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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매일신문 [그립습니다] 윤혁 작가의 사모곡

by 언덕에서 2021. 5. 8.

매일신문 [그립습니다] 윤혁 작가의 사모곡

입력2020.10.29. 오전 11:32 
 수정2020.12.10. 오전 11:23
 
김치 먹을 때 생각나는 '어머니가 담근 천상의 맛'
 

윤혁 작가 어머니의 젊은 시절 모습. 가족제공

 


 20년 전의 일이다. 어머니는 어느 날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부활절 고해성사를 봤는데 신부님께 야단만 들었다."
 "무슨 말씀이에요?"
 내가 물으니 어머니의 대답은 이러하셨다.
 "고해소에 들어가서 내가 지은 죄를 고백해야 하는데 막상 뭘 말하려니 죄지은 게 생각나지 않더라."
 "그래서요?"
 "이렇게 말했지. 신부님,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죄지은 것이 없습니다."
 "아하, 그래서요?"
 "신부님이 화를 내시더구나."
  사연을 듣던 나는 궁금증이 더해져서 물었다.
 "어떻게요?"
 "'당신은 천사란 말이오!' 하시며 화를 내시데?"
 말년의 어머니는 순진하신 건지 아니면 판단력이 흐려지신 건지 너무 솔직히 고백하셨다. 어머니가 이야기를 마치신 후 가만 생각해보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늙고 노쇠하셔서 세끼 식사하는 일과 기도 외에는 하는 일이 없으셨던 당신께서 지은 죄라고는 없었을 듯했다. 그런 분에게 죄를 고하라고 하면 어쨌든 억지로 만든 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해마다 어머님 기일이 다가오면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 어머니의 친정은 낙동강 하류의 어촌이었다. 큰외삼촌은 한국전쟁 즈음에 보도연맹 사건으로 곤욕을 치렀는데 해방 이후 민청이라는 남로당 계열 단체의 간부였다. 그는 전쟁 통에도 용케 살아남았지만 둘째 외삼촌은 우익에게 살해당했다. 어머니의 회상을 통해 당시 십 대 후반의 소녀는 오빠의 주검을 찾아 무수한 시체 더미 속에서 헤맸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좌익 간부 청년의 여동생이어서 빨갱이의 여동생으로 불렸다고 이야기하셨다.
 어머니는 이은상 시인이 작사하고 박태준 선생이 작곡한 '동무 생각'이란 노래를 무척 좋아해서 말년에는 그 노래를 즐겨 부르셨다. 언젠가 나는 노래에 등장하는 '청라언덕'이 대구에 있는 동산병원 내 선교사 사택 일대의 언덕이라고 알려드렸고 어머니는 그 내용을 들은 후 오랜 궁금증이 풀렸다며 봄꽃처럼 활짝 웃으셨다.

 어머니는 내가 서너 살 때 어린 나를 둘러업고 보따리 광목 장사를 하러 다니셨다. 머리에는 커다란 옷감 보퉁이를 이고 몇십 리 낙동강 변 시골길을 걸으셨던 그때, 내가 발견한 것은 하늘의 뜨거운 햇빛과 감나무 사이에서 불어왔던 바람이었다. 지금도 시골 강변 풍경이 항상 다정스럽고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때 새겨진 심리적인 이미지 때문이 아닐까 늘 생각해본다. 이후에는 시장에서 노점상을 하시다가 선짓국밥 장사도 하셨던 기억이 난다.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셔서 47세의 젊은 나이에 홀몸이 되시고 몇 년 후 당뇨병으로 실명하시어 이후 20년 이상을 힘들게 사시다가 저 세상으로 가셨다.

 어머니, 오랜만에 편지를 써봅니다. 몇 자 적다 보니 눈물이 나려 하네요. 1983년 여름, 제가 입대한 군부대의 신병교육대로 보내신 편지에 답장한 이후로 37년 만이지요.
 요즈음도 식사할 때, 특히 김치를 먹을 때에면 어머니 생각을 하곤 합니다. 아이들에게 어머니가 만든 김치보다 더 맛있는 김치를 먹은 적은 없다고 말하곤 하지요. 제 말을 듣던 딸아이는 할머니의 김치는 담근 그 날만 맛있었다고 혹평을 하더군요. 게다가 걔는 할머니가 김치 양념을 만들 때마다 화학조미료를 듬뿍 넣는 것을 몇 번 보았다고도 했지요. 그러나 저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아니야, 네 할머니 김치는 천상의 맛이었단다!"
 어머니는 갓 버무린 김치를 한 접시 따로 담아서 그것에 항상 깨소금과 참기름을 듬뿍 쳐서 밥상에 올리셨는데요. 지금도 그 맵고 고소한 맛을 잊을 수 없어요. 어머니께서 '신성한 내 새끼'라고 하셨던 딸아이는 예쁜 숙녀가 되어 당신께서 최고의 대학이라고 칭하셨던 그 학교를 졸업하여 이제는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있습니다.

 그리운 어머니, 제가 어렸던 그 날, 비 오던 날 부엌 앞 대뜰 위에서 어머니는 연탄 화덕 위에 프라이팬을 올려놓고 제게 부추전을 원하는 대로 부쳐 주셨는데요. 그 부추전이 어찌 그리 고소하고 맛있던지요. 그때 어머니는 간간이 섞이는 빗소리 속에서 흥얼거리며 노래를 부르셨어요.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던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그리운 어머니, 어느 시인이 쓴 시를 읽으면서 다시 만날 날을 생각해봅니다. 우리의 생이 전생과 후생을 잇는 징검다리라면 다시 만날 그날에는 어머니의 눈이 잘 보이셔서 저를 금방 알아 보시기를 기도할게요.

간밤 누가 내 어깨를 고쳐 누이셨나
신이었는가
바람이었는가
아니면 창문 열고 먼 길 오신 나의 어머님이시었나
뜨락에 굵은 빗소리

- 그리운 어머니에게, 아들 올림


글쓴이 윤혁 작가. 장편소설 [기억과 몽상], 단편소설집 [세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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