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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철학서

유럽의 왕들에게는 후궁(後宮)이 있었을까? 『왕의 정부(Sex with The King)』

by 언덕에서 2022. 9. 10.

 

 

 

유럽의 왕들에게는 후궁(後宮)이 있었을까? 『왕의 정부(Sex with The King)』

 

 

 

 

 

우리 역사에서 왕은 한 명의 아내로 만족할 수 없었기에 왕비 외에 후궁을 두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정비인 신혜왕후 유씨 외에 무려 29명의 아내를 두었다. 역사상 가장 성군으로 손꼽히는 조선의 세종대왕은 정비 소현왕후 심씨 외에 영빈 강씨, 신빈 김씨, 혜빈 양씨, 숙원 이씨, 상침 송씨 등 5명의 후궁을 두었다. 조선 숙종은 인경왕후 김씨가 죽자 인현왕후 민씨와 결혼했으며 민씨가 출산을 하지 못하자 폐출시킨 후 인원왕후 김씨와 결혼하여 정비로 앉혔다. 김씨에게도 소생이 없자 희빈 장씨를 정비로 앉혔고 그 와중에서 천한 신분인 무수리(숙빈 최씨)에게 성은을 내려 후일 영조를 생산했다. 숙종은 이외에도 명빈 박씨라는 후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숙종은 6명의 여인을 거느리고 있었던 셈이다. 우리나라는 고대사회 이후로 '제왕은 무치(無恥)'라 하여 아무 여자에게 '성은(聖恩)'을 베풀 수 있었는데 서양의 여러 나라는 어떠했을까? 서양에도 <후궁>이란 제도가 있었을까?

 결론은 이렇다. 영국, 프랑스 등 서양의 여러나라 왕에게는 중국이나 조선과 같은 <후궁>이 없었다. 왕에게 한 명의 공식적인 아내만 인정했던 셈이다. 그러나 왕에게 섹스를 제공하는 여자 즉, 정부(情婦)라는 제도가 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유부녀였고 게다가 귀족의 아내였다. 

 가장 강력한 권력을 쥔 왕, 그리고 그 왕을 정복한 정부(情婦). 서구 역사 속에서 그녀들은 주로 나라를 망친 '요부'로 불려왔다. 그러나 그녀들은 '권력과 섹스의 상관관계'를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던 또 다른 의미의 '정복자'이기도 했다. 권력의 위태한 줄타기 속에서 어떤 이는 한 나라를 쥐락펴락 했으며, 다른 이는 왕에게 버림 받고 수녀원 등으로 추방되기도 했다. 이 책에서는 그 내밀하고도 드라마틱한 권력의 현장이 생생히 펼쳐진다.

 

 

 

 권력이라는 이름의 최음제, 정부들의 유형 : 유사 이래 권력은 강력한 최음제와도 같은 역할을 해왔다. 왕의 정부는 왕을 정복하고, 때로는 그의 왕국을 쥐고 흔들면서 자신의 성적 매력을 왕의 홀처럼 휘둘렀다. 이 책은 유럽 왕실에서 왕의 정부가 지닌 위상과 왕실을 가득 메운 매력적인 여성들, 그리고 수백 년 동안 그녀들의 의무와 그에 따른 보상이 변화해온 모습 등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현상들을 탐사하는데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다. 재미있는 것은 왕실 정부들의 천태만상을 유형별로 구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악녀형
탐욕과 야심, 그리고 잔인한 간통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사랑을 기대하는 것은 정녕 부질없는 짓일까? 이제 막 세상을 떠난 에드워드 3세의 경직되어가는 손가락에서 굵은 반지를 빼내는 앨리스 페레스, 프랑스 농민들이 굶주리는 와중에도 태양만큼이나 눈부신 보석들을 걸고 정원에서 뛰노는 마담 뒤 바리에게서는 탐욕이라는 악덕이 보인다. 서로를 밀어내려 다투는 독사 같은 마이 넬 자매와, 왕의 사랑을 얻기 위해 두꺼비의 배설물과 갓난아기의 장으로 만든 불결한 묘약을 왕의 고기에 뿌리는 마담 드 몽테스팡에게서는 잔인한 음모가 보인다.

마담 뒤 바리

 

 

 

- 백치미형
작센의 선제후이자 폴란드의 왕이었던 아우구스트는 마드무아젤 디스카우(Mademoiselle Dieskau)의 엷은 금발과 커다랗고 푸른 눈,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목덜미를 보고 첫눈에 사랑을 느끼지만, “머리가 비었다는 점만 빼면 조물주가 창조한 최고의 피조물이다. 그러나 생기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으며, ‘예, 아니오’ 밖에는 할 줄 아는 말도 없었다”라며 푸념했고, 마드무아젤 드 퐁타뉴가 입을 여는 순간, 외모를 보고 품었던 온갖 환상이 모두 깨져버렸다며 혀를 내둘렀다. 텅 빈 아름다움의 결정체는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3세를 유혹하려는 의도로 보낸 열아홉 살의 비르지니 드 카스틸리오네다. 겸손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자신이 세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미인이라며 자화자찬을 했다. 가슴만큼 자랑할 만한 것이 없었고, 정말 아름답지만 정말 죽여주게 따분한 여자였다.

카스틸리오네 백작부인

 

 



- 매력적인 추녀형
조지 1세의 정부인 에르멘가르다는 천연두를 앓은 탓에 머리카락이 거의 없었고, 촌스러운 가발에 깡총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렇다고 재치가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못생긴 외모를 상쇄시킬 만한 것이라곤 상냥함과 충직함뿐이었다. 또 다른 한 명은 조그맣고 뚱뚱한 소피아 샤를로테이다. 불쾌할 정도로 데굴데굴한 검고 커다란 눈, 그 위로 우뚝 솟은 아치형 눈썹, 한없이 펼쳐져 있는 진홍색 두 뺨, 대양이 범람한 듯 넘실대는 목은 몸과 전혀 구별이 안 됐고, 코르셋으로 조일 수 있는 부분은 한 군데도 없었다.

소피아 샤를로테

 

 

 

 

 

 한 나라의 최고의 권력자인 왕들의 혼인은 끔찍하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랑을 위한, 섹스를 위한, 자신을 위한 결혼이 아닌 정치적 이익을 위한, 또는 철저하게 왕자들을 생산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근친상간이나 친족 간 결혼이 흔하다보니 난쟁이 같은 작은 키와 근시나 사시를 가진 성적 매력이 전혀 없는 왕비들도 수두룩했다. 나폴레옹은 역대 군주들 가운데 가장 솔직한 발언을 한 바 있는데 “나는 차라리 자궁과 결혼하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게 왕비 탓은 아니지만 어쨌든 왕들은 왕비들을 그저 대외적 왕비 역할을 하는, 그리고 왕자들을 생산하는 씨받이(?)정도로 치부하고 바람을 피기 시작했다.

 왕은 자신의 욕망을 정부를 통해 실현했고, 여인들에게 왕과의 은밀한 사랑은 확실히 유혹적이었다. 화려함과 추락 사이에서 왕과 아슬아슬한 사랑을 나누었던 정부(情婦)들은 왕에 대해 성적 임무는 물론이고 정치적, 전략적 임무를 수행해야 했고 그 대가로 왕에게 권력과 부를 제공받았다. 하지만 왕의 신임을 잃은 후에는 수녀원으로 추방되거나, 가난과 빚에 허덕이다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 퐁파두르 공작부인 

 

BourcherMadame de Pompadour

 

 프랑스 루이 15세의 정부(情婦)인 퐁파두르 부인은 명실 공히 왕실의 정부(情婦)들 중 가장 유명하다. 정작 루이 15세의 왕비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마담 퐁파두르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부셰의 아름다운 초상화로도 유명한 그녀는 또 로코코 시대의 화려함을 대변하는 아름답고 지적인 여인이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문화, 예술에 큰 영향을 끼치고 정치에서는 왕의 역할까지 대신하는 등 프랑스 역사 상 가장 유명한 여성 가운데 한명이다.

 그녀는 왕비의 측근조차 ’퐁파두르 부인은 내가 본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여성의 하나’라고 토로할 만큼 외모가 뛰어났지만, 루이 15세가 그녀에게 빠진 것은 단지 미모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건축과 예술,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박학다식해서 살롱 문화를 이끄는 등 교양이 풍부한 여성이었고, 사려 깊은 마음씨, 지적 소양 등으로 왕의 총애를 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섹스불감증이었던 걸로 전해지는데, 정부에게 불감증이 얼마나 치명적이었는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녀는 자신을 대신해 왕의 욕정을 충족시켜줄 여인을 직접 선택해 왕의 시중을 들게 하기도 했다. 다정다감하고 친절했던 그녀는 루이 15세의 왕비에게도 극진했고, 당시 베르사유 궁의 살림을 도맡아 했다. 마담 퐁파두르는 43살의 나이로 요절했는데 당시 루이 15세는 한 달 동안 시름에 잠겨 국정도 돌보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몽테스팡 공작부인

 

Marquise de Montespan 1641~1707

 

 16세기부터는 아예 ‘왕의 공식 정부(情婦)’를 뜻하는 ’메트레상티트르(ma^itr´esse-en-titre)’시대였다.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지극한 아내 사랑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인기를 위해 메트레상티트르를 임명해야만 했다. 어쨌든 이런 공식적인 제도까지 생겼으니 왕들은 법의 보호를 받으면서 정부(情婦)와 즐길 수 있었다. 태양왕 루이 14세 역시 많은 정부(情婦)를 거느렸다. 그중 여우같은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마담 드 몽테스팡이다.

 친구를 배신하고 타고난 미모와 술수로 왕의 애첩자리를 가로챈 몽테스팡 공작부인은 루이 14세의 애첩 라 발리에르에 접근하여 시녀이자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곧 그 자리를 밀어내고 1667년 왕의 정부(情婦)가 되어 약 12년간 궁정 사교계를 주도했다. 그녀는 루이 14세와의 사이에 6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자신의 자식들의 가정교사인 맹트농에게 ‘왕의 정부(情婦)’자리를 뺏기게 된다. 왕의 총애를 독점하기 위해 일부러 나이도 많고 미모가 떨어지는 맹트농 부인을 골랐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녀가 물러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마녀의 ’검은 미사’로 불리는 사건이었다. 그녀는 암흑미사와 낙태시술을 거행하는 마녀 라부아쟁을 찾아가 루이 14세의 마음을 잡아두기 위한 비법을 의논했고, 갓난아기의 목을 잘라서 나체로 누운 몽테스팡 부인이 그 피를 몸에다 받는 암흑미사를 거행했는데 왕한테 발각이 되었다. 결국 마법의식을 거행한 라부아쟁은 화형에 처해졌고 그녀는 수녀원에서 여생을 보냈다.

 

 

 

 

메리 볼린 후작 부인

 

Mary Boleyn

 

 영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은 바로 헨리 8세이다. 그는 6명의 아내를 두었고, 그 중 2명을 죽인 왕으로 더 유명하다. 역사 속에는 6명이 왕비들이 있었다. 그러나 영화 ’천일의 스캔들’로 한 명이 더 추가되었으니, 헨리 8세의 두 번째 여왕 앤 볼린의 언니 메리 볼린이다. 메리 볼린은 첫눈에 헨리 8세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동생인 앤 볼린보다 먼저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왕비 자리는 결국 동생인 앤이 차지하게 된다.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헨리 8세의 맞수였던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정부(情婦)이기도 했는데, 프랑수아 1세는 그녀를 ’가장 수치스러운 창녀’, ’나의 전용 마차’ 라고 불렀다. 그녀는 프랑수아와의 관계가 끝난 뒤, 영국으로 돌아와 헨리 8세의 정부(情婦)가 되었다. 하지만 동생이 왕비가 된 후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궁을 떠났다. 빈곤한 생활로 인해 어려움이 처하자 왕비가 된 앤이 그녀를 도와주고 자매는 화해했다. 하지만 앤이 처형당한 후 그녀는 근근이 물려받은 재산으로 빈곤 속에서 조용히 살았다.

 

 

 

 

캐슬마인 백작부인

 

Hulton ArchiveBarbara Villiers, 1666

 

 유럽의 최대 바람둥이 왕은 영국의 찰스 2세였다. 공식 애인만 50명이었다. 그 50명의 애인들 중 최고는 바바라 빌리어즈로 후에 캐슬마인 백작부인이 된 여인이었다.

 레이디 캐슬메인 바바라 빌리어즈는 짙은 적갈색 머리와 날씬한 몸매, 백옥 같은 피부를 가진 뛰어난 미인이었다. 빛나는 눈동자와 오뚝한 콧날, 앵두 같은 입술은 뭇 남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이미 결혼을 했지만 찰스 2세에게 콕 찍힌 그녀는 캐슬마인 백작부인이 되어 궁으로 들어왔다. 바람둥이 찰스 2세 못지않게 요부였던 그녀는 여러 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그들 중 두 명은 왕의 자식이 아니었다. 사치스러웠던 그녀는 호화로운 생활을 위해 왕을 졸라 매년 엄청난 돈을 써댔고, 도박을 좋아하여 그녀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이 하늘을 찔렀다. 자신의 미모에 대한 자신감이 자만심으로 변한 그녀는 무례하고 방자했다. 그녀는 어린 왕비 캐서린을 함부로 대했고, 왕비의 시녀가 된 후에는 어린 왕비에게 심한 텃세를 부렸다. 그녀는 왕이 죽고 나자 힘든 말년을 보내다 죽었다.

 

 

 

 

로라 몬테즈 백작부인

 

Ludwig Stieler Lola Montez&nbsp;1847

 

 세기 유럽을 격동으로 몰아넣은 요부가 있었으니 바이에른의 루드비히 왕의 정부(情婦)였던 로라 몬테즈다. 그녀로 인해 여러 남자가 신세를 망쳤고, 한 나라의 왕이 퇴위에 이르게 되었으며, 백성들의 폭동을 유발시켜 결국 혁명이 일어났다.

 타고난 거짓말쟁이였던 로라는 이혼 후 도발적이고 음란한 춤으로 인기를 얻었다. 그녀는 자신이 스페인 귀족과 집시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라는 소문을 퍼트려 자신을 신비스럽게 포장했고, 유럽 각국에서 수많은 남성들과 염문을 뿌렸다. 그들 중에는 리스크,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 알렉상드르 뒤마, 발자크, 빅토르 위고 등 유명인사들도 많았다. 독일 바이에른에서 루드비히 1세의 앞에서 자신의 가슴 옷자락을 나이프로 잘라내고 외설적인 춤을 추어 유혹했다. 당시 60세였던 왕은 그녀에게 빠져 국고를 낭비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15개월 만에 16만 굴덴(당시로 27억원)에 가까운 돈을 챙겨서 그 돈으로 다른 남자와 놀아났다. 하지만 사랑에 눈 먼 왕은 그녀의 말만 믿었다.

 어쨌든 그녀는 정치에도 간섭했으며,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결국 혁명으로 연결된다. 당황한 루드비히 1세는 왕위를 아들에게 넘기고 퇴위하여 사태를 가라앉혔다. 로라는 런던으로 돌아가 다른 남자와 결혼했지만 재산을 도박으로 모두 탕진하여 미국으로 향한다. 미국에서 백작 부인이라는 작위를 내세우며 다시 유명인사로 떠올라 크게 성공하지만 말년은 병으로 고통 받았으며 가난하고 쓸쓸하게 죽었다.

 

 

 

 

■ 유부녀 카밀라 파커 볼스(Camilla Parker Bowles) 부인

 

 

 영국의 찰스 왕세자는 오래된 정부(情婦) 카밀라 파커 볼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다이애나 왕세자비와의 결혼 생활을 파경으로 몰고 가 세상을 경악시켰다. 1993년 1월, 영국의 언론은 찰스 왕세자와 미국인 유부녀 카밀라 사이의 휴대전화 통화 내용을 보도했다. 이때 보도된 노골적인 성적 대화를 통해 찰스가 결혼하기 전 수 년간 카밀라가 찰스의 정부라는 것이 밝혀졌다.

 테이프에서 찰스는 카밀라의 탬팩스(Tampax, 미국의 유명한 생리대 브랜드, 탐폰 상품명)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했고, 찰스에게 그것은 오명으로 남았다. 해외 언론에서는 그를 '탬팩스 황태자'라 불렀고, 영국 여자들은 탐폰을 '찰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모욕과 욕설을 한 몸에 받은 찰스는 왕위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포기하고 나라를 떠나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관례를 보면, 군주들은 미모는 떨어져도 적당한 자격을 갖춘 배우자를 골라 결혼을 하고, 대신 아름다운 정부를 들였다. 하지만 찰스 왕세자는 다이애나에게서 풍기는 신비한 분위기를 외면하고 선머슴 같은 카밀라를 선택했고, 대중들은 그를 크게 비웃었다.

 

 

 

 왕의 여자(情婦)들은 길든 짧든 왕의 지근거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화려하게 보냈다. 그들의 결말은 거의 대부분 비참하게 끝난다. 아, 단 하나의 예외가 최근 생긴 듯하다. 새로 영국의 왕비가 될 듯한 찰스 왕세자의 정부 카밀라 파커 볼스 부인이겠다.

 새로운 연적에 밀리거나 버려지거나.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불나방처럼 권력이라는 불길을 향해 날아드는 이유는 역시 권력의 힘 때문일까. 사랑 때문이라고 말할 사람은 무덤 속에 누워 있는 그들 중 과연 몇몇이나 될까?

 

 

 

 

 

 

 

 


 

 

 

저자 엘리노어 허먼(Eleanor Herman, 1960~) :

 

역사작가. 유럽의 여러 왕가들과 친족 관계에 있는 저자는 왕족의 피를 물려받은 탓에 어릴 때부터 틈만 나면 왕들의 삶을 연구하고 그들이 살았던 궁전을 여행했다. 그러는 동안 역사의 95퍼센트가 남자들에 의해 기록된 ‘남자들(왕과 전사, 탐험가, 발명가 등)의 이야기’라는 것을, 슬프게도 예나 지금이나 전 세계 인구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은 역사 연구에서 완전히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자는 1981년 볼티모어 타우슨 주립대학에서 언론학을 전공했다. 이후 유럽으로 건너가 언어를 공부하고, 여러 간행물에 기고했으며, 1989년부터 2002년까지 본의 ‘묀허퍼블리싱’에서 편집인으로 일했다. 또 수많은 외국 지도자들을 인터뷰하고 브뤼셀에 있는 NATO 본부에서 연설을 해왔다. 내셔널프레스클럽의 ‘책과 작가를 위한 모임’의 일원이며 지금은 여성들의 역사를 연구하고 기록하는 일을 본업으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