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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현대소설

장 지오노 장편소설 『폴란드의 풍차(Le moulin de Pologne)』

by 언덕에서 2022. 10. 21.

 

장 지오노 장편소설 『폴란드의 풍차(Le moulin de Pologne)』

 

 

프랑스 소설가 장 지오노(Jean Giono.1895∼1970)의 장편소설로 1952년 출간되었다. 지오노는 제1차 세계 대전 때 징집돼 몇 차례 사선을 넘나들면서 전쟁을 통해 드러난 서구 문명의 야만성에 진저리를 쳤다. 이 체험으로 작가 지망생이었던 그는 현대 문명을 비판적으로 성찰했고, '자연 앞에 선 인간'을 형상화하면서 인간과 자연, 무생물이 합일되는 범신론적 생명관에 입각하여 작품을 썼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은 지오노의 자연 친화 사상인 소위  ‘지오니즘’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다. 『폴란드의 풍차』에서 장 지오노는 ‘자연 앞에 선 인간’이라는 초기의 주제를 ‘죽음’으로 옮겨와, ‘운명에 맞서는 인간’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프랑스 남부 ‘폴란드의 풍차’라고 불리는 영지에서 일어난 한 가문의 숙명적 몰락을 통해 인간의 유한성을 알리는 한편 야누스의 얼굴을 한 죽음, 생의 위협이자 따뜻한 위안인 죽음의 양면성을 서술했다. 한 집안에서 5대에 걸쳐 이어오는 불행한 사건의 연속은 G.G.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연상시킬 만큼 복잡하고 비극적이어서 읽는이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지오노의 단편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은 '성인을 위한 동화'와 애니메이션 영화로도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폴란드의 풍차’라고 불리는 영지가 위치한 도시에 사는 화자는 최근 이 영지의 소유자가 된 조제프 씨를 소개한다. 그는 타지에서 느닷없이 출현하여 도시의 모든 사람을 매료시키는 사십 대의 남자인데 정작 그의 정체에 대해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화자는 과거로 돌아가 코스트 가(家)에서 일어난 갖가지 비극적인 사건들을 이야기한다.

  코스트는 외국에서 오랫동안 체류하다가 아내와 두 아들을 우발적이고 처참한 사고로 잃고 이곳으로 귀향해 폴란드의 풍차라는 영지를 세운 장본인이다. 자신에게 남아있는 두 딸 아나이스와 클라라를 운명의 시련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코스트는 중매쟁이 오르탕스 양의 도움으로 대대로 평화로운 생활을 영위해 온 한 평범한 가문의 두 아들에게 시집보낸다. 코스트는 그 후 얼마 안 있어 낚시하다가 바늘에 찔려 죽는다.

  폴란드의 풍차에는 큰딸 아나이스와 피에르 부부가 살고 있는데 이들의 딸 마리는 버찌의 씨가 목에 걸려 죽고 아나이스도 거의 동시에 산고로 죽는다. 아나이스의 남편 피에르는 정신병원에 수용된다. 또한, 부부의 큰아들도 어느 날 산책 도중 실종되고 만다. 근처 기사령에 사는 클라라와 폴 부부는 액운을 피하고자 가족 모두를 데리고 파리로 이주하나 이들은 베르사유 열차 사고로 모두 몰살당한다.

  아나이스가 마지막에 낳은 아들 자크는 아버지인 피에르가 사망한 후 결혼한 조제핀과 행복한 생활을 하면서 두 자식, 장과 쥴리를 두지만 어느 날 급사한다. 장과 쥴리는 모두 학교에서 주변 아이들로부터 늘 코스트 가의 운명에 대해 들으며 ‘유령’이라고 놀림을 당한다. 이에 장의 마음은 혼란해지고 권총으로 자살한다. 쥴리도 우발적인 사고로 얼굴 반쪽이 일그러지고 만다.

  가족이 모두 죽고 난 다음 쥴리는 폴란드의 풍차 주인이 된다. 쥴리는 그 도시에서 미친 여자로 취급받는데 어느 무도회 날 무도회장에 모인 사람들의 야유를 받고 조제프 씨의 집에 피신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두 사람은 결혼한다. 이 부부 사이에 레옹스라는 남자아이가 태어나고 조제프 씨는 폴란드의 풍차에서 땅을 추가 구입하고 또 개간하고 조경하여 지상의 낙원처럼 꾸민다. 조제프 씨의 개인변호사인 화자도 그의 사업을 돕는다. 조제프 씨는 번창한 영지를 아내 쥴리와 아들 레옹스에게 남기고 정상적인 죽음을 맞는다. 폴란드의 풍차는 운명의 위협에서 벗어나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어느 날 저녁, 쥴리는 미친 여자로 취급받던 때의 옷차림을 하고 옆 도시 화자의 집을 찾아온다. 그녀의 말에 의하 면 아들 레옹스는 자기와 반신불수의 아내를 버리고 매춘부와 함께 폴란드의 풍차를 영원히 떠나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쥴리 자신도 아들을 찾기 위해 헤매다가 어둠 속에서 실종되고 만다.

 

  5대에 걸친 코스트 가문의 죽음을 다룬 이 작품은 굉장히 비극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인간의 초월적인 힘으로 운명지어진 영웅들이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처절한 싸움이 그리스 비극의 골격이라면 가문에 내려진 저주의 희생물이 되는 코스트 가(家)의 싸움 속에서 우리는 운명에 도전하는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장 지오노는 작품 속에서 운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당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도발하고 호소하고 유혹하는 사람의 은밀한 욕망 앞에서 몸을 기울이는 사물들의 지능'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지오노에게는 세계와 삶의 의미는 운명에 도전하거나 운명을 자기 앞에 끌어들이는 사람들에게만 열려있다. 그는 작품 속에서 그러한 싸움에 동참하는 이들에게만 이름을 부여하고 있다.

 

 

  양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지오노는 커다란 사상적 굴곡을 겪게 된다. 지금까지 인간을 위협하던 가장 큰 힘으로 인식되던 자연은 집단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인간 군상의 폭력성 앞에 그 권좌를 내주게 되었다. 지오노 후기의 작품에서 자연은 이제는 평화로운 안식처가 아니라 인간이 무력하게 감수해야 하는 잔혹하고 적의에 가득 찬 힘으로 나타난다. 그에 덧붙여 그의 작품에는 교활한 인간 존재의 이면이 더욱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요컨대 지오노의 전기 작품들이 소박한 환경 보호론적 이상주의를 대변한다면 후기 작품들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숙명적인 힘과 맞선 인간의 모험을 통해 숭고한 정신의 추구로 기울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작품에서 코스트 가(家)가 겪는 비극적인 삶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이야기를 분석하면 그 원인이 코스트 가의 조상이 저지른 죄업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작품에는 이에 관한 언급이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전적으로 코스트 가 구성원들의 개인적 기질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그 기질을 구성원들이 가진 광기, 분노, 광포함, 광란, 과도함, 잔인함, 급변함, 격렬함 등의 특징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한 기질들이 모여서 5대 구성원들의 불행하기 짝이 없는 운명을 만들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지오노에게서 세계와 삶의 의미는 운명에 도전하거나 운명을 자기 앞으로 끌어들이는 사람들에게만 열려있다고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