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주 중편소설 『겨울밤』
소설가 · 언론인 나림 이병주(李炳注, 1921~1992)의 단편소설로 1974년 [문학사상]에 발표되었다. 『겨울밤』에서는 화자가 관찰자가 되어 감옥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일제 강점기에서 한국 전쟁까지의 좌˙우 이념 대립으로 발생한 새대적 아픔을 연민 어린 시선으로 담아낸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화자의 입장으로 시대의 흔적,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직접 보고 겪었던 지옥에 대해 생생한 증언을 전한다.
‘어느 황제의 회상’이라는 부제를 가진 이 작품 『겨울밤』은 ‘황제’가 만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 황제라는 개념은 '왕이나 제후를 거느리고 나라를 통치하는 임금'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현실의 황제가 아닌 그야말로 정신적으로 부유하며 스스로 독보적인 인물이라는 의미다. 그러한 황제가 사는 공간은 다른 황제들과는 사뭇 다른데 감방에 기거하는 '사상범'일 뿐이다. 방은 협소하고 창은 작은 데다 심지어 쇠창살까지 있다. 작가는 1974년도에 발표한 이 작품에서 정치범의 감옥살이를 황제 생활로 표현하였다. 쇠창살로 만들어지는 그래프에는 좌표처럼 해가 걸리고, 달이 걸리고, 별이 걸리지만, 쇠창살 안쪽 감옥 안에는 시대의 상흔을 지닌 역사의 희생자들이 존재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나는 공산주의자 노정필이 출소한 다음부터 그의 집으로 찾아가곤 한다. 무기형을 감형받아 이십 년 동안 갇혀 산 그는 돌처럼 말이 없다. 노정필은 경남 서부지방 부농의 아들이었지만 공산주의를 위해 싸웠으며, 6·25 직후 반공법(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경찰에 잡혀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고 의연함을 잃지 않는 이로 알려져 있다.
나는 감옥에서 만난, 자유당 시절 부정선거로 형을 살고 있던 소작인의 아들 출신의 경찰국장의 허무한 죽음과 죄도 없이 구속되어 있다가 무죄 판결을 앞두고 숨을 거둔 두응규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런 두응규의 얼굴 위에 반공법 위반으로 교수형을 당한 나의 제자 조용수의 얼굴이 겹친다.
나는 노정필에게 마르크스주의가 아니어도 인생과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두고 가치 있는 문학이 가능함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노정필에게 내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주었다가 낭만으로 현실을 미화하는 패배한 시인이라고 비판받는다. 노정필은 나의 공산주의 비판에, 인간의 참된 자유는 사람 대다수가 물질로부터의 자유를 획득한 연후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겠는가 하고 대꾸한다. 엄격하게 인생을 살아보지도 못한 주제에 심각한 문제를 건드리고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지조도 지키지 못하면서 피와 눈물로써 인간의 품위를 지킨 사람들을 모독하는 듯한 나의 언동이 심히 못마땅했을 것이었다. 어쩌면 그는 나의 가면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른다. 아픈 소리였지만 나는 그의 인간 회복에 보람을 느꼈다.
이후 알고 보니 나의 소설 ‘알렉산드리아’의 등장인물으로, 사형당한 무기수가 노정필의 친동생 노상필이었다. 나는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소설가임을 자각한다. 그래도 사람은 살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나는 '내가 살기 위해서 아무도 속이지 않고 상하게 하지 않았다. 내 체면을 깎고 내 굴욕을 견디며 겨우 내 생명 하나를 건졌을 뿐이다. 내가 죄가 있다면 여기에 이렇게 살아 있다는 죄밖에 없다’라는 그의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병사나 횡사를 막론하고 억울하지 않은 죽음이란 없다. 죽음이란 모두가 억울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존경한 사람의 죽음을 참고 견디는 것은 나도 한 번은 죽을 것이란 그 체념으로 인해서다. 죽음엔 조금 빠르고 조금 늦다는 것이 있을 뿐이다.”
나는 과거 일본군에게서 나를 지켜준 중국인 소년을 기억한다. 근래에 만난 친구가 아내를 잃고 다시 사랑에 빠졌다고 지방으로 고해성사 다니는 모습에서 구김이 없는 천진한 인간을 발견한다.
소설의 마지막은 ‘그런데 그 친구도 죽었다’로 끝난다.
이 작품은 작가의 자전적인 소설로 화자가 감옥에서 만난 사람들에 관한 에피소드와 중심인물인 노정필과 화자와의 사상 토론으로 전개된다. 또한, 주인공(화자)이 일본 강점기에 학병으로 끌려갔던 중국 소주성(蘇州省)에서의 경험 등이 뚜렷한 줄거리 없이 전개되고 있다. 실존했던 임화, 이현상, 이승엽, 박헌영 등의 인물에 관한 공개되지 않은 이야기도 접할 수 있다.
작가는 지식인과 무식자는 감옥에서 견디는 능력에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지식인은 감옥 속에 있어도 중병에 걸리지 않는 한 호락호락하게 잘 죽지 않는다. 그런데 무식자는 육체적으론 지식인보다 훨씬 건장해도 대수롭지 않은 병에 허무하게 쓰러진다.” 작가는 이 작품 속에서 그 예를 든다. “만석꾼 아들인 좌익 사상범 노정필은 20년의 감옥살이를 견디어 냈는데, 경찰서장이었던 소작인의 아들 이 씨는 2년 옥살이도 이겨 내지 못하고 죽었다”라는 식이다.
♣
작중 등장인물 노정필은 주인공 소설가에게 말한다.
“시(詩)는 구체적인 슬픔, 개체의 죽음을 추상적이고 일반적으로 페인트칠해선 슬픔의 또는 죽음의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것처럼 꾸밉니다. 시인은 패배를 미화해선 모든 사람이 패배자가 되도록 권유합니다. 당신의 소설 ‘알렉산드리아(blog.daum.net/yoont3/11302315)’는 그러한 시인의 교활한 작품이요.”
작가는 감옥에서 만났던 사람 한 명 한 명과 만남과 사건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그리며 시대를 통과하는 목격자이며 기록자가 된다. 이 소설 속 작가가 감옥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불러일으키는 회상을 그리는 시선에는 시대를 향한 연민과 기록과 문학의 중간에 선 번민과 소설적 재기가 흘러넘친다.
“이 작품은 사상과 이념이 투철한 노정필과 그를 경화된 마르크스주의 신봉자로 간주하는 '나'의 논쟁을 통하여, 결국 작가 자신의 ‘글쓰기’와 자신의 굴곡진 삶에 대한 옹호이자 변명을 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에게 문학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러나 문학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용서될 수 없고 그의 모든 작품이 빛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당대에 몇몇 작품들로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라고 황석영은 평했다.
중편소설 『겨울밤』은 화자가 감옥에서 만난 여러 사람이 모두 주인공이다. 이는 험난한 시대를 지나며 시대를 논하기 꺼렸던 사람들을 대신하여 작가가 그들의 입이 되었다는 방증이다.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직접 보고 겪었던 지옥에 대하여 눈과 귀를 닫고, 침묵하고 있는 동안에 작가는 그들을 대신하여 용기 있게 세상을 향해 이야기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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