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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현대소설

존 파울즈 장편소설 『프랑스 중위의 여자(The French Lieutenant's Woman)』

by 언덕에서 2022. 9. 26.

 

 

존 파울즈 장편소설 『프랑스 중위의 여자(The French Lieutenant's Woman)』

 

 

영국 소설가 존 파울즈(John Fowles, 1926~2006)의 장편소설로 1969년 발표되었다. 1963년 발표한 파울즈의 처녀작 <콜렉터>는 국제적인 명성을 작가에게 안겨 주었고, 이후 소개된 <마법사> (1966) 역시 걸출한 상상력과 혁신적인 기법으로 히피 세대들의 필독서로 떠올랐다. [더 타임스]는 그를 '전후에 등단한 작가들 가운데 가장 독창적이고 장래가 촉망되는 그리고 위대한 영국 문학의 전통을 가장 확실하게 재창조해 나갈 수 있는 작가'라고 평했다.

 존 파울즈의 모든 소설 가운데 가장 큰 찬사를 받은 『프랑스 중위의 여자』는 전후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로 불리며, 1969년 실버펜 상과 1970년 [W. H. 스미스 문학상]을 받고, 2005년에는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100대 영문 소설'로 선정되었다. 이 작품은 시대의 위선과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인 동시에 자유에 대한 정열이 고갈되어 버린 20세기 상황에 대한 우화를 담아내고 있다. 작가는 19세기 소설의 전지적 작가 시점을 사용하면서, 옷깃의 주름에서부터 어투의 어색함에 이르기까지 고전적인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을 세세하게 재현해내었다. 생전에 여러 차례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됐던 그는 2005년 11월 5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영화 <The French Lieutenant's Woman>, 1981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배경은 대영제국이 가장 융성했던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남자 찰스는 오랜 방랑 생활을 청산하고 상인 계급이지만 직물업 거부 프리먼의 딸 어니스티나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그런 찰스의 앞에 어딘지 불안정해 보이는 여자 사라 우드러프가 등장한다. 마을 사람들이 사라를 부르는 별명은 ‘프랑스 중위의 여자’로 창녀와도 같은 경멸의 의미가 담겨있다. 

 알 수 없는 그림자가 드리워진 사라에게 찰스는 동정과 호기심을 느껴 다가가지만, 곧 속수무책으로 사라에게 빠져든다. 현실의 삶도 그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법적 대응과 약속된 유산을 받지 못하게 된 찰스에게 예비 장인은 다른 직장을 구하라고 강요하고, 그는 결국 사라와 사랑의 도피를 결심한다. 그러나 어니스티나와 파혼하고 약속 장소로 찾아간 자리에 사라는 없다. 찰스는 다시 방랑길에 오른다.

 찰스는 2년 동안 신문 광고를 내고 변호사와 탐정을 고용해 사라의 행방을 찾았지만,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실의에 빠진 찰스가 세계를 떠돌다 미국에 머물고 있을 때 영국으로부터 그녀를 찾았다는 전보가 온다. 사라는 화려한 최신 유행의 미국식 의상을 입고 유명한 화가의 집에서 이름을 ‘러프우드’라고 바꾼 채 살고 있다.

 “당신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어서 연락했어요. 당신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몸을 던져 순결을 바쳤고, 나를 억지로 떠맡겼죠. 광기였어요. 이제 새로운 애정을 찾았어요. 그것은 나의 일이에요. ... ... 당신을 사랑했지만, 결혼이나 가정보다는 나의 길을 찾는 것이 더 중요했어요. 저는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고독에 길들었기 때문에 저는 고독을 소중히 여겨요……. 예술가들이 마음에 안 드는 작품을 부수고 다시 만드는 것처럼, 저도 제 인생을 부수고 다시 만들었어요. 당신이 저를 사람대접해주고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저는 구렁텅이 같은 삶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죠. 저는 지금 당신에게 이해해달라고 간청하고 있는 거예요.”

 

영화 <The French Lieutenant's Woman>, 1981

 

 이 작품을 읽으면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사라의 말투와 어휘는 우아하게 다듬어졌고, 직관은 솔직하고 담백하다. 찰스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의 인생을 생각해본다. 비극은 무대에 올려졌을 때는 아름답지만 현실에서는 참혹하기 짝이 없다. 그의 가슴에 기댄 사라의 어깨가 흔들릴 때 그녀의 다갈색 머리칼에 입을 맞추며 찰스는 쓸쓸히 말했다. “비유로 가득 찬 당신의 우화를 내가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은 독자에게 세 가지 사랑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부유한 상인의 딸 아나스티나가 생각하는 사랑, 시대에 저항하는 진보적 과학자 찰스가 생각하는 사랑, 자기 일을 꿈꾸는 사라가 생각하는 사랑은 같은 단어지만 다른 내용이다. 그들은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 살지만, 각각 다른 사랑을 꿈꾸기 때문이다.

 

 

 사라는 자신의 삶에 날개를 달기 위해 사랑하는 남자를 이용하는 여자라고 정의할 수밖에 없다. 남자의 인생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면서까지 자신의 인생을 쟁취하는 사라를 악녀로 간주해야 할 듯하다. 그러나 사랑의 본질은 나르시시즘인 자기애며 자기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타인을 사랑할 수 없는 이치를 생각해보게 된다. 자신을 혐오스러워 하는 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기에 사라의 행위는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파울스의 책 중에서도, 유독 이 소설에 집중적인 찬사가 쏟아진 데는 작가의 문학적 실험이 한몫했다고 판단된다. 1926년 영국 남부 엑시스주에서 태어난 파울스는 옥스퍼드대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면서 자연스럽게 카뮈, 사르트르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실존주의 철학의 세례를 받은 그가 인간, 정확히는 유럽인의 자신감이 최고치에 달했던 빅토리아 시대를 해체하고 싶어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일인지도 모른다.

 기존 세계의 안전한 질서를 따르려던 찰스는 19세기를, 시종 안개에 휩싸인 듯한 사라는 20세기를 상징한다. 작품이 출간된 1969년은 전 세계가 전쟁의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때였다.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 무너져버린 시대에 파울스는 남녀의 사랑이라는 평범한 서사를 통해 인간, 세계, 문학에 대한 기존의 관념들을 낱낱이 깨부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