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 G. 마르케스 단편소설 『눈 속에서 흘린 피의 흔적(El rastro de tu sangre en la nieve)』
콜롬비아 소설가 G. G 마르케스(Gabriel Garcia Marquez, 1928~2014)의 단편소설로 <꿈을 빌려드립니다>라는 소설집에 게재되어 1995년에 발표되었다. 작가의 대표작인 <백 년 동안의 고독> 이후 발간한 해당 책에는 중남미 문학의 거대한 문학적 담론의 전통을 계승해온 그의 작품세계를 밝히는 아홉 편의 중단편 소설과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수려한 수필 아홉 편 등이 실려 있다. 해당 책에는 작가연구의 참고자료로 삼을 만한 그의 정치적 망명과 그 동향을 추적해온 스페인의 시사지 <카비오 16>에 실렸던 인터뷰와 그의 망명과 관련한 기사 또한 담고 있다. 지난 1996년 이 책 초판이 나오자 그의 소설을 생소하고 어렵게 생각했던 많은 이들이 이 책으로 인해 그의 작품 세계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는 평을 했다. 그리고 국내 처음 번역된 여러 산문을 통해 그가 지향하는 문학의 핵심을 간파할 수 있었다는 독자들도 있었다. 마르케스는 1982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같은 해에 출판된 <이문열 세계명작 산책> 10권에 『눈 속에서 흘린 당신 피의 흔적』이란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소설집 <꿈을 빌려드립니다> 제1부에 실린 아홉 편의 중단편 소설은 20세기의 ‘소설의 죽음’을 예고하던 문학권의 위기 상황에 하나의 희망으로 등장한 마르케스의 대가다운 면모를 여실히 밝혀주는 수작들이다. 중남미 카리브해의 짙은 바다 내를 풍기는 <물에 빠져 죽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 <사랑도 어찌할 수 없는 영원한 죽음>, <잃어버린 시간의 바다>, <기적을 파는 착한 사람 블라카만> 등 환상적 계열의 작품들과 <포르베스 부인의 행복한 여름>, <눈 속에 흘린 피의 흔적>, <로마에서의 기적>, <난 전화를 걸려고 온 것뿐이에요>, <꿈을 빌려드립니다> 등 서구 유럽권 문명 세계의 허와 실을 비판적 시각으로 풍자해놓은 사실주의 계열의 작품으로 구분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배경은 1990년대. 스페인과 프랑스의 국경인 피레네산맥 인근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갓 결혼한 여성 네나 다콘테는 선물로 받은 애스턴 마틴 자동차를 타고 남편인 빌리 산체스와 함께 파리로 신혼여행을 떠나던 도중 장미 가시에 찔려 계속 손가락에서 피를 흘리게 된다.
네나 다콘테는 4개국어를 유창하게 잘 구사할 수 있고, 관능적인 자세로 색소폰 연주를 즐기는 명문가의 규수다. 그러나 해수욕장의 탈의실에서 만난 거리의 건달 빌리 산체스를 만나고부터 그녀의 색소폰에 대한 열정은 사랑으로 곧 옮아간다. 네나 다콘테에게 삶이란 즐기기 위한 것이며, 존재는 외관으로만 파악되고 사랑은 섹스와 동의어였다. 반면, 빌리 산체스는 얼굴은 미남이지만 공립학교를 중퇴한 무식쟁이로 거리의 불량배와 다름없다. 그런 그가 네나 다콘테와 사귀면서 두 사람의 삶은 획기적으로 바뀐다. 둘은 문제아와 같은 삶에서 벗어나 바람직한 방법으로 사랑하는 법을 터득하기에 이르고 그것은 바로 결혼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신혼여행을 떠나는 마차 안에서 그녀는 장미 가시에 손가락이 찔리는 사소한 상처를 입는다. 그로 인해 계속 피를 흘리다가 스페인에 도착한다. 빌리는 고급승용차에 푹 빠져 프랑스를 향해 즐겁게 운전하지만, 네나는 증세가 심해져서 급기야 파리의 한 병원 응급실에 입원하게 된다. 빌리는 아내의 면회가 허락되는 화요일만 손꼽아 기다리지만, 그때마다 면회금지가 되어 번번이 아내를 못 만나고 파리의 거리를 방황한다. 그가 아내의 소식을 들었을 땐 벌써 아내가 심한 출혈로 숨을 거두고 화장된 채 가족묘지에 안장된 후였다. 이 엄청난 불행에 대하여 그는 10년 만에 처음 내리는 눈에도 무감각한 인간이 되어버린다.
네나는 장미 가시에 찔려 죽는다. 실제 그런 희귀한 병이 있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으로 볼 때 이것은 마르케스가 구사하는 마술적인 사실주의의 표현일 듯하다. 네나는 신혼여행 중에 유럽인이 준 장미에 찔려서 죽게 된다. 빌리가 고향인 남미와는 달리 파리에서는 맥도 못 추고 있는 모습은 제3세계라고 불리는 중남미 국가가 서구라는 강대국에 의해 찔리고 고통당함을 은유한다.
네나는 장미 가시에 찔린 그 순간에도 끼고 있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자랑하려고 일부러 찔렸다면서 유머러스하게 넘어간다. 장미 가시에 찔린 사건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다이아몬드는 아름답고도 값비싼 물건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거대하고 눈에 띄는, 겉으로 보기에만 화려한, 부분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그녀의 운명은, 모두가 무관심하게 넘어갔던 바로 장미 가시로 인해 뒤바뀌고 만다. 삶을 움직이는 요소는 대수롭지 않은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발생하기 때문이다.
파리의 한 병원, 네나를 담당한 의사는 아시아계 사람이어서 네나와 빌리는 그가 스페인어를 할 줄 모르는 줄 알고 그를 '식인종'으로 지칭하며 대화한다. 그러나 옆에서 듣고 있는 의사는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연유로 의사는 빌리에게 불친절했고 그저 사무적인 태도로 대한다. 주류사회인 서구에서 보면 중남미인이나 아시아인 모두 비주류, 소외된 인종이다. 그런데도 소외된 자들은 같은 소외된 자들을 존중하지 않는다. 1
마지막 장면, 중남미에서는 눈을 볼 수 없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눈을 볼 수 있다. 그들 부부가 처음 만난 눈은 신선하고 아름답다. 소설의 끝부분, 혼자서 병원을 뛰쳐나오는 빌리에게 쏟아지는 눈은 비참함 그 자체다. 그날, 파리에서는 10년만에 내리는 큰눈을 축하하는 축제가 열리지만 빌리는 참담하다.
중남미 국민의 현실은 그런 빌리와 닮아있다. 모든 인간은 소외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소외된 부류들을 철저히 소외시키고 주류만을 대우한다.
♣
제목에서 언급된 ‘피’라는 상징적인 단어가 독자를 궁금하게 만들지만, 작품이 술술 읽힌다는 점은 이 작품의 미덕이다. 이 소설은 등장하는 소재마다 상징하는 의미가 숨어 있어 그 의미들을 하나씩 해석해가며 읽어야 하는 어려운 소설이기도 하다. 작가가 일부러 문장이나 내용적 의미를 어렵게 써서 그 불편함 가운데 문학성을 펼쳤다기보다는 1990년대 남미가 처한 상황이나 제3세계와 서유럽 사이의 정치·사회적 역학 관계를 이해하면서 한 걸음씩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음미하는 것이 이 소설을 감상하는 여유 있는 발걸음일지도 모른다. 반면, 소설가 이문열은 아래와 같은 평으로 아주 단순하게 작품을 해석했다.
(전략)이 작품은 이상하게 맺어진 로미오와 줄리엣의 어처구니없으면서도 애틋하기 그지없는 파국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어처구니없음은 중남미적인 과장으로 가려져 있지만, 상식으로는 얼른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의 전개에서 비롯된다. 장미 가시에 찔려 열 몇 시간이나 피를 흘리다 죽는 연인도 그렇고 그녀를 입원시킨 뒤 산체스가 보여주는 행적도 그렇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어처구니없음이 읽는 이의 애처로움을 증폭시킨다. 그들 영혼의 물질적 편향, 그 무지와 단순함이 오히려 사랑할 만한 인간의 특성인 양 다가들며, 그것들에 바탕을 둔 순진과 열정만이 사랑의 으뜸가는 미덕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이문열 세계명작 산책> 10권 258쪽에서 인용)
- 한국인들이 외국인 노동자들을 무시하지만, 서구인들을 특별대우하는 경우와 같은 경우다. 그런 아이러니한 상황이 매일 연출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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