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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철학서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1·2·3』 & 『그림으로 보는 십자군 이야기』

by 언덕에서 2020. 2. 6.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1·2·3』 & 『그림으로 보는 십자군 이야기』

 

 

 

 

 

십자군 전쟁은 인류 역사상 2백 년이라는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치러진 전쟁이자 세계 2대 종교가 격돌한 인류 역사의 대사건이다.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 십자군 전쟁은 현대의 다양한 문화산업에서 변형되어 재생산되며 상상력의 원천이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에 대한 기존 연구서들은 서구 중심 혹은 이슬람 중심의 시각틀에 갇혀 그 진면목을 보여주지 못했다. 시오노 나나미는 그 전쟁을 실제로 일으키고 그 역사 속에서 살아 숨쉬고 움직였던 인물들을 전면에 내세워 이야기를 진행한다. 그들의 이상과 욕망, 성공과 좌절의 명암을 통해 십자군 전쟁을 새롭게 조명한다. 시오노 나나미1에 의해 십자군 이야기는 9백 년이라는 시간을 건너뛰어 현대적 이야기로 재생한다.   

  이 책 『십자군 이야기』 도합 세 권, 한 세트로 구성된다. 19세기 화가 귀스타브 도레가 그린 풍속화를 시오노 나나미가 해설한 내용으로 이루어진 『그림으로 보는 십자군 이야기』는 별매 책으로 한 눈으로 십자군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시오노의  해설이 딸린 그림책이지만  『십자군 이야기』 1~3권을 읽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게 단점이니 유념할 필요가 있다.

 

 

 

  『십자군 이야기』 1권에서는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라는 위력적인 한 마디로 촉발된 유럽의 봉건제후와 주교, 수도사와 기사, 그리고 빈민들로 구성된 제1차 십자군의 결성과 그들에 의해 십자군 국가가 성립하는 20여 년의 과정을 다뤘다.

  2권에서는 십자군의 제1세대가 모두 역사에서 퇴장한 뒤, 프랑스 출신 귀족의 아들 보두앵 2세가 예루살렘 왕으로 등극하는 1118년부터 시토파의 수도사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의 제창에 의한 제2차 십자군의 결성과 퇴각(1146~1148),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정복함으로써 예루살렘을 십자군 시대 이전으로 되돌리는 1187년까지, 이슬람의 대반격이 시작되는 제2차 십자군 전후의 70여 년의 기간을 다뤘다.

  3권에서는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격돌한 하틴 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뒤 십자군 국가가 성도 예루살렘을 비롯한 대부분의 영토를 잃은 채 안티오키아와 트리폴리, 티루스 일대로 축소되자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해 유럽에서 속속 일어났던 3차에서 8차까지의 십자군 원정과 십자군 국가에 남겨진 최후의 도시 아코에서 벌어진 공방전 그리고 십자군 전쟁이 끝난 뒤 남겨진 기사단의 운명까지 1백여 년 동안의 기간을 다루고 있다. 2백년 동안 계속되었던 이 전쟁을 원정 차수별로 내용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차 십자군

  11세기에 봉건 유럽에서는 상업과 종교가 광범위하게 부흥했고 예루살렘과 동방 성지 순례가 점차 유행하게 되었다.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도로 하는 비잔티움 제국은 점점 강대해지는 셀주크 투르크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청했다. 필요성을 느낀 교황 우르바노 2세는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알렉시우스를 돕고 그리스도의 성묘를 탈환하기 위해 그리스도교도의 군대를 소집했다.

  이에 따라 베르망두아의 위그, 보에몽, 생질의 레몽, 플랑드르의 로베르 같은 서유럽의 영주와 기사들이 군대를 일으켰다. 보잘것없는 전사·모험가·광신자들의 소규모 비조직적인 부대도 형성되었다. 그 후 2년이 넘도록 그들은 콘스탄티노플과 그 주변에 모여 오늘날의 터키 지역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진군할 준비를 했다. 1098년 그들은 오랜 포위 공격 끝에 난공불락의 요새인 (터키 지역의)안티오키아를 점령했다.

  십자군은 1099715일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그곳에 살던 이슬람교도와 유대인을 학살했다. 그 후 몇십 년간 십자군은 팔레스타인 해안을 따라 가느다랗게 뻗어 있는 도시 지역을 장악하고 예루살렘 왕국, 트리폴리 백작령, 안티오키아 공국, 에데사 백작령 등 소위 십자군 국가를 세웠으며, 그곳에 유럽인 통치자를 두었다. 그들은 해안과 내륙의 변경을 따라 성곽을 세웠다.

 

2차 십자군

  1144년 십자군은 모술에 강력한 이슬람 국가를 세운 셀주크 투르크의 통치자 장기에 에데사를 빼앗겼다. 에데사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유럽에 전해지자 교황 에우제니오 3세는 제2차 십자군을 소집했다. 이 제2차 십자군 원정 동안 독일 황제 콘라트 3세와 프랑스 왕 루이 7세가 이끄는 군대가 1148년 봄 예루살렘에서 연합해 5만 명의 병력으로 다마스쿠스 북쪽을 공격했다.

  십자군은 장기의 후계자 누레딘이 이끄는 군대에 밀려 결국 후퇴했으며, 2차 십자군 원정은 치욕스러운 패배로 끝났다. 누레딘은 1154년 다마스쿠스를 점령했고, 살라딘이 1169년 이집트 전역을 장악하고 1183년 알레포를 점령함으로써 십자군 국가들을 완전히 포위했다.

1187년 살라딘은 갈릴리 바다 근처의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주둔 십자군을 거의 무찔렀으며 102일에는 예루살렘과 다른 십자군 요새를 대부분 점령했다.

 

3차 십자군

  예루살렘이 위험하다는 소식에 교황은 다시 십자군이 소집하였다. 이슬람교도가 붙여준 별명 사자심왕 리처드로 유명한 영국 왕 리처드 1세는 하틴 전투로 십자군 국가를 궤멸 직전의 상황으로 몰고 간 살라딘에 맞서 뛰어난 전략과 타고난 용맹성으로 아코에서 아스칼론에 이르는 항구도시를 되찾는다. 성도 예루살렘 탈환을 코앞에 두고 영국 본토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리차드 왕은 살라딘과 협상을 시작하여 예루살렘을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가 공존하는 도시로 만든 후 영국으로 귀국한다.

 

4차 십자군

  해군력이 당시 유럽 최강이었던 베네치아는 이슬람과의 전쟁이 아니라 같은 그리스도교도와의 전쟁으로의 방향 전환을 주도하고 황제 자리가 공석인 비잔틴제국을 공략하여 라틴제국을 세운다. 십자군이 이슬람이 아닌 그리스도교 국가를 공격하는 아이러니를 보인 것이다. 당시 베네치아의 국가지도자는 도제 엔리코 단돌로였다. 4차 십자군은 세계사 교과서에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것으로 기록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에 의해 조정된 프랑스 제후들의 원정 참여로 시작되었으나 술탄 알 아딜과의 불가침협정을 맺은 베네치아의 참전으로 행선지가 변경되고 말았다.  10개월에 이르는 공방전을 통해 천 년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라틴제국이라는 엉뚱한 나라가 건설된다.

 

5차 십자군

 

  교황은 다시 한번 이슬람교도들을 공격할 것을 호소했다. 이번에는 유럽에서 별도의 병력 수송 없이 십자군이 점령한 중근동 그리스도교 도시의 병력만으로 이슬람 세력을 공격하기로 한다. 또한 십자군 전쟁의 주도권을 되찾아오기 위해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교황 대리펠라조 주교를 십자군 원정에 참여시킨다. 교황 대리 펠라조 주교는 불신앙의 무리와의 타협이 아니라 그리스도교도의 피로 성도 예루살렘이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이슬람측에 대한 유리한 협상 시점을 놓쳐 버리고 결국 원정을 실패로 이끈다. 이슬람측의 사각지대였던 나일강 삼각주 지역의 항구도시 다미에타를 공략하는데 성공하지만 불리한 상황에 있던 이슬람측의 강화 제안을 거부함으로써 성도 예루살렘을 피를 흘리지 않고 해방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만다.

 

6차 십자군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심리전을 방불케 하는 교묘한 외교 전술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성지 예루살렘을 수복한다. 중세 유럽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독특한 사고방식을 가진 이 인물은 자신이 지배하는 시칠리아에서 이슬람교도들의 무에진2 소리가 울려퍼질 수 있도록 공존을 허락한다. 살라딘의 아우이자 술탄이 된 알 아딜과 그를 이은 알 카밀과의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에 그리스도교 순례자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한 강화조약이 지속되도록 하고 그리스도교도의 숙원인 예루살렘도 되찾는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으로부터 두 번이나 연거푸 파문을 받고, ‘불신앙의 무리와의 교섭을 통해 예루살렘에 무혈입성했다는 이유로 그 공적을 인정받지 못한다. 성도 예루살렘은 그리스도교도의 피를 흘리며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교황에 의해 그리스도의 적으로까지 선언되었다.

 

7차와 제8차 십자군

  프랑스 왕 루이 9세가 주도한 원정은 무참한 실패로 귀결되었으나 십자군 원정을 두 번이나 이끌어 교황청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된다. 사자심왕 리처드와 프리드리히 2세와는 달리 이슬람의 중심인 이집트를 공략한 루이는 나일강의 삼각주 지대에 있는 도시 다미에타 공략에는 성공하지만 결국 몰살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고 자신은 물론 십자군 전체가 포로가 되는 진풍경을 연출한다. 20년 뒤 다시 한 번 원정을 나서지만 튀니지아에 상륙하자마자 루이 자신이 역병에 걸려 죽음으로써 두번째의 원정도 실패하고 만다. 이교도로부터 성도를 되찾기 위해 십자군 원정을 두 번이나 치른, 그리고 참담한 패배자가 되어 순직한 이 왕은 아이러니하게도 십자군 원정에 참가한 그 어떤 왕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던 성인의 반열에 오른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 디렉터스 컷 Kingdom of Heaven> , 2005 제작 

기사단

  3차 십자군에서 새롭게 등장한 튜턴 기사단과 여전히 십자군 전력의 주축을 담당한 템플 기사단과 병원 기사단은 십자군 전쟁의 후반 한 세기에 주역으로 활동하게 된다. 십자군 전쟁 기간 내내 출신과 스타일의 차이와 라이벌 의식 때문에 협동해 싸운 적이 한 번도 없던 템플 기사단과 병원 기사단이지만, 1291년 팔레스티나에 마지막으로 남은 그리스도교의 도시 아코에서 벌어진 공방전 그 최후의 날에 두 기사단의 단장은 마치 등을 맞대고 싸우듯 함께 분투하다 최후를 맞이한다.

  이후 명맥을 유지하는 튜턴 기사단이나 병원 기사단과는 달리 템플 기사단은 교황과 프랑스 왕에 의해 조직 자체가 완전히 와해되고 만다.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는 말 한 마디에 고무되어 고국을 떠나 먼 팔레스티나에 와서 다른 어느 기사단보다 맹목적이고 광신적으로 이슬람교도를 공격하는 일에 앞장섰던 템플 기사단의 마지막 단장이 이단 재판을 받고 화형에 처해짐으로써 템플 기사단은 역사의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 이슬람의 지도자들

  십자군에 맞선 이슬람의 지도자 살라딘과 알 아딜, 알 카밀은 살라딘의 냉철함과 합리성 그리고 관용 정신을 이어간다. 그들은 이슬람 내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사자심왕 리처드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의 협상을 통해 성도 예루살렘을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가 공생할 수 있는 도시로 만들고, 이 협상을 신뢰의 약속으로 계속 유지시켜나가도록 한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를 엄청난 속도와 파괴력으로 집어삼킨 몽골제국은 이슬람의 빛나는 수도 바그다드와 다마스쿠스마저 폐허로 만든다. 이 몽골의 서진을 노예 출신의 장수 바이바르스가 막아내 새로운 술탄의 자리에 오른다. 그 포악함으로 서유럽 세계를 떨게 했던 술탄 바이바르스는 그리스도교도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지중해에 처넣어주겠다고 선언하고, 마침내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전역에서 그리스도교도를 박멸한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 디렉터스 컷 Kingdom of Heaven> , 2005 제작  

 

 전쟁이 남긴 것은?

  시오노 나나미는 이 장대한 시리즈의 완결편에서 십자군 전쟁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지, 역사의 진정한 승자는 누구인지, 이 시대에 필요한 궁극의 외교론과 공생론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강화로 끝난 리처드 왕의 제3차 십자군에 대해, 현대의 많은 연구자들은 상황이 그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평한다. 분명히 십자군측은 예루살렘을 수복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를 목표로 내세우고 원정을 시작했던 제3차 십자군은 군사적으로 실패한 셈이다. 그러나 리처드와 살라딘이 성립한 이 평화는 강화 조문에 명기된 38개월이라는 기한을 훌쩍 넘어, 간혹 사고는 있었지만, 1218년까지 26년 동안 이어졌다.

  26년이라는 세월이 짧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가령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26년간의 평화가 성립한다면 어떨지 생각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시기 중근동의 십자군 세력을 생각하면, 26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던 것이다. 1218년은 알 아딜이 죽은 해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평화가 깨진 것은 그리스도교측이 제5차 십자군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206)

 

 

 

 ◎ 전쟁은 필요악인가?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전쟁은 인류 최대의 악업이다. 그런데도 인류는 도무지 이 악에서 벗어날 수 없다그렇다면 전쟁이란 그 승패 여부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저지른 후 얼마나 오랫동안 평화가 이어졌느냐 하는 것으로 평가하는 게 좋지 않을까또한 인류가 전쟁이라는 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상 영원히 지속되는 평화란 있을 수 없으며, 그때그때 단기간의 평화를 쌓아가는 식으로 달성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을까.(335~336)

  야파, 즉 텔아비브는 현재 이스라엘의 수도 기능이 집중되어 있는 이스라엘 제일의 도시다. 한편 지금도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가자는 팔레스티나 사람들의 자치지구이자, 파타하보다 과격한 하마스가 지배하는 가자 지구의 중심적인 곳이다. 가자 역시 정치 기능이 집중된 도시라 할 수 있다.

 텔아비브에서 가자까지의 거리는 불과 17킬로미터 안팎이다. 21세기인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티나는 이 거리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미사일을 쏘아대고 다른 한쪽은 공중폭격으로 대응하며 대치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장소에서, 지금으로부터 8백 년쯤 전인 1228년에서 1229년 사이는,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고 공생을 실현하기 위한 교섭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도 그리스도교 세계 속계의 일인자인 황제와 이슬람 세계 속계의 일인자인 술탄, 즉 정상 중의 정상들이.(382~383)

 

 

영화 <킹덤 오브 헤븐: 디렉터스 컷 Kingdom of Heaven> , 2005 제작 

 ◎ 십자군 전쟁이 오늘의 우리에게 묻는다

  시오노 나나미3는 이 장대한 시리즈의 완결편은 다음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옳은 것만 말하는 신이 바란 일이니 옳은 전쟁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따라서 신의 존재가 후퇴한 뒤에도 옳은 전쟁만은 남았다. 아니, 적어도 이 정도는 남기고 싶다고 인간이 생각했기에 남은 것인지도 모른다그리고 그것은 20세기에 맹위를 떨치고 21세기인 지금까지 계속 남아, 전쟁을 이끌어내는 측이나 이끌려나간 측 모두, 옳은가 옳지 않은가 하는 문제를 두고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다.(560)

 

  십자군 전쟁이 오늘의 우리에게 묻는다. ‘옳은 전쟁이란 무엇이고 과연 그 옳은 전쟁이라는 것이 있는지를.

 

 ◎ 시오노 나나미와 그 관점

 많은 비평가와 역사학자들은, 시오노의 작품이 엄밀히 말하면 역사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독자가 이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경계의 목소리를 낸 바 있다. <로마인 이야기>나 『십자군 이야기』는 역사평설가 또는 소설가가 만든 '이야기 책'에 불과하다. 예를 들자면  박종화가 쓴 <금삼의 피>,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 이광수의 <단종애사>,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을 우리는 '역사소설'이라고 하며 '역사서'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그야말로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뻥튀기를 좀 넣은, 이야기 책' 정도로 해석하면 타당할 듯하다.

 시오노 나나미는 스스로 인정한 것과 같이 저작이 마키아벨리즘적이고, 권력에 대해 그다지 비판적이지 않은 문체를 유지하고 있다. 이 책 『십자군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로 교황이나 칼리프, 국왕과 술탄의 비정상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거의 무비판적이며 민초들의  고난에 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비잔티움 황제나 프랑스 왕, 이탈리아 도제의 권모술수에 관해서는 관용적인 시선을 유지하지만 수도사 프란체스코(아시시의 성프란체스코)의 돌출 행동에 관해서는 조소어린 시선을 보낸다.

 마키아벨리즘은 도덕과 정치를 분리시키자는 것이지 도덕 자체를 인정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시오노 나나미의 가치관을 "마키아벨리즘"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시오노 나나미는 오히려 그 왜곡된 의미로서의 마키아벨리스트라고 불러야 될 것이다.

 

  1. 또한 시오노의 책에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부분(《로마인 이야기》의 경우 특히 고대 그리스를 서술한 부분이나 로마의 속주 통치를 미화한 부분)이 다수 있으며, 이것이 독자들에게 잘못된 정보와 그릇된 편견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을 지적받은 바 있다. [본문으로]
  2. 이슬람 지역에서 이른 새벽에 크고 청아한 목소리로 기도 시간을 알려 주는 사람. [본문으로]
  3. ' 실제로 스스로 인정한 것과 같이 저작이 마키아벨리즘적이고, 권력에 대해 그다지 비판적이지 않은 문체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상당부분 마키아벨리를 오해한 입장으로, 마키아벨리즘은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