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체호프 단편소설 『골짜기(долина)』
러시아 소설가 안톤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 1860∼1904) )의 단편소설로 1899년 발표되었다. 체호프의 작품은 무려 3백 편이 넘는다. 장편소설을 특징으로 삼는 러시아 문학계에서 체호프는 거의 유일한 단편 작가이며, 단편의 형식과 취재에 있어서 이룬 그의 공적은 그가 러시아의 모파상이라는 칭호를 받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극작에 있어서 새로운 수법, 이른바 기분극 창출은 세계문학사상 의의가 크다.
당대의 문호였던 투르게네프나 도스토옙스키는 체호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나, 톨스토이는 ‘마치 보옥같이 순수한 러시아인의 작가’로서 사랑하였고, ‘이 진주 같은 작품을 보라, 나는 마침내 그를 따를 수 없다.’라고 절찬했다. 이처럼 두 사람 사이의 우정은 다른 어떤 작가들 사이에도 찾기 드물 정도로 아름답고 정다웠다.
체호프의 작품은 주로 유머를 기조로 한 콩트이며, 우습고 유쾌한 것이 많으나 점차로 날카롭고 진지한 것이 되어 그대로 웃어넘길 수 없는 내용이 많다. 주제는 주로 1880년대 침체시대에서 러시아 지식계급에 관한 절망적이고도 본질적인 해부의 성격을 가진 내용이다. 그는 지식층을 평범하고 메마른 환경과 싸우면서 무력하게 무너져내려 멸망해 가는 계급으로 규정한다. 그들이 무지한 대중에게 이해되지 못하고, 예민하고, 분노하고, 고투하고, 절망하여 미친 사람처럼 되어가는 광경이 그 밑바닥에 일종의 애수를 띤 따뜻하고 보드랍고 세련된 익살에 의하여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 러시아 문단의 반향은 대단한 것이었다. 어떤 잡지 편집자와 평론가는 울며 읽었다고 표현했고, 톨스토이와 고리끼를 비롯한 당대의 문호들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 역시 작가가 삶의 어두운 진상을 냉정히 그려내어서라기보다는 끊임없이 패배하면서도 절망하지 않는 선이 준 감동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이문열 세계문학산책> 5권 83~3쪽에서 인용함)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배경은 18세기 말엽으로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듯한 러시아 골짜기 마을 우클레예보이다. 발전은 더디고 낡고 오랜 공장이 몇 채 있을 뿐 사람 살기가 고단한 그곳 마을에서 유일하게 번성한 곳은 그리고리 영감이 운영하는 식료품점이다. 그가 만든 부의 원천은 질 나쁜 고기나 보드카를 속여서 팔거나 고리대금업을 하거나 뭔가 뒤가 구리는 방법으로 돈을 축적한 것이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장남은 경찰인데 아직 결혼하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귀머거리다. 결혼한 둘째 아들에게는 시아버지 그리고리 못지않게 돈 버는 재주가 뛰어난 아름다운 아내 악시냐가 있다.
그리고리 영감에게는 재혼한 젊은 아내가 있고 장남까지 착한 아내를 맞게 되어 더없이 행복해지려는 즈음에 집안은 균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경찰인 장남이 은화를 위조한 혐의로 감옥에 갇히고 결국에는 시베리아행을 선고받는다. 그 사이 맏며느리는 아들을 낳는다. 그리고리 영감은 재혼한 아내의 제안에 따라 둘째 며느리 악시냐가 노리던 땅을 갓난아기에게 물려준다.
그 사실을 알고 격분한 둘째 며느리 악시냐는 식구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펄펄 끓는 물을 아기에게 뒤집어씌워 죽게 만든다. 하지만 그리고리 영감은 장남이 위조한 은화를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은화와 섞어서 유통한 바람에 둘째 며느리에게 꼬투리를 잡혀 그녀를 벌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재산을 전부 빼앗긴다. 이후 그리고리는 버려져서 굶주리는 신세가 되고 맏며느리 리파는 손아래동서에게 집안에서 쫓겨난다.
어느 날 길에서 노인과 스쳐 지나가게 된 큰 며느리 리파는 “안녕하세요. 아버님.” 하며 인사를 한다. 노인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의 입술이 떨리고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리파는 고기만두를 꺼내 노인에게 주었다. 노인은 그것을 받아먹기 시작했다. 해는 아주 완벽히 넘어가 버려 길 위쪽을 비추고 있던 빛까지도 이미 사라져버렸다. 주위에는 어둠이 깃들고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맏며느리와 그녀의 엄마는 노인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기면서 오래도록 성호를 그었다.
이 작품 『골짜기』는 체호프의 작품치고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우클레예보라는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 여인의 변모해 가는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체호프의 내면에 다름 아닌 러시아 농민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리고리 노인과 가족들에게 변화와 번성을 가능하게 한 부는 기실 자질구레한 죄업의 과일이었다. 장사에서의 이런저런 속임수와 그에 따른 폭리에 고리대금이 그 죄업의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죄업은 이제 그들 집안의 표면적인 번성과는 또 다른 이면을 준비하고 있었다.
먼저 그리고리 일가에 타격을 준 것은 맏아들 이니심의 범죄였다. 그가 주화를 위조해 사용한 죄가로 시베리아 유형을 떠나자 그렇게 탐욕스럽던 노인의 기력은 절반이나 꺾여버린다. 거기다가 위조한 주화를 아들로부터 얻어 자신의 주화와 섞어버린 일은 그의 또 다른 약점이 되어 집안의 주도권은 영악한 둘째 며느리 악시냐에게 넘어가 버린다.
♣
(전략)악시냐는 젊은 날의 그리고리보다 몇 배나 탐욕스럽고 간교할 뿐만 아니라 표독스럽기까지 하다. 그녀는 뜨거운 물을 끼얹어 재산상속의 경쟁자가 될 아니심의 어린 아들을 죽이고 그 명백한 살인행위를 그리고리의 약점과 가족들의 무지를 이용해 덮어버린다. 그뿐만 아니라 손윗동서인 리파를 내쫓고 그리고리 일가의 전 재산을 차지한 뒤 시아버지를 돌보지 않았다.
결국, 번성하던 그리고리 일가의 구성원들은 일꾼이나 다름없이 악시냐에게 붙어사는 귀머거리 남편 스테판을 제외하면 모두가 헐벗고 황폐한 세상으로 되밀려난 셈이다. 골짜기 마을에서 예외적이었던 그리고리 일가의 번성은 영악하고 표독스러운 악시냐의 독차지가 되었다. 웃고 있는 것은 예쁜 얼굴에 곱게 차려입은 작은 악마뿐이다. (<이문열 세계문학산책> 5권 82쪽에서 인용)
굶주린 노인에게 만두 하나를 건네는 이는 아기를 잃고 집에서 쫓겨난 첫째 며느리뿐이다. 가난한 가운데서도 선량한 마음을 간직한 그녀의 행동은 그래도 아직 세상에 희망이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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