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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철학서

박광준『조선왕조의 빈곤 정책』

by 언덕에서 2020. 2. 13.

 

 

박광준 『조선왕조의 빈곤 정책』

                                     중국·일본과 어떻게 달랐나

 

 

 

 

1. 

오랜만에 찾은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는 횟집과 고깃집, 호프집이 즐비한 상가로 변해있었다. 뒷산과 운동장을 함께 뛰놀던 죽마고우는 어느덧 중늙은이가 되어 있었다. 주문한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담소를 나눌 때 고기 한 점을 입에 넣던 그가 말했다.

  “이 정도의 식단이라면 조선 시대로 치면 정승들이나 접할 수 있는 상차림이 아닐까?”

  생각해보니 그랬다. 내 어린 시절, 가을에 추수한 식량을 겨우내 소진하고 보릿고개를 지날 즈음이면 양식이 없어서 초근목피를 캐어 먹었음은 물론이고 집에서 밥찌꺼기로 키우던 개마저 잡아먹어야 했으니 그 배고픈 정도는 현재의 관점에서 상상하기 어렵다. 하물며 옛날에는 더 했단다하는 식으로 시작했던 옛 어른들의 기억을 더듬으면 조선 시대에는 일반 백성들이 얼마나 어떻게 굶주렸을까 하는 점이 궁금하기 짝이 없다.

 

2.

 사회복지학자 박광준1이 쓴 이 책은 사회정책사라는 관점에서 조선왕조 빈곤 정책의 내용을 같은 시기의 중국, 일본과의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의 특징은 역사 비교연구의 한 모델을 제공한다는 점인데, ‘실재하지 않았던 정책’(non-policy)‘, ‘일어나지 않은 일을 연구대상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조선의 창 제도는 왜 중국보다 대규모였는가’, ‘그리고 왜 환곡제도에는 물가조절기능이 없었는가?’, ‘에도 일본에서 일어난 근면 혁명은 왜 조선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는가?’ 등 비교역사적 질문을 제기하고 그에 대답하고 있다.

 이 책은 조선왕조가 왜 시장을 철저하게 억제하고 대외무역을 차단하다시피 해 가난한 나라가 되고 말았는지, 거의 모든 백성이 나중에는 굶주리게 되고 왕조도 결국 구빈정책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이해하고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저자는 주장의 논거를 교조적 성리학 사상의 존재와 개인의 빈곤 책임을 인정하는 법가 사상의 부재, 농민들에게 종자를 빌려주고 추수 후에 상환받는 환곡제도와 창 제도의 실패 등에서 찾고 있다.

 

3.

  “빈곤 정책은 조선왕조의 장기존속을 설명하는 데도, 그리고 그 멸망 원인을 설명하는 데에도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왕조체제의 본질에 얽혀 있다.”

  저자는 조선왕조의 구빈 시스템은 국가가 직접적인 빈곤 구제에 매우 적극적이었다는 특징을 보인다고 지적한다. ‘아사자가 절대 나와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조선왕조는 500년 동안 고수하면서 구빈 사업을 왕과 지방관의 중요한 책무로 뒀기 때문이다.

  교조적인 주자학을 신봉하는 왕과 신하들이 빈곤 구제의 기능을 가진 시장과 교역을 억제한 결과 정부의 부담은 갈수록 늘어났다. 그 결과, 조선 왕조는 재정 파탄에 이르게 된다. 마치 공산주의와 유사한 체제 속에서 수백 년에 걸쳐 시장이 억제되어 생긴 필연적 결과였다. 이런 제도들은 조선왕조를 500년간 지속하게 했던 핵심 정책이었다. 환곡 등 대규모의 국가구제가 사실상 멈춘 지 20년 만인 1862년 조선에서 전국적인 농민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4.

  저자는 조선의 구빈정책을 중국(청나라), 에도 시대 일본과 비교하며 그 정책이 어떻게 다른지를 분석한다. 또한 저자는 조선왕조의 구빈정책을 발달하지 못한 화폐경제와 주자학 교조주의2의 조합으로 설명한다.

 반면, 에도 시대의 일본은 화폐경제와 도시화가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에 빈곤 문제를 대부분 시장시스템 내에서 해결했다. 그러다 시장 기능이 멈추는 심각한 기근이 발생했을 때만 막부3가 직접적 구빈 사업을 실행하는 체제였다. 청나라에서는 자립 농민의 양성을 중시한 법가적인 사회기반 위에서 유교의 통치이념을 받아들였기에 구제 방법도 식량 지급, 금전 지급, 공공사업, 구빈식당의 설치 등 상황에 따라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다.

 이런 차이점이 나타난 곳은 의창4제도였다. 중국의 창 제도는 시장경제와 계약적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유통구조와 시장의 정비를 선제 조건으로 하는 제도였다. 언제든 곡물을 기근 발생 지역으로 옮길 수 있도록 교통망과 물류망을 정비하고, 곡물과 화폐를 교환할 시장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에선 이런 중국 고유의 풍토와 문화를 고려하지 않고 교조적으로 창 제도를 해석해 오로지 가난한 백성을 먹여 살린다는 유교적 인정 실현의 수단으로 간주했다. 그 결과, 상업이 발달하지 못하고 국력이 쇠퇴해감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5. 

 ‘가난은 나라님도 못 구한다.’는 옛말이 있다. 맞는 말일까? 생산력이 낮은 사회에서는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면치 못했던 건 사실이다. 조선 시대의 민중은 가난이라는 빈곤 문제를 숙명으로 안고 살았다는 말인데 이 말 속에는 조선왕조의 빈곤 정책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다는 결론을 맺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지배계급의 수탈만 없었다면 다수의 민중이 절대빈곤이나 기아에서 허덕이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많은 이들은 주장한다.

  이 책은 그러한 생각들을 바꾸게 만든다. 저자는 환곡5제도가 백성을 빈곤으로 몰아넣었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해온 실학자들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주희(주자)가 실천한 사창6은 현대적 용어로 말하면 시장경제에 믿음을 둔 신자유주의적이고 실사구시적인 실천으로, 교조적 주자학에 매몰된 조선 사대부들은 그 실상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으리라는 지적이다.

  조선 조정은 500년 내내 지방관이 지역을 잘 다스리도록 감독을 철저히 한다면 민생이 안정된다라는 안이한 생각을 만병통치약처럼 가지고 있었고 이는 실학자들도 다르지 않았다. 실학자들이 절대적인 식량 부족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운영 과정에서 발생한 부정부패만을 주목하는 것은 지엽적인 태도였다는 사실이다. 그간의 저술은 조선왕조의 멸망 원인을 주로 일본 등 외세의 침략과 쇄국 정책 등에서 찾았는데 이 책에서는 조선왕조는 왜 시장을 철저하게 억제하고 대외무역을 차단하다시피 해 가난한 나라가 되고 말았는지를 설명한다. 또한 조선 말엽에는 거의 모든 백성이 굶주리게 되고 왕조도 결국 구빈정책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이 책은 학부나 대학원에서 전공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물론이고 역사 일반이나 조선 시대를 공부하는 이에게 교양 도서로서도 보기 드물 정도로 완벽하고 훌륭한 서적이다. 사회복지학, 사회학, 경제학을 공부하는 사회과학도와 역사학, 문학을 공부하는 인문과학도에게도 일독을 권해 본다.

 

  1. ☞박광준((朴光駿) : 1958년 통영에서 출생했다. 부산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정부 초청으로 유학하여 일본 붓쿄대학에서 페비안사회주의사상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1990). 귀국하여 1990년부터 12년간 신라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를 거쳐 2002년 이후 현재까지 붓쿄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중국사회과학원(인구노동경제연구소) 방문학자, (중국)시베이대학 객좌교수, 동국대학교 객원교수를 역임했고, (중국)옌벤대학 대학원 객원교수로 있다. 동아시아 사회정책 비교연구, 특히 고령자케어정책의 한중일 비교, 동서양의 사회복지역사와 사상, 불교 및 유교사상을 복지사상과 접목하는 연구가 주된 관심사이다. 저서로는 『사회복지의 사상과 역사』(양서원, 2002), 『붓다의 삶과 사회복지』(한길사, 2010. 청호불교문화상학술상.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 『한국사회복지역사론』(양서원, 2013) 외에 일문 저서가 다수 있다. [본문으로]
  2. 『철학』특정한 교의나 사상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현실을 무시하고 이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려는 태도. 과학적ㆍ합리적인 증명을 하지 않고 신앙이나 신념에만 기초한 사고방식으로 사물을 설명하려는 태도. 종교에서 권위자가 말한 것을 깊이 이해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추종하려는 태도로, 중세의 스콜라 철학ㆍ독단론ㆍ정설주의(定說主義) 따위가 있다. [본문으로]
  3. 『역사』 1192년에서 1868년까지 일본을 통치한 쇼군의 정부. 천황은 상징적인 존재가 되고 쇼군이 실질적인 통치권을 가졌다. 1192년에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가 가마쿠라(鎌倉)에 최초의 막부를 설치하였다. [본문으로]
  4. 평시에 곡식을 저장했다가 흉년이 들면 그것으로 빈민을 구제하던 기관 또는 곡식을 저장해두는 창고를 가리킨다. 대개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추수 후에 회수했다. 기민에게는 죽을 쑤어 먹이는 등 진제하고, 궁민에게는 종자곡과 양식을 무이자로 빌려주는 진대가 원칙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빈민구제제도가 있었다. 고려에 들어서는 태조가 흑창을 설치하여 가난한 농민에게 진대하는 법을 만들었는데, 986년 의창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의창이라는 이름은 이때에 처음 사용되었다. 조선은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계승했다. 1525년 진휼청을 설치하여 일체의 구호사무를 통일해 관리하게 하고, 진휼을 위한 곡물은 광흥창·풍저창의 저곡 등으로 충당하게 함에 따라 순수한 진휼을 목적으로 했던 의창은 폐지되었다 [본문으로]
  5. 『역사』 조선 시대에, 곡식을 사창(社倉)에 저장하였다가 백성들에게 봄에 꾸어 주고 가을에 이자를 붙여 거두던 일. 또는 그 곡식. 고종 32년(1895)에 사환으로 고쳤다 [본문으로]
  6. 『역사』 조선 시대에, 각 고을의 환곡(還穀)을 저장하여 두던 곳집. 문종 원년(1451)에 설치하여 점차 확대하였으나, 환곡의 문란으로 순조 5년(1805)에 호남ㆍ호서 지방은 관찰사 재량으로 그 존폐를 결정하도록 하였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