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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박영한 장편소설 『장강(長江)』

by 언덕에서 2021. 1. 3.

 

박영한 장편소설 장강(長江)

 

 

 

소설가 박영한((朴榮漢. 1947~2006)의 장편소설로 1996년에 발간되었다. 역사의 격동기에서 자신의 삶을 꿋꿋하게 헤쳐나간 인간의 파란만장한 삶에 관한 대하소설로 주인공 이두삼은 독립운동가 이두표(1918~2005)1 씨를 모델로 했다. 이두표 씨는 이미 10대에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일본유학 시절 옥살이를 하면서 온갖 고문을 이겨냈고, 해방 직후에는 함경도에 진주한 소련군의 인권 유린에 저항하다가 투옥되어 시베리아에 유배되었다가 극적으로 탈출한 이로 알려져 있다. 국가는 1991년 건국 무공훈장을 주었다.

  베트남전쟁 이야기나 서민의 질박한 삶을 그렸던 작가 故 박영한은 자칫 진부할지도 모를 이런 소재로 소설을 쓴 이유로 아나키스트에 대한 매혹 때문이라고 술회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일제하에서는 독립운동을 하는 민족주의자로, 해방 이후 고향 함북 회령으로 돌아가서는 공산주의 정권에 저항하다 결국 월남했다. 하지만, 남한에서도 부패한 정권과 자본주의의 탐욕적인 속성을 거부하고 끝내 은둔하고 만다. 이 소설은 건강한 비판의식과 자유의지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간 사람들이 이데올로기의 대결에서 안타깝게 실패하는 과정을 그렸다.

 작중 함북 회령에서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이두삼은 항일 독립운동, 사이비 공산주의자와 소련군과의 투쟁, 시베리아 유형, 인민군과의 유격전, 남한 사회에서의 비적응등 자유 와 반항 으로 점철된 삶을 산다. 이두삼은 아나키스트 같으면서도 극우의 냄새가 나는가 하면 사회주의적 성향을 드러내기도 하는 복잡다단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기회주의자가 아니며 그가 지나온 질곡의 세월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보여진다. 그의 투쟁의 이면에는 휴머니티가 숨어 있으며 작가가 이두삼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도 현상 이데올로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반항적인 휴머니즘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919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난 이두삼은 8살 되던 1929년에 일어났던 광주학생운동을 목격한다. 그의 누나들이 만세를 외치다 일경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일제에 대한 적의감을 느끼게 된다. 13살이 되던 1933년에는 나라를 빼앗겼다는 사실에 비분강개하며 <만적단>을 조직하나 일경에 적발되면서 단원들은 천황 불경죄로 혹독한 고문을 받는다.

 함북 회령상업학교에 다니던 이두삼은 1939년 20살의 나이로 일본 유학을 떠나 철학을 공부한다. 1940년부터는 재동경 한국인 학생 비밀결사 단체인 ‘혈우회’에서 조직책과 연락병으로 활동한다. 그는 의열단을 조직해 활동하지만 같은 해 10월 28일, 여명회와 의열단의 적극적인 항일운동이 발각되면서 그는 일본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동경 경시청에 체포된다. 당시 일본 경찰은 6차에 걸친 혹독한 고문으로 그는 반식물인간으로 내몰리지만 중요 정보를 발설하지 않는다. 결국, 일경도 그를 포기하고 스가모 구치소로 이감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된다. 3년간 옥살이를 하다 겨우 풀려난 건 1945년 해방이 되고서 몇 개월이 지난 후였다.

 고향인 함경북도로 돌아간 그는 주을반공청년회를 조직해 활동하다 소련으로 끌려가게 된다. 이후 우즈베크공화국 제일형무소, 우즈베키스탄의 코칸트 강제수용소와 러시아 극동부에 있는 하바롭스크 강제수용소 등지에서 5년간 중노동으로 고생을 한다.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온 때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열흘 전이였다. 한국전쟁으로 혼란하던 당시 그는 1.4 후퇴를 틈타 서울로 내려와 새로운 터전을 마련한다.

 1956년부터 동경 유학 시절에 배웠던 클래식 기타로 개인 교습을 시작한 그는 이때 만난 학생들에게 음악은 물론 항일과 반공에 대해서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에게 남은 것은 소련군과 가짜 공산주의자들을 상대로 치러야 할 투쟁일 뿐이다. 반동으로 몰려 시베리아에서 5년 동안의 유형 생활을 하다 6·25와 함께 남하하는 그가 경험하는 것은 인간성 말살, 현실과 사상의 괴리 등일 뿐이다.    

 

소설가 박영한(1947~2006)

 『장강』은 일본강점기를 배경으로 시작되는 이두삼 씨의 파란만장한 역정을 통해 우리의 근현대사 속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장강은 오늘도 말없이 묵묵히 흘러만 가네 …역사가 너를 기억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화내지 말라. 시간은 흔 적도 남기지 않고 일진광풍으로 지나가거늘, 너는 역사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한 마리 야생마였다. 오늘도 표연히 길 떠나는 나그네여. 영원한 아나키스트여."

 본문의 <평산의 수첩 中>에서 작가는 평산의 수첩 속에서 자신이 줄곧 앓아야 했던 역사의 병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작품에 대해 작가는 ‘치욕스럽기도 할 그 허접쓰레기 같은 추억거리들과 동거하는 일이야말로 자신의 지난 생애를 보전하는 일’이다. 비록 지난 생애가 험난했을지언정 그것들을 없었던 일로 치부해 버릴 수 없다. 그것들은 과거를 반추하기 위한 기념물이다.’라고 밝히면서 눈물과는 다른 무거운 슬픔을 느꼈다'고 말한다. 이 작품은 역사 속에 일그러진 슬픔의 잔해들을 기억 한편 저쪽에 쌓여있는 야적장에서 오늘로 끌어냈다.

 

 

 작가는 우연히 알게 된 이두표의 수기 <인간화물> 등을 토대로 작품을 썼다. 분당에서 옥상 방 한 칸에 노구를 의지하고 있는 어느 노인의 파란만장한 삶의 이야기는 소설의 내용과 거의 흡사하다. 이두표는 월남 후 대공기관에 근무한 적도 있고, 정권에 실망하여 강원도 오지에서 은둔 생활도 했다고 전하는 작가는 ‘그를 보며 역사의 무거운 슬픔을 느꼈다’라고 후술했다.

 소설은 한 사람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지만, 영웅담으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남북한, 일본, 중국을 넘나들며 펼쳤던 젊은이들의 항일운동, 정세와 정치사회운동의 의미를 아우르면서 휴머니티가 지상 목표이던 이들의 삶을 긴박감 있게 그린다.

 소설 속의 실제 주인공인 이두표 씨는 2005년 사망했는데, 2004년, 복수의 신문은 ‘친일파 청산은커녕 그들을 두둔하는 현실 속에서 독립유공자라도 끝까지 지켜주는 것이 국가와 후손들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의무이다. 보훈처는 규정을 바꿔서라도 이런 피해를 막고 독립유공자 가족을 지켜주기 바란다’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독립유공자 대우를 제대로 해달라  (2004. 5.11 한겨레 신문 )

 서울 보훈병원 8203호에는 독립유공자인 이두표(85)씨가 입원해 있다. 20036월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의식 상태로 힘겹게 투병하고 있다. 그런데 보호자로는 부인 이원분(66)씨뿐인데, 부인도 여러 가지 중한 병을 앓고 있어 간병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런데도 국가는 1년에 한달 정도만 간병인을 지원하고 있다.

 이두표씨는 이미 10대에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일본 유학 시절 옥살이를 하면서 온갖 고문을 이겨냈고, 해방 직후에는 함경도에 진주한 소련군의 인권 유린에 저항하다가 투옥되어 시베리아에 유배되었다가 극적으로 탈출한 분이다. 국가는 이를 인정하여 1991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건국무공훈장을 주었다. 이분의 파란만장한 삶은 중견 소설가 박영한씨에 의해 <장강>이란 역사소설로 출간된 적이 있다. 이두표씨는 6·25전쟁 이후 어려운 살림살이에서도 가난한 대학생들을 물심양면 도와 온 분이다. 어린 시절부터 국가에 몸바쳐 온 분을 국가가 끝까지 책임을 지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보훈처는 단지 기존 규정만을 내세워 간병인 지원을 거부하고 있다.

  친일파 청산은커녕 그들을 비호하는 현실 속에서 독립유공자라도 끝까지 지켜주는 것이 국가와 후손들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의무이다. 보훈처는 규정을 바꿔서라도 이런 피해를 막고 독립유공자 가족을 지켜주기 바란다. (김슬옹/목원대 국어교육과 겸임교수)

 

[부음] 애국지사 이두표 선생 별세 (2005. 1. 18 조선일보)

애국지사 이두표(李斗杓·86) 선생이 18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고인은 1942년에 김봉남, 이문빈씨 등과 함께 의열단을 조직해 독립운동에 앞장서다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상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원분(67)씨와 딸 연주양. 빈소는 서울보훈병원, 발인은 20일 오전 8시. (02)478-5499

 

  1. 이두표(李斗杓) 1919 ~ 2005 함북 경성(鏡城) 출생으로 1940년 10월 재동경(在東京) 한국인 학생단체인 비밀결사 여명회(黎明會)에 가입하고 조직의 연락책으로 활동하였다. 1941년 4월 동경 지구(芝區) 전촌정(田村町)에 있는 신문직배소에서 현창석(玄昌碩)·채용석(蔡用錫) 등과 함께 모임을 갖고 항일민족의식을 함양하고 독립운동의 방략과 국내에의 확산방법 등을 논의하였으며 동경에서 조직한 비밀결사 ‘우리독립운동클럽’ 및 충남 ‘공주클럽’과 연계하여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6월 신용갑(申龍甲)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여 그를 회원으로 영입하고 후일 천엽(千葉)에서 항일학생조직을 결성, 활동하게 하였다. 1942년 일시 귀국한 그는 함북 경성(鏡城)중학교에 재학중이던 김봉남(金鳳南)·이문빈(李文彬)·김윤조(金允祚) 등을 포섭하여 반전배일을 표방한 의열단(義列團)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 10월 28일 항일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본경시청 형사에게 피체되어 1943년 7월 동경형사지방재판소 검사국으로 송치된 뒤 1944년 8월 금고(禁錮) 5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8·15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