일상적인 일들도 귀찮아하며 아내를 데리고 집으로 온다. 결국, 망년회가 예정된 다음 날 낮에 뚱뚱보 신사는 오(吳)를 통해서 아내에게 20원을 위자료로 전해 준다. 아내는 그 돈을 받고 공짜돈이 생겼다고 좋아하면서 10원을 '그'에게 준다. 흐릿한 밤에 아내가 피곤해서 잠든 것을 보고 '그'는 아내가 받은 20원을 모두 챙겨 들고 안개가 여급 마유미를 만나기 위해 카페로 간다.

 

 

 단편소설 『지주회시』는 이상의 일상생활에 대한 태도와 의식 세계를 가장 치밀하게 그려놓은 작품이다. ‘그’와 ‘아내’의 설정 인물은 <날개> <봉별기> 등의 두 경우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생명에 뚜껑을 덮고 온갖 벗에서, 관계에서, 희망에서, 욕구에서, 사람과 사람이 사귀는 버릇과 자기 자신을 닫은 채 버선 짝만 한 방안에서 게으름만을 꾸준히 되풀이하고 있는 그는 <날개>의 ‘나’나 <봉별기>의 ‘나’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무관심과 게으른 의식세계의 주인공이며, 양말 사이에서 밤마다 지폐와 은화를 쏟아놓고 때로는 예고도 없이 집 나가는 그의 아내 역시 <봉별기>와 <날개>에서 늘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이러한 아내와 자신과의 삶을 <날개>에서와 같이 일종의 숙명적인 사실로 받아들인다. ‘일상성’에 배어 흐느적거리는 아내와 그 아내가 사는 방과 그 뱉어놓는 돈,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그에게 있어 하나의 ‘거미’라는 존재로 나타난다. 자기의 피를 빨아먹고 있는 거미의 냄새란 바로 ‘일상적 현실’에서 풍기는 독소이며, 꾸물거리는 거미 다리는 일상성의 굴레에 얽혀 몸부림치는 행동이다. ‘어쩌다가 한 부부가 되어 버린’ 거미의 아내를 통하여 일상적인 세계의 공기를 마시고, 바꿔 신은 아내의 양말에서 계절의 변화를 식별하는, 이 필연적인 진전은 드디어 자기의 게으른 의식세계를 붕괴하고 다시 일상성과 관계를 맺게 한다. 이것은 <날개>나 <봉별기>에서 독자가 이미 보아 온 바다.

 그러나 「지주회시 에서는 아내와 나의 단조로운 대면이 아니라, 친구 ‘오(吳)’, R 회관의 ‘뚱뚱보 신사’. 창녀 ‘마유미’, A취인소(取引所 : 거래소)의 '전무' 등 또 다른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기는 하지만, 아내의 경우와 또 다른 무엇이 있다. 아내는 송곳처럼 야위어만 가는 대신 이들은 점점 더 윤택해지고 비대해져 간다. R 회관의 ’뚱뚱보’와 양돼지 ’전무‘, 그리고 ’마유미‘가 생활의 충실한 노예라면, ‘아내’는 생활에 패배한 학대받은 하인으로서 실패의 표본이다.

 그러나 그 ‘패배’는 ‘그’에게 있어서는 현실과 교통할 수 있는 다리이다. ‘그’는 아내를 통해서 일상 세계의 제왕인 돈을 맛보고, 그 돈의 위력에 눌려 아내가 쇠꼬챙이처럼 말라간다. '그' 또한 말라가는 아내에게서 풍기는 거미 냄새로 인하여 재차 말라간다. 그리하여 일상의 권화인 금전에서 받는 '그'의 굴욕과 상처는 이윽고 ‘거미’란 다름 아닌 '그' 자신이란 사실을 인식게 된다. 마침내 그는 생활에 무관심하고 게으른 자기 생활 태도에 대하여 절실한 회의를 일으킨다.

 

 

 이상의 다른 모든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소설에서 성(性)은 타락한 인간관계의 상징적인 상징으로 등장한다. 성이 타락해 있다는 것은 그것이 순수한 애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돈에 의해 거래되는 상품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돈을 매개로 하는 인간관계는 필연적으로 비인간적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지주회시」에 나타난 인간관계의 특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다른 어느 관계보다도 더욱더 관계의 결집력이 약하다. <지주회시> 속의 인간관계는 일관성을 유지하지 않고 그들은 임의성에 의해 부분적으로만 관계할 뿐이다. 그래서 언제나 서로의 인간관계에서 이탈될 준비가 다 되어 있다.

 둘째, 「지주회시 속에 나타나는 인간관계의 성격으로는 무의미성과 몰가치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인간관계의 무의미성과 몰가치성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반규범적인 행위 양식을 만들어 내고 있다.

 결국 「지주회시 에서 그려내는 인간관계의 성격은, 무소속성, 무력감, 무의미성, 몰가치성의 여러 양상이 복합적인 상호 연관 속에서 나타나며, 또한 그러한 몰가치화된 성격은 황폐해지고, 무력해지고, 비인간화된 사회상을 창조했다고 볼 수 있다.

 <날개>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도 남편과 아내가 등장한다. 다만, 다른 점은 <날개>에서는 남편과 아내가 종속적인 관계에 놓여 있음에 반하여 「지주회시 는 '그', '아내', '오(吳)', '마유미', '뚱뚱보' 등의 등장인물들이 서로서로 빨아먹고 사는 '거미' 같은 존재로 설정되어 있다. 즉, 카페 R 회관에서 A취인점(거래점)의 전무인 뚱뚱보라는 양돼지를 만난 아내는 층계에서 발길로 채어 굴러떨어졌다는 이유로 20원이라는 돈을 빨아먹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안개로 흐릿한 밤에 '그'는 아내에게서 나온 그 돈으로 '마유미'한데 간다. 결국, 아내는 '뚱뚱 주인'의 거미이고, '나'는 아내의 거미이고, '마유미'는 '그'의 거미이고, '오(吳)'는 '마유미'의 거미이고, '오(吳)'가 다니는 A취인점 전무는 '오(吳)'의 거미가 되는 셈이다. 곧, 빨아먹으면서 빨아 먹힌다.

  이와 같은 악의에 찬 순환 구조는 근대 도시인의 삶의 태도가 상호 착취자나 가해자의 성격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작가 이상(李箱)의 작품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사실이지만, 정상적인 가족이나 가족 구조는 와해하여 있다. 특히, '그'가 양돼지 전무의 위자료를 받아 들고 술을 마시러 가는 결말은 이상 문학의 위악적 성격을 잘 드러낸다. '거미는 나밖에 없다.'라고 자부하며, 아내가 뜯어낸 돈을 다시 뜯어먹는 '그'의 행위는 퇴폐와 병리의 극단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