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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철학서

현장 기행문 『대당서역기』

by 언덕에서 2024. 4. 3.

 

 

현장 기행문 대당서역기 

 

 

중국 당나라 때 승려인 현장(玄奘, 602~664)이 629년부터 645년까지 서역(西域)으로 가서 법경을 구한 행적을 기록한 기행문으로 모두 12권으로 되어 있으며 현장이 기술하고 그의 제자인 변기(辯機)가 편찬했다. 신강(新疆)ㆍㆍ투르키스탄ㆍ터키ㆍ아프가니스탄ㆍㆍ파키스탄ㆍ인도 등을 여행하고 파밀을 거쳐 귀환한 여행 기록을 칙명에 의해 기술한 것으로, 138개 국가, 지구(地區), 도시국가의 지리, 산천, 성읍, 교통, 풍습, 산물, 정치문화 및 특히 당시의 불교 상황, 불교 고적, 역사 전설, 인물 전기 등에 관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인도ㆍ네팔ㆍ파키스탄ㆍ방글라데시ㆍ중앙아시아 지역의 고대 역사ㆍ지리ㆍ종교ㆍ문화 및 중국과 서역의 교역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 책에 근거하여 궁터와 옛 성터, 녹야원(鹿野苑:석가가 최초로 설법한 장소), 고찰, 아잔타 석굴, 날란다 유적에 대한 탐사와 발굴을 하여 충분한 증거자료를 얻었다. 프랑스어와 영어의 2가지 번역본이 있고 청대(淸代) 정겸(丁謙)은 <대당서역기고증(大唐西域記考證)>을 지었다.

 이 책은 19세기부터 서구의 학술적 연구 대상이 되었으며,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친 학술탐험의 귀중한 자료가 되기도 하였다.

 

중국 소설 <서유기>를 만화로 만든 고우영 화백의 [서유기]

 

 『대당서역기』의 '저자' 현장(玄奬)은 일반인들에게는 소설 <서유기>에 등장하는 '삼장법사'(三藏法師)의 모델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7세기 당나라의 불승 현장이 인도를 다녀온 뒤, 그의 여행담을 토대로 쓰인 『대당서역기』는 후대의 많은 사람에게 '서역(西域)'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상상과 영감을 불러일으켰고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허다한 민간 설화를 탄생시키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가공의 스토리들을 그럴듯하게 엮어서 만든 것이 <서유기>로 마치 현장의 구법 여행이라는 하나의 기초 위에,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현실과 허구를 재료로 엮어서 만든 거대한 구조물과 같은 이야기다. 예를 들어 현장이 통과했던 중앙아시아의 투루판 지역에는 수직으로 파인 수많은 주름으로 이루어진 붉은색 산줄기가 있는데, 현지 주민들은 이를 '붉은 산'이라는 뜻의 '키질 탁'이라고 하며 중국 사람들은 화염산(火焰山)이라 부른다. 멀리서 보면 정말로 화염이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느낌을 준다.  소설 <서유기>에는 이 산의 화염으로 인하여 주민들이 엄청난 고통을 받을 뿐 아니라 삼장 일행의 서역행도 난관에 부딪히게 되어 그곳에 사는 나찰녀(羅刹女)가 가진 파초선(芭蕉扇)으로 불을 껐다는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지금 화염산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 중턱에 삼장 일행의 조각상을 만나볼 수 있다.

 이처럼 현장은 후대에 가서 민간 설화와 대중 소설의 주인공으로 바뀌어 버리고 말았지만, 그의 『대당서역기』는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자신의 목적을 성취한 중세의 구도자가 남긴 위대한 기록이자 인류의 고전이다.

 

 

 현장이 인도로 불경을 구하기 위해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출발한 해는 629년인데, 이 시기는 태종 이세민(李世民)이 '현무문(玄武門)의 변(變)'을 일으켜 형제들을 살해하고 등극한 직후였다. 태종은 쿠데타나 다름없이 황제가 된 인물로 자신의 즉위를 둘러싼 잡음을 없애기 위해 강력한 대외 팽창 정책을 취했으며, 그 일차 목표는 북방 최대의 위협이었던 돌궐(突厥)과의 대결이었다. 태종은 돌궐에 대한 총공세를 감행하기 위해서 국경 지역에 비상령을 선포하고 통행을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마침 그때 약관 28세에 불과했던 현장은 불교 경전들에 나오는 중요한 개념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각지의 스승들을 찾아다니며 물어보았으나 만족할 만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인도에 가 완벽한 형태의 원전을 구해서 그 심오한 진리를 터득해야겠다는 결심을 세웠다. 그는 몇 명의 동료들과 함께 출국을 요청했으나 정부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다른 사람들은 의기소침하여 모두 인도행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현장은 여기서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국법을 어기고 장안을 몰래 빠져나가 고비사막과 기련산맥 사이로 뻗쳐있는 '하서회랑', 즉 중국 서부에 있는 간쑤성에서 신강 지역에 이르는 좁은 통로를 따라 서역으로 향했다. 서역의 관문에 해당하는 투루판 지역에는 당시 국문태(麴文泰)라는 한인(漢人)이 다스리는 고창(高昌) 왕국이 있었다. 이미 현장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던 그는 현장에 인도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그곳에 남아 불법을 가르쳐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국법까지 어기고 고국을 떠난 그가 요구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그는 단식까지 불사하면서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국왕은 현장에 인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반드시 다시 들러 3년간 그곳에 머물겠다는 약조를 받아낸 뒤에야 비로소 그의 출발을 허락해 주었다. 아울러 그는 현장의 여행을 돕기 위해 4명의 사미승과 법복 30벌, 황금 100량과 은전 3만과 비단 500필을 제공하고, 당시 그 지역 전체를 호령하던 돌궐의 군주에게 전달하는 소개장까지 써주었다.

 고창을 출발한 현장은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변을 따라 서쪽으로 가다가 톈산산맥을 가로질러 서북쪽으로 방향을 튼 뒤, 628년에는 탈라스에 이르러 다시 서남쪽으로 돌아내려오면서 타슈켄트를 거쳐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천신만고 끝에 인도에 도착한 현장은 그 후 18년 동안 인도의 북부ㆍ동부ㆍ남부ㆍ서부 등을 두루 다니면서 각지의 불적(佛跡)을 탐방하고 고승들을 만나 토론을 벌인 뒤 귀로에 올랐다. 그는 인도를 여행하는 동안 특히 중북부에 있는 마가다국의 나란다 사원에 오랫동안 체류하면서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을 비롯하여 대승(大乘)과 소승(小乘) 계열의 많은 경전을 공부하여 종래 불분명했던 내용들을 명확하게 깨우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여행의 본래 목적을 달성한 그는 귀로에 올라 644년에는 현재 신강성 서남단에 있는 호탄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그는 태종에게 자신의 귀국을 알리는 상표(上表)를 올렸고, 태종은 비록 그가 국법을 어기고 탈출했으나, "가능하면 신속하게 돌아와서 짐(朕)을 만나도록 하라!"는 답신을 보냈다. 그는 인도에서부터 갖고 온 수많은 불경의 원전들을 챙겨서 일정을 재촉하여 장안으로 들어갔고, 645년 음력 정월에는 황제의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마침내 긴 여정을 끝냈다. 그러나 수년 전 그가 고창 국왕과 했던 약속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가 고창을 들르지 않고 곧바로 장안으로 온 까닭은 현장이 그곳을 떠난 직후 태종의 서역 원정이 시작되어 멸망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장안에 도착한 직후, 태종은 현장을 불러 접견하는 자리에서 평소 중앙아시아나 인도 등지에 관해 궁금하게 생각하던 것들에 대해서 질문했는데, 현장은 정확하고도 요령 있는 대답을 해주었다. 그가 외국의 사정에 깊은 지식이 있는 것에 놀란 태종은 환속하여 자신을 보좌하면서 국정에 임해 주기를 청했다. 그러나 이는 현장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현장의 강고한 의지를 확인한 태종은 그에게 서역 여행을 통해서 얻은 풍부한 지식을 정리하여 글로 남겨 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해서 그로부터 1년 뒤인 646년에 완성한 기록이 모두 12권으로 이루어진 『대당서역기』다.

 그 후 현장은 인도 불전들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인도에서 습득한 원어에 대한 탁월한 지식과 경전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664년 장안 교외에 있는 옥화궁(玉華宮)에서 타계할 때까지 18년에 걸쳐 모두 1,338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불경을 번역했다. 이를 통산하면 평생 닷새에 한 권씩 계속해서 번역한 셈이 된다. 불교의 경전이 한문으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후한 시대부터인데, 그때는 한문에 능숙하지 못한 서역의 승려들이 경전의 번역 사업을 담당했기 때문에 개념이나 문장의 정확한 전달에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가 5세기 초에 서역 출신의 고승 쿠마라지바(鳩摩羅什)가 73부 384권에 이르는 대승 계열의 경전들을 번역함으로써 역경의 역사에 새로운 획을 그었다. 이렇게 볼 때 현장의 번역은 그 분량만으로 보아도 쿠마라지바가 했던 것의 3배를 넘는 방대한 양이었다. 불교가 중국에 전해 내려온 후 700년 동안 185명에 의해 번역된 불경 총 5,048권 가운데 1/4을 점하는 분량이다. 또한 중국인의 손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만큼 개념과 의미의 전달이 정치해져서, 이후 현장의 번역본은 모든 불경의 규범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인도행을 추진했고 귀국한 뒤에도 태종의 강권을 뿌리친 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촌음을 아껴가면서 역경에 매진한 필생의 성취였다.

 

 

 흔히 현장이 『대당서역기』의 저자로 알려져 있으나 책의 마지막에 실린 「찬(讚)」을 보면 현장의 제자인 변기(辯機)가 스승의 지시에 따라 그의 여행 기록을 참고로 하면서 찬술한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따라서 책의 내용도 대체로 현장이 다녀온 루트를 따라서 전개되고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인도의 여러 곳을 시계방향에 따라 서술하다가 마지막으로 중국의 타림분지 남쪽의 도시들에 대한 묘사로 끝난다. 그러나 책에 기재된 지역들이라고 해서 모두 현장이 직접 답파한 곳은 아니었다. 때로는 그가 직접 가보지 못할 곳일지라도 전문(傳聞)으로 듣고 그 내용을 기록한 예도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혼란을 피하고자 찬자는 "···에 가면[行]"이라는 표현은 현장이 직접 답방한 곳을, "···에 이르면[至]"이라는 표현은 전문으로 들은 곳을 적을 때에 사용하였다.

 『대당서역기』는 6~7세기 중앙아시아와 인도 각지의 민족ㆍ풍습ㆍ종교 및 정치ㆍ경제적 상황을 세밀하게 기록한 자료의 보고이다. 모두 12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술의 순서는 그가 여행했던 지역을 따라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 책에는 거의 140개에 가까운 '국(國)'(실제로는 도시)에 관해서 그 중심이 되는 도시의 특징, 주민들의 모습, 언어와 문자, 사원과 승려들의 숫자, 대승과 소승의 분포, 불교와 관련된 성스러운 유적지 및 그곳에 얽힌 역사적 사건과 일화 등이 차례로 서술되어 있다. 아무리 간략해도 지리적 설명과 풍속의 특징은 빼놓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오늘날 우즈베크공화국에 있는 부하라(Bukhara) - 포갈국(捕喝國) - 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부하라국은 주위가 1,600~1,700리에, 동서가 길고 남북이 좁다. 산물과 풍속은 사마르칸트와 같다. 이 나라에서 서쪽으로 400여 리 가면 벌지국(伐地國)에 이른다."

 이보다 조금 더 자세하게 절과 승려의 숫자가 덧붙여지기도 하며, 때로는 상당히 자세한 내용의 설화들이 소개되기도 한다. 이 같은 일화들 가운데에는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 즉 전설이나 설화적 요소가 다분히 내포된 것들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다른 어느 기록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내용이 정확하게 기재되어 있다. 특히 인도의 경우에는 당대의 문헌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그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는데, 그런 점에서 현장의 기록은 6~7세기 인도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도 필수 불가결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서구의 학자들이 일찍부터 『대당서역기』에 주목하여 자기들 언어로 번역하고 주석을 달고 또 여러 연구서를 내놓은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대당서역기』는 당시 북인도의 통치자였던 계일왕(戒日王)에 관한 상세한 기술이 보여 주듯이 7세기 인도의 정치ㆍ사회ㆍ문화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만, 그 이전 시대의 사건들에 대해서도 더없이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예를 들어 석가모니의 생몰연대에 대해서는 지금도 여러 가지 주장이 엇갈리고 있는데 현장은 이에 관한 당시의 여러 전승들을 충실하게 기록해 놓았다. 그뿐만 아니라 아직도 학계에 여러 가지의 이설(異說)이 분분한 카니시카 대왕의 통치 연대에 대한 언급, 불교 역사상 유명한 몇 차례의 '결집(結集)'에 기록, 나아가 대승 불교의 유명한 고승들인 마명(馬鳴), 용수(龍樹), 무착(無著), 세친(世親) 등의 활동과 사상에 관해서도 귀중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물론 현장 이외에도 인도로 구법(求法) 순례를 떠난 승려들은 아주 많았다. 현재 우리가 그 숫자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근세 중국의 유명한 학자인 양계초(梁啓超)에 따르면 4세기부터 8세기까지 천축국에 다녀온 승려들 가운데 후대에 이름이 전해지는 사람만 해도 169명에 달한다고 한다. 당나라의 승려 의정(義淨)이 691년에 저술한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는 641년부터 그가 저술할 때까지 약 50년 동안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난 57명의 승려 - 이 중에는 신라나 고구려의 승려들까지 포함 - 의 간략한 전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들 중에는 자신의 여행을 기록으로 남긴 이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나 그 대부분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대표적인 구법 여행기로는 5세기 법현(法顯)의 <불국기(佛國記)>, 6세기 혜생(惠生)의 <송운행기(宋雲行記)>를 필두로, 7세기에 들어와 현장의 『대당서역기』 이외에 의정(義淨)의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이 있고, 8세기에는 혜초(慧超)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과 오공(悟空)의 <오공입축기(悟空入竺記)> 등이 있다. 이 가운데에서 특히 신라 승 혜초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으며, 그가 남긴 <왕오천축국전>의 잔본(殘本)이 20세기 초에 둔황의 한 석실에서 프랑스 학자 헬리오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어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러한 여행기들은 모두 그것이 쓰인 시대의 서역 사정을 보여주는 더없이 귀중한 자료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대당서역기』는 그 분량이나 내용의 상세함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현장은 당시 구법승 중에서는 드물게 육로로 갔다가 육로로 귀환했기 때문에, 아시아의 내륙 지방에 대한 사정을 누구보다도 소상하게 전해주고 있다. 법현은 육로로 갔다가 해로로 돌아왔고, 혜초는 해로로 갔다가 육로로 돌아왔으며, 의정은 왕복 모두 해로를 택했었다. 해로에도 난파의 위험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육로보다는 비교적 시간적ㆍ육체적 소모가 덜했던 것이 사실이다. 현장이 사망한 뒤에 쓰인 그의 전기 <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慈恩寺三藏法師傳)>에는 중앙아시아의 사막을 지날 때 겪은 고초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막하연(莫賀延)이라는 사막에 도착했는데 길이가 800여 리(1리는 약 450m)이며, 옛날에는 모래 강, 즉 사하(沙河)라고 불렀다. 위에는 날아다니는 새도 없고 아래는 달리는 짐승도 보이지 않으며 물과 풀도 전혀 없었다. 이때는 나의 그림자만을 바라보며 오직 관음보살과 <반야심경>을 외웠다. ··· 백여 리를 가다가 길을 잃어 야마천(野馬泉)을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부대의 물을 따라 마시려고 했는데 그것이 무거워서 손을 놓쳐 엎어지고 말았으니, 천 리 길에 필요한 것이 일순간에 텅 비어 버리고 말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서 동쪽으로 발길을 돌려 제사봉(第四烽)으로 가려고 십여 리를 갔다. 그러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천축에 이르지 않으면 동쪽으로는 한 걸음도 되돌아가지 않겠다고 발원했었는데 지금 어찌하여 돌아가는가? 차라리 서쪽으로 가다가 죽을지언정 어찌 동쪽으로 돌아가 살겠는가!" 이에 고삐를 돌려 관음보살을 되뇌며 서북으로 전진했다.

『대당서역기』는 이처럼 현장의 초인적인 고난과 결단을 밑거름으로 해서 탄생한 위대한 작품이다. 그의 글은 6~7세기 아시아의 많은 지역에 대한 소중한 역사적 자료일 뿐만 아니라, 불법에 뜻을 둔 수많은 동방의 승려들에게 경탄과 도전의 원천이 되었다. 또한 그 속에 담긴 여러 지방의 다양한 민담과 설화는 일반 독서 대중들에게도 다른 세계에 대한 상상을 자극하여 새로운 문학적 창작으로 인도하는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를 다녀온 현장의 장거(壯擧)와 그 결과물인 『대당서역기』는 근대에 들어온 뒤로도 그 강렬한 생명력을 잃지 않았다. 『대당서역기』에 기록된 유명한 불교 유적지들은 오늘날 대부분이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거나 아니면 사막 속에 묻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20세기 초 영국의 위대한 탐험가이자 학자였던 오렐 스타인(Aurel Stein)은 『대당서역기』의 기록을 토대로 현장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이미 모래 아래로 사라져 버린 수많은 불사와 유물들을 다시 찾아낼 수 있었다. 지금도 현장의 길을 되밟으며 그 역사적 성취를 재음미해 보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대당서역기』가 지닌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입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