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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현대소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단편소설 『코(鼻)』

by 언덕에서 2019. 5. 20.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단편소설 () 

 

 

일본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1892∼1927)의 단편소설로 19162월 제4[신사조(新思潮)] 창간호에 발표하였다. 같은 해 5[신소설(新小說)]에 실리면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문단 데뷔작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케노오에 사는 승려 젠치 나이구는 보통 사람과는 달리 코가 아주 길었다. 대여섯 치나 되는 긴 코 때문에 밥도 혼자서 먹을 수 없고 사람들에게 늘 웃음거리가 되었다. 늘 열등감에 시달리던 중 코를 작게 줄이는 데 성공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오히려 비웃음과 냉소를 보냈다. 겨우 불행에서 벗어난 자신을 다시 불행에 빠뜨리고 싶어 하는 주변 사람들의 이기주의를 깨달은 나이구는 매일 코가 짧아진 것을 원망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어느 날 아침 코가 하룻밤 사이에 옛날의 긴 코로 돌아오자 나이구는 이제 비웃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며 안도하게 된다는 이 작품은 해학과 익살을 담은 설화 <이케노오 젠치 나이구(池尾禪珍內供) 코 이야기>가 원작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 芥川龍之介, 1892&sim;1927 )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젠치(禪智) 스님은 나이구(內供)이다. 여기서 나이구란 궁중 내도량에서 왕족의 건강을 기원하는 독경을 읊는 소임을 맡은 스님을 일컫는다. 그런데 젠치 스님은 그 지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인이다. 이유인즉슨 대여섯 치의 길이에 윗입술의 위에서 턱 밑까지 축 늘어져 있는 코를 지녔기 때문이다. 젠치 스님의 코는 가늘고 긴 순대 비슷한 물건이 턱 하니 얼굴 한가운데 매달려 있는 것과 같은 꼴이다.

  쉰 살이 넘은 젠치 스님은 속으로만 자신의 큰 코를 걱정해야 했다. 대놓고 코 걱정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온 마음을 다해 정토를 동경해야 할승려 신분에 자신의 흉물스러운 코나 걱정하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젠치 스님은 대화 중에 코라는 말만 나와도 소스라치게 놀랄 지경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젠치 스님이 속인이 아닌 승려 신분인 것을 외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코를 가지고는 장가조차 가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개중에는 코가 그 모양이어서 출가했을 것이라고 폄훼하는 이까지 있을 정도였다.

  젠치 스님은 자신의 코를 실제보다 짧게 보일 수 없는지 거울 앞에 서서 이런저런 행동을 취해봤지만 허사였다. 또한, 젠치 스님은 혹시나 자신과 같은 큰 코를 가진 사람이 있는지 만나는 사람마다 살폈다. 물론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젠치 스님은 불경 속에서 자신과 같은 코를 지닌 이가 있었는지 살폈지만, 이 역시 허사였다.

  어느 날, 젠치 스님의 심부름으로 교토에 다녀온 제자가 의사에게서 코를 짧게 만드는 방법을 배워온다. 젠치 스님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넌지시 얘기를 꺼내고, 제자승은 그런 스님을 위해 의사에게 배운 방법대로 시술한다. 시술이라고 해봐야 큰 코를 뜨거운 물에 담근 뒤 발로 밟는 게 전부인데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코가 짧아져서 평범한 인상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스님을 보고서 사람들이 곧잘 비웃는다.

 이후, 작아진 코가 다시 원래대로 커지자 젠치 스님은 아쉬워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아무도 비웃는 사람은 없을 거야.’라고 자위한다소설은 젠치 스님이 기다란 코를 새벽녘 가을 찬바람에 덜렁거리면서 끝이 난다. 

 

 

  “예전엔 저렇게 대놓고 웃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코가 짧아져서 평범한 인상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스님을 보고 곧잘 비웃는다. 이유가 뭘까? 평범함에도 오히려 약을 올리는 사람들이 생겨난 이유는 무엇일까? 이전에는 적어도 뒤에서 수군거릴망정, 이렇게 앞에서 웃지는 않았다. 왜일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인간의 마음에는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감정이 있다. 물론 타인의 불행에 동정하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 불행에서 어찌어찌 빠져나오게 되면 이번에는 이쪽에서 뭔가 부족한 듯한 심정이 된다. 조금 과장해 보자면, 다시 한번 그 사람을 같은 불행에 빠뜨려 보고 싶다는 생각조차 든다. 그리하여 어느 틈엔가 소극적이기는 해도, 그 사람에 대해 일종의 적의를 품게 된다.”

  그러니까 큰 코를 지녔을 때는 비록 흉한 인상이었어도 보는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유발했던 반면, 코가 작아져서 평범한 인상이 되자 사람들은 일종의 적의를 품게 된다는 것이다.

 

 

  길고 붉은 코를 부끄러워한 젠치 나이구는 치료를 받아 간신히 코를 낮추었는데 그러고 나니, 사람들이 더욱 비웃었고, 그래서 도로 제대로 길게 할 수 없을까 해서 고민한다. 어느 날 잠이 깨니 코가 그 전대로 길어진 것을 발견하고, 이제는 아무도 비웃지 않으리라고 중얼거렸다는 줄거리의 이 소설은 인간의 이기심과 위선을 폭로한다.

  이 소설은 가벼운 필치로 인간 심리의 명암을 섬세하게 써 내려 가면서 주인공 젠치 나이구의 위선과 허영을 해학적으로 풍자하고, 다른 사람의 불행을 기뻐하는 방관자의 이기심을 폭로한 작품이다. 인간의 만족도, 불만족도 모두 세상과 대면했을 때 발생하는 것으로 자기 내부에서 자연스레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세상과 세상의 평가에 마음이 흔들리고 자기를 파악하는 힘이 약해진다는 사실이 이 작품에서 작가가 바라보는 인간 본연의 모습이다. 인생에 대한 회의와 마음을 열어 따뜻한 애정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이기적인 인간성에 대한 체념이 흐르고 있는 작가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