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외국 현대소설

헤르만 헤세 단편소설 『시인(Der Dichter)』

by 언덕에서 2020. 3. 5.

 

 


헤르만 헤세 단편소설 시인(Der Dichter)

    

 

 

   

독일 시인 · 소설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단편소설로 1919년 출간된 단편집 <환상동화집(Märchen)>에 수록된 소설이다. 'Märchen'이란 원래 '짧은 이야기'라는 뜻으로, 아이들에게 읽히기 위해, 고대부터 전승되어 온 동화를 의미한다. 이 작품 시인1913년에 쓰였는데 1차 세계대전의 전야에 집필된 이 작품은 한 예술가의 발전 과정, 참된 예술의 어려움을 다루고 있다.

  진정한 시인을 꿈꾸는 주인공 한혹은 달인이 되기 위해 고향의 일상적 삶을 떠나고야 만다. 가르침을 줄 스승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 『시인』은 비록 소품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구도소설이다. 자신의 삶을 채워주는 가치로 시를 선택한 한 젊은이의 수련과 성취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의 깨달음, 성취의 내용은 지극히 추상적이다. 그가 한 위대한 시인이 된 것은 알겠으나 무엇이 어떻게 위대한지를 독자들은 쉽게 파악할 수 없다. 어쩌면 작가 자신도 그 깨달음의 내용에 대해서는 막연한 느낌밖에 가지지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헤르만 헤세는 1946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서는 2002년 민음사에서 정서웅 옮김으로 <환상동화집>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게재되었는데 그것과는 별도 이 작품은 1996년 출간된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3>에 진형준 옮김으로 실렸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배경은 고대 중국, 20대의 젊은 시인 한혹(Han Fook)은 양친의 도움으로 양갓집 규수와 혼약을 맺었는데 학식은 출중했고 상속받을 재산도 상당했다. 그러나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이 청년에게도 허전함이 있었다. 그의 가슴은 완전한 시인이 되려는 야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관등놀이를 하는 곳에서 한혹은 백수(白壽) 노인을 만나게 된다. 노인은 짧은 시를 읊었고 한혹은 당시 자신이 느끼고 있었던 일체의 감정이 완전히 표현됨을 깨닫고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충격을 느낀다. 그가 누군지 사람들에게 물으니 완전한 언어의 스승이라고 했다. 한혹은 아버지에게 혼례일을 미뤄 달라고 부탁하고 노인을 따라가 시를 배운다.

  1년이 지난 후 한혹은 노인의 비파 연주 기술을 습득했으나 시를 짓는 것은 점점 어려워짐을 알게 된다. 2년이 흐른 어느 날, 약혼녀와 고향에 향수를 느껴 그곳을 몰래 찾아가지만, 먼 곳에서 바라보기만 하다가 자신은 시인이 될 사명이 있음을 깨닫고 다시 스승의 곁으로 돌아온다.

  시간이 흘러 비파를 마음대로 뜯고 가야금을 배우는 동안에도 한혹은 두 번이나 향수로 심하게 방황한다. 한밤에 몰래 달아나서 고향으로 가려 했으나 그곳을 벗어나기도 전에 가야금 위를 스치는 밤바람에 그 가락을 쫓다 다시 스승에게로 돌아온다. 한혹은 다시 스승의 지도로 시를 짓기 시작한다. 단순하고 소박한 것을 말하면서도 바람이 수면을 뒤집어 놓듯이 듣는 사람의 영혼을 파헤쳐 놓은 비법을 터득한다.

  어느 날, 스승이 홀연 사라지고 한혹은 작은 비파를 들고 고향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연로한 귀인에게 예를 표한다며 한혹에게 절했다. 아버지며 어머니, 일가친척과 약혼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집에는 모르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저녁이 되자 강에서는 관등놀이가 벌어지고 한혹은 강기슭에서 비파를 연주했다. 부인들은 황홀해서 한숨을 쉬었고 젊은 남자들은 가슴이 타는 듯 밤의 어둠을 응시하며 비파를 뜯는 이를 찾아 헤매었는데 이런 소리는 생전에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한혹은 수천 개 등불의 영상이 어른거리는 물속을 들여다보았다. 그 영상과 실제를 구별할 수 없게 되자, 그는 마음속 깊이, 이 축제와 그가 젊었을 때 그곳에 서서 낯선 대가의 말을 들었던 그 축제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략) 시인이 뭘 깨달았다는 내용의 막연함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아름답고도 감동적이다. 시의 본질 혹은 완전한 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는 별로 듣지 못했으면서도 우리는 한 위대하고 완전한 시인을 만나고 완성된 시를 읽는 듯한 감동에 젖는다.

 무엇이든 구체적이고 명료하지 않으면 못견뎌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종류의 감동이 미덥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때로는 추상적이고 몽롱한 것이 더 절실한 감동으로 다가드는 수도 있다. 하물며 죽는 날까지도 그 진상을 온전히 알기는 어려운 우리 삶의 얘기에 있어서랴.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3권> 245쪽에서 인용)

 스승을 만나 완성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모티브는 동화 이외에도 헤세의 많은 작품에서 나타난다. <환상동화집>에 실린 <피리의 꿈>에 소년이 만나는 뱃사공은 <싯다르타>(1922)의 뱃사공 바수데바 노인을시인 한혹이 사사하는 완전한 언어의 대가는 <유리알 유희>(1943)에 나오는 늙은 음악의 대가를 연상시킨다.

  시인 한혹 역시 예술에의 열정을 지닌 구도자이다. 그는 세계를 완전히 시 속에 반영하는 데 성공하여 그 영상 속에서 세계 자체를 정화하고 영원화해서 소유하게 될 때라야 비로소 그에게 진정한 행복과 깊은 만족감이 주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의 완성을 돕는 스승은 마술적인 능력을 갖추거나 스파르타 식의 혹독한 수련을 가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모범을 보임으로써 완전한 언어의 대가가 되는 길을 스스로 터득하게 해준다.

 

 

  (전략)삶은 흔히 길 걷기에 비유된다. 또 한바탕 꿈이라 일러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시()는 세상에 나 있는 수많은 길, 우리가 꿀 수 있는 여러 꿈 중의 하나일 수 있고 시인의 눈뜲이란 길 위에서의 길 찾기, 꿈속에서의 꿈꾸기일 수도 있다. 처음과 끝이 다 바라보이는 길이 어디 있으며 앞과 뒤를 가지런히 꿰일 수 있는 꿈이 어디 있으랴.

  깊고 오묘한 깨달음의 내용을 조리 있게 펼쳐 보여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 것은 진실의 힘이다. 그러나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아름답게 그려 보이는 것도 그 못지않게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시인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아마도 한혹이 시인으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넉넉한 살림과 자애로운 부모, 아름다운 약혼녀와 다정한 친구들, 그리고 시인으로서의 명망 - 그와 같이 세속적으로는 별로 모자람이 없는 현재와 제법 많은 것이 보장된 미래를 내던지고 진정한 시에 자신을 송두리째 내맡긴 그의 일생은 구도 소설의 흔해 빠진 원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어도 어쩔 수 없이 감동적이다. 길 찾기의 외로움과 고단함 혹은 꿈꾸기의 허망함도 그가 한 시인으로 완성되면서 애절한 아름다움으로 승화된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끝까지 추상적이고 애매한 깨달음의 내용까지 절실한 아름다움으로 우리에게 다가들게 한다.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3> 246쪽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