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마바위 전설
치마 모양의 바위나 여성의 생산성을 상징하는 바위에 얽힌 전설로 바위에 얽힌 이야기는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지역별로 주술적 행위와 의례의 대상이 되는 성스러운 바위의 내력에 관한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반정으로 생이별해야 했던 중종과 폐비 신씨에 얽힌 역사적인 성격의 이야기다. 전자는 거석신앙(巨石信仰)의 대상물에 해당하는 바위 내력이나 마을공동체의 자연 우주가 형성된 내력을 설명하는 이야기나 후자는 역사적 사건과 결부된 인물 전설의 증거물 성격이라는 점에서 신화적 성격이 강하다. 치마바위에 관한 설화는 다양하나 대략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치마 모양의 바위에서 기도하고 아들을 낳았거나 그 아들이 힘을 확인했다는 이야기이다. 또는 치마 모양의 바위는 장군이나 장수, 대지모신의 자취가 있는 곳으로 마을 사람들이 여기에서 산신제나 기우제를 올리기도 한다.
두 번째는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이 공신들의 요구를 이기지 못하고 왕비 단경왕후를 폐위시킨 후 10년 이상 부부로 지낸 왕비를 그리워하였다. 이를 안 폐비 신씨(단경왕후)가 자신이 궁에서 입던 치마를 매일같이 인왕산 바위에 펼쳐 놓았다는 이야기이다. 이 바위를 ‘치마바위’라고 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조선 명종 때 오십이 다 되도록 자식이 없는 노부부가 살았다. 부부간의 금실은 지극히 좋았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으니 남에게 말 못 할 한이었다. 부부는 함께 옹성산에 올라 성심으로 기도하였다. 이렇게 정성을 다한 지 백일이 되어서 옹성산 산신이 꿈에 나타났다.
“너희 정성이 지극하여 남매를 주노니 모후산을 찾아가 다시 십 일기도를 드려 현몽을 얻어라!”
노부부는 모후산 상봉을 찾아가 단을 만들고 열흘간의 기도를 정성껏 올렸다. 이윽고 그날 밤 꿈에 모후산 산신이 나타났다.
“옹성 상 산신이 남매를 주었으니 나는 두 남매에게 금강역사의 힘을 나누어 주겠노라.”
꿈을 깬 노부부는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집으로 돌아오니 잉태가 되어 남매를 낳았다. 금은 보옥처럼 애지중지 남매를 길렀다. 매일 하루하루가 즐겁기 짝이 없었다. 과연 모후산 산신령님이 말과 같이 남매가 10여 세가 되니 힘이 장사였다. 고을에서 열리는 씨름판에 나가면 번번이 황소를 타왔다. 사냥꾼들도 지리산으로 멧돼지사냥이나 곰사냥을 가게 되면 이 어린 장사들을 항상 데리고 가곤 하였다.
세월이 흘러 소년장사는 어느덧 이십 세가 되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양 겨드랑 밑에서 날개깃이 돋아나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누이동생이 오빠에게 말하기를
“오빠와 저는 산신령님의 힘으로 태어났다고 하니 우리의 힘을 시험하여 봅시다. 저 산 위에서 바위를 한 덩이 던져 보십시오. 제가 받아 보겠습니다.”
두 남매는 약속을 한 후, 오빠는 산 위로 올라가고 누이동생은 산 아래에서 기다렸다. 이윽고 오빠가 엄청나게 큰 바위를 산 위에서 누이동생을 향해 던졌다. 동생은 앞가슴과 치마를 벌려 의연히 바위를 받아 땅에 놓았다. 산에서 내려다보던 오빠와 아래 있던 동생은 자신들의 괴력에 대해 용기가 생겼으나 세상 사람들에게는 숨기기로 하고 부모님께만 말했다.
그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곳곳에서 뜻있는 지사들이 의병을 모집하였다. 어린 남매도 의분을 참지 못하고 의병의 막하에 자원 종군하였는데 누이동생은 남장하고 오빠를 따라 출가하였다. 출전 후에 가는 곳마다 용맹을 과시하기 시작하였다. 남들에게는 형제라고 속여 잠자리도 항상 오빠와 같이하면서 일거일동을 함께 하였으므로 어느 전투에서도 남매의 용맹에는 가히 따를 사람이 없었다. 진중에서 제일 큰 창과 칼, 그리고 제일 무겁고 장엄한 갑옷을 두 장사에게 주어 선두에서 싸우도록 하였다. 남매가 가는 곳은 항상 승리뿐이니 그 인기와 환영의 대접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진중에서 몇몇 사람들이 이 두 사람의 행적을 수상히 여겨 밤마다 살피게 되었다. 두 남매가 깊이 잠든 어느 날 밤, 한사람이 조심스럽게 이들의 상의를 벗겨보니, 이게 웬일인가? 형의 양 겨드랑이에는 날개깃이 나 있고 아우는 백옥처럼 곱고 비단결같이 부드러운 살결의 꽃다운 처녀였다. 깜짝 놀란 그 사람은 옆에 잠든 친구들을 가만히 깨워 모두에게 보였다.
보는 사람마다 놀라운 사실에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 날개가 자라면 장차 날아다니는 장수가 된다는데….”
그중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고 가장 큰 깃털 두 개를 뽑아버리고 모두 도망해 버렸다. 주위의 소란스러움에 잠이 깬 청년 장사는 매우 놀랐다. 누이동생을 급히 깨워 이 비밀이 세상에 누설될까 두려워 고향으로 급히 돌아갔다. 남매는 그때 사용하던 창과 칼, 갑옷 등을 모두 옹성산 바위틈에 감추어 두고 집으로 돌아가 보니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빈집만 남아 있어 쓸쓸함과 서글픔만 더 해 주었다. 겨드랑이의 깃을 잃어버린 오빠가 점점 힘이 없어져 몇 년 만에 아까운 생애를 끝내 버리자 홀로 남은 여동생은 인생무상을 통감하고 지리산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어 부모와 오빠의 왕생극락을 축원했다.
그 뒤부터 오빠가 던졌던 바위를 치마로 받았다 하여 〈치마바위〉라 부른다. 산속 어디엔가 있을 철갑과 창칼은 찾을 길 없고 인적 없는 곳에 쓸쓸히 바위만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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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남산리의 치마바위는 마을 사람들이 산신제나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성이 치마바위 앞에 있는 돌을 던져 그 돌이 바위 위에 자리를 잡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한다. 이 바위 위에는 장수가 오줌을 눈 자국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바위 위에서 발을 굴리면 속이 빈 것처럼 “텅텅” 하고 울리는 소리가 난다고 한다.
한편,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상리의 치마바위에는 동네 여자가 ‘들망질’을 하다가 이무기를 만났는데, 이무기가 여자를 잡으려고 치마를 물었으나 치맛자락만 잘리고 여자는 살아남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때 벼락이 쳐서 이무기는 두 동강 났는데, 마을 사람들은 하늘이 천지조화를 부려 사람을 살렸다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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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치마바위는 중종의 첫 번째 부인인 단경왕후 신씨와 관련된 내용이다. 조선조 16C 초에 연산군의 실정으로 중종반정(1506)이 일어나 중종이 등극하게 되었다. 이때 중종의 비는 신수근의 딸 신씨였는데, 당시 국구(國舅)였던 신수근은 중종반정 때 죽임을 당했다. 반정 공신들은 죄인 신수근의 딸을 왕비로 삼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종묘사직의 대계를 위하여 왕비의 폐위를 수차 요청하였고, 이에 중종도 어쩔 수 없이 왕비 신씨를 폐하여 친정으로 보냈다. 그러나 십여 년 동안 부부의 정을 잊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왕은 가끔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 기슭 신씨 집을 멀리 바라보곤 했다.
중종이 늘 경회루에 올라 자기 집을 바라본다는 소문을 듣고 신씨는 대궐 안에서 입던 치마를 눈에 잘 뜨이도록 인왕산 높은 바위에다 걸었는데, 아침에 내다 걸고, 저녁에는 거둬들였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뒷날 사람들이 이 바위를‘치마바위’라 불렀다. 인왕산 치마바위 전설은 600년 이상 도읍지였던 서울의 서악(西岳)에 해당하는 인왕산을 대표하는 역사적 전설이라 부를 만하다. 서울에는 치마 바위, 세검정 등 반정을 둘러싼 일화와 연계된 공간이 여러 곳 있는데, 반정이야말로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역사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부류의 <치마바위 전설>은 모두 대지모의 흔적을 담은 신화적 공간 내지는 장수, 이무기 등 성스러운 대상과 연계된 공간의 내력을 풀어내는 이야기로 전승된다. 한국의 거석 신앙이나 이와 연관된 이야기 전승에 관한 전통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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