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 단편소설 『뇌물(El Soborno)』
아르헨티나 시인·소설가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1899~1986)의 단편소설로 국내에서는 1996년<이문열 세계명작산책> 6권에 게재되었으며, 1997년 [민음사]에서 간행된 <보르헤스 전집> 5권에 「매수」라는 제명으로 소개되었다. 환상적 사실주의로 흔히 정의되는 보르헤스의 문학 세계는 정통 사실주의가 갖는 협소한 상상력의 경계를 허문 것으로 평가되었다. [노벨 문학상]은 못 받았지만, 네루다, 마르케스, 파스 같은 중남미 출신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보다 선배격이다.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단편집 <낯선 순례자>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어느 날 낮잠을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 외쳤다.
'어떤 여자가 나에 대해서 꿈을 꾸는 꿈을 방금 꾸었다.' 콜롬비아 출신으로 역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 마르케스가 덤덤하게 받았다. '그건 이미 보르헤스가 쓴 이야기야. 아직 안 썼더라도 언젠가 쓸 것이 틀림없어.'
[노벨문학상]을 거머쥔 남미 문학의 두 대가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한 수 위'의 작가로 접어주고 들어가는 장면이다.
보르헤스는 1961년 사뮈엘 베케트와 함께 권위 있는 [포멘토상]을 받은 후, 그의 소설과 시는 점차' 20세기 세계문학의 고전'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이전까지 보르헤스는 자신의 고향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다른 작가들은 그를 단지 기교와 재주를 지닌 장인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다. 그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그가 '창조해낸' 악몽의 세계는 프란츠 카프카의 세계에 필적할 만한 것이라는 평을 받았고 일반적인 언어를 가장 지속성 있는 형태로 응축시킨 작가로 높이 평가되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배경은 1971년 미국 오스틴의 텍사스 대학이다. 능력 있는 영문학 교수인 아이슬란드 출신 에릭 에이나르손은 경력을 쌓고자 학술대회 대표로 꼭 참석하고 싶어 한다. 최대 경쟁자는 허버트 록크 교수다. 록크 교수는 모두가 인정하는 훌륭한 학자인 데다 학술대회 대표 추천에 가장 영향력이 큰 선임 교수와도 매우 가깝다. 궁리 끝에 에이나르손 교수는 선임 교수인 윈드롭에게 뇌물을 쓴다. 뇌물의 내용은 통렬한 논박이었다. 익명이지만 자신임을 알 수 있도록 쓴 논문을 통해 선임 교수의 교수법을 시대에 뒤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공격한 것이다.
얼핏 사리에 전혀 맞지 않을 것 같은 뇌물의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에이나르손은 대표로 뽑혔다. 그가 공격한 선임 교수의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임 교수 윈드롭은 처음부터 록크 교수를 추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에이나르손의 공격을 받고 난 뒤, 록크를 추천하면 에이나르손에게 보복했다는 평판을 받을 우려가 있었다. 선임 교수 윈드롭은 스스로 정직하고 곧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에이나르손이 학술대회로 떠나기 전, 자신을 찾아온 그에게 윈드롭이 말한다.
“우리 두 사람은 그리 서로 틀린 것 같지는 않소. 허영이라는 원죄가 우리를 뭉치게 해주고 있으니 말이오. 당신은 당신의 순진한 전략을 으스대기 위해 나를 찾아왔소. 그리고 나는 내가 정직한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 당신을 천거했으니까 말이오.”
보르헤스식 뇌물을 상상해 본다. 이런 식의 ‘뇌물’은 도덕적으로는 다소 비난받을 만한 수법일 수는 있다. 하지만 도덕과 정직으로 무장한 상대를 무너뜨리는 데는 최고의 뇌물이 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에이나르손 식의 뇌물은 공격이었다. 뇌물은 어떤 직위에 있는 사람을 매수하여 사사로운 일에 이용하기 위해 넌지시 건네는 부정한 돈 또는 물건을 의미한다. 보르헤스식 뇌물은 우리의 고정관념의 틀을 벗어난 것이었다. 공개적인 논박이 도덕과 정직으로 무장한 상대를 무너뜨리는 최고의 뇌물이었기 때문이다.
에이나르손은 윈드롭의 공정하고자 하는 욕구를 이용해서 상대를 자기 뜻대로 움직였다. 이때 부탁하는 자가 오히려 공격할 상황 그리고 공격을 받고도 그를 추천한 상황은 극적인 아이러니이다. 이 상황적 아이러니로 독자에게 해학을 준다. 이 또한 우리의 고정관념과 어긋나는 역발상이다.
♣
(전략) 반드시 호의를 구해야 할 사람을 오히려 공격하는 일은 우리의 예상을 뒤엎는다. 그런데 다시 절대적 시혜의 권한을 가진 사람이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어 또 한 번 독자의 예상을 뒤엎는다. 공격이, 실은 호의를 구하는 뇌물이 된 셈이다.
두 사람의 정신적인 승패도 그렇다. ‘공정해지려고 노력하는 이상한 미국적 열정’을 약점으로 노려 그의 호의를 얻어낸 에이나르손의 승리는 상식을 뒤엎는 것이었다. 그러나 윈드롭은 ‘허영’이라는 원죄를 찾아내어 그 승리를 지워버리고 만다. 뒤집기의 뒤집기는 거기서도 일어난다.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6권 317쪽에서 인용)
결국, 작가는 윤리와 도덕, 진정한 학문의 가치를 풍자하고 있다. 이 작품이 선사하는 마지막 반전은 소설에 등장하는 작품들은 작가가 창조해 낸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거짓작품들이라는 사실이다. 독자들은 자칫하면 이 소설 속에 연구자들이 발표한 청교도 사상과 유럽 속의 영어 작품에 얽매여 그것을 조사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된다면 소설 전체의 흐름을 놓치고 개별 사항에 얽매여 전체적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그의 문학적 상상력과 독특한 발상과 주제를 통해 독자들에게 새로운 문학체험을 제공한다. 뒤집고 뒤집히는 반전 속에서 독자는 인간관계와 뇌물에 관한 역발상, 인간 본연의 허영심과 과시욕, 그리고 개인 간의 경쟁의식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외국 현대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G. G. 마르케스 단편소설 『눈 속에서 흘린 피의 흔적(El rastro de tu sangre en la nieve)』 (0) | 2020.02.17 |
---|---|
서머싯 몸 단편소설 『레드(Red)』 (0) | 2020.02.10 |
안톤 체호프 단편소설 『골짜기(долина)』 (0) | 2020.01.27 |
헤르만 헤세 단편소설 『험한 길(Ein Schmerzhafter Weg)』 (0) | 2020.01.24 |
투르게네프 단편소설 『산 송장(живые мертвецы)』 (0) | 2020.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