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십(말씹)굴 전설
황해도 수안군에 있는 마십굴의 유래에 얽힌 전설로 지배층에 대한 저항의식이 잘 표현된 이야기다. 북한에서 민간 전설의 대표작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인상적인 서사와 캐릭터가 큰 감명과 여운을 전해 준다.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대립, 선과 악의 어긋남, 자연의 신비와 경이, 아름답고 슬픈 사랑과 같은 여러 서사요소가 긴밀하게 잘 짜인 전설로 문학적 가치가 높다.
전설의 주인공 이름은 ‘말십’이라고도 하며 ‘말씹’이라 되어 있는 자료도 있다. 원님 아들이 불을 피우나 물에 휩쓸려 죽었다고 하는 대신 사람들과 함께 마십을 뒤쫓다 굴이 무너져 죽었다고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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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수안에 마십이라는 가난한 나무꾼이 예쁘고 마음 착한 아내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나무를 하러 갔던 마십은 웬 젊은 사냥꾼이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 둘러업고 내려왔다. 부부의 정성스러운 구완에 되살아난 청년은 고을 원님의 아들이었다. 청년은 부부가 자기를 살려 준 은혜를 잊고, 마십 아내의 미모를 탐내서 유혹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거부하자 장정을 데리고 와서 그녀를 강제로 가마에 태워 납치했다. 원님 아들은 마십에게 벼랑을 가리키며 거기 50리 굴을 뚫으면 여자를 돌려주겠다고 하였다. 마십은 그날부터 망치와 끌로 바위를 뚫기 시작했다. 백 일째 되던 날, 갑자기 바위가 뻥 뚫리며 굴이 나타났다.
안에 50리나 되는 굴이 있었다. 마십이 굴로 들어가 맞은편으로 나와 보니 그곳은 원님 집 뒤뜰이었다. 마십은 아내를 데리고 굴로 도망쳤다. 원님 아들이 사람을 보내 마십을 쫓게 했으나 굴이 무너져 사람들이 깔렸다. 원님 아들은 급히 굴 반대편으로 와서는 입구에 불을 질러 굴속으로 연기를 피워 보냈다. 하지만 사람 대신 물이 쏟아져 나와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그 뒤로 마십 내외를 본 사람은 없다고 한다. 마십의 굴에서는 지금도 맑은 물이 흘러나오며, 바위에는 마십이 그어 놓은 백 개의 금이 남아 있다고 전한다.
전해지는 다른 이야기로는 수안 군수가 사냥을 나갔다가 한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는데, 여인을 자기의 노리개로 삼으려고 생각한 군수는 아전들에게 명하여 다짜고짜로 관가로 끌어오게 하였다. 그러나 여인은 결사 항거하면서 군수의 요구를 끝까지 거절하였다. 한편 여인의 남편인 마십은 관가로 찾아와 자기의 아내를 당장 내놓으라고 주장했는데, 군수는 여인이 자기에게 불손한 언동을 하였으니 죄를 씻으려면 10년 세월 관가의 노비로 있어야 한다면서 마십에게 매를 때려 내쫓았다. 자기의 아내를 끝까지 구원하리라 마음먹은 마십은 관가 뒷산의 절벽 아래에 구멍을 뚫고 들어가 아내를 구출하였다. 그 후 사람들은 이 굴을 마십이가 뚫은 굴이라 하여 마십굴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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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연구자들은 이 설화를 백성의 어진 품성과 대비되는 지배층의 죄악상을 폭로하고 그에 대한 투쟁의식을 표현한 전설로 평가해 왔다. 마십과 원님 아들의 선명한 선악 대비는 그러한 해석을 뒷받침하는 요소가 된다. 바보로 불리던 마십이 우직한 노력으로 바위에 굴을 뚫었다는 것은 전설적 경이를 잘 보여 준다. 또한 마십 부부가 끝내 굴속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짙은 여운을 남기면서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비판의식을 부각시킨다.
마십굴은 황해도 수안군 성동면 도화리에 있는데, 오늘날에도 마십이 판 굴 앞에는 시내가 흐르고 있으며 그 시냇물은 동굴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고 전한다. 이 동굴을 마십굴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아직도 그 동굴 입구에는 마십이 그어놓은 백 개의 금이 뚜렷이 남아 있다고 한다. 마십굴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 한복판에 있으며 높이 30척가량이나 5.6 간 정도 들어가면 허리를 굽혀야 하고 20여 간 정도 더 들어가서는 너무 좁아 기동할 수 없다고 하며 길이는 약 5십 리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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