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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朋滿座

안셀름 그륀 수상록 『딱! 알맞게 살아가는 법』

by 언덕에서 2018. 6. 20.

 

 

안셀름 그륀 수상록 『딱! 알맞게 살아가는 법』

 

 

 

 

시발 비용이라는 말이 있다. 시발 비용은 비속어인 시발비용을 합친 단어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으면 발생하지 않았을 비용을 뜻하는 신조어이다. 이를 테면 스트레스를 받아 홧김에 고급 미용실에서 파머하거나 평소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하던 길을 택시를 타고 이동하여 지출하게 된 비용이 해당된다.

 이렇게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쓰인 시발 비용은 탕진잼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탕진잼은 다 써서 없애버리는 것을 뜻하는 탕진과 재미의 을 붙여 만든 신조어로 저가의 생활용품이나 화장품 구입, 디저트 카페에서 작은 사치 누리기 등 일상생활에서 돈을 낭비하듯 쓰며 소비의 재미를 추구하는 것을 행태를 일컫는다.

 이 책에는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는 삶의 균형 잡기’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가톨릭 영성가인 안셀름 그륀 신부(1945~ )는 독일 성(聖) 베네딕도회 뮌스터슈바르차흐 대수도원의 재정 담당자로 40년 가까이 일했다. 기부금과 수도사들이 만든 물건 판매 수익과 자신의 저서 인세와 강연료 등 수도원의 모든 수입과 지출을 챙기고 은행을 상대하는 자리다. 그는 이 업무를 위해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기도 했다. 항상 각종 청구서와 영수증 더미와 씨름하며 살아온 그가 '21세기 영성가'로 꼽힌다는 점은 일반인의 눈으로 보면 신기한 일이다.

 

 

안셀름 그륀 신부(1945~ )

 

 


 

 우리는 중용이라는 말을 들으면 유교에서 말하는 중용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중용은 베네딕토 성인의 『수도 규칙서』에 바탕을 둔 중용이다. 베네딕토 성인의 『수도 규칙서』는 균형과 중용, 합리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래서 중세에 세워진 대부분의 수도회는 이 규칙서의 정신을 본받아 세워졌다. 그 결과 『수도 규칙서』는 서방 그리스도교의 가장 영향력 있는 책이 되었으며, 서방 수도 생활의 초석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 영성과 서유럽 문화 진흥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수도 규칙서』에서 베네딕토 성인은 노동과 기도, 활동과 잠, 독서·묵상·공동 식사에 적정 시간을 배분하여 수도 생활의 기틀을 마련하는 지혜를 보였습니다. 이는 오늘날 인기를 끌고 있는 시간 관리에 관한 강좌나 실용서와는 다른 것입니다. 이러한 강좌나 실용서는 주어진 시간에 얼마나 일을 더 할 수 있는지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시간을 일로만 꽉 채우려고 하지요. 이렇게 시간을 관리하려는 사람들은 시간을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듯합니다. 그러나 저는 시간을 친구로 여기며, 시간을 주의 깊게 다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용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중에서

 

 이 책에서 저는 수시로 베네딕토 성인의 『수도 규칙서』를 인용했습니다. 베네딕토 성인은 슬기로운 절제는 모든 덕행의 어머니라고 했으며, ‘중용을 『수도 규칙서』의 일관된 정신으로 삼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의 『수도 규칙서』는 당대의 다른 많은 수도 생활 규칙들을 제치고, 중세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영향력 있는 수도 생활의 지침이 되었지요. 베네딕토 성인이 살던 시대는 무절제와 옛 질서의 몰락이 두드러진 시기였습니다. 민족들의 대이동으로 인해 로마 문화의 모든 척도가 뒤바뀌었지요. 그런 속에서 베네딕토 성인은 마치 폭풍을 견뎌 내는 나무처럼 당대의 혼란에도 꿋꿋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수도 공동체를 건립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중용질서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지요.

맺음말중에서

 

 이러한 『수도 규칙서』에서 찾은 중용이라는 삶의 지혜를 우리에게 전하는 이 책에도 서유럽 문화의 근간을 이룬 수천 년간 내려온 조언들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러한 조언들은 우리 삶을 세밀하게 관찰한 것들이기에 누구나 알아듣기 쉽다.

 

 어떤 사람이 도가 깊은 선승에게 영성 수련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승이 답했습니다. “앉아 있을 때에는 앉아 있고, 서 있을 때에는 서 있으며, 길을 걸을 때에는 걸으면 되지요.”

 이 말을 듣고 질문을 던진 사람이 항의했습니다. “그건 모두가 하는 일이라 특별할 게 없잖아요.”

 선승은 다시 말했습니다. “아니,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앉아 있으면서도 서 있을 때를 생각하고, 서 있을 때에는 벌써 걸을 것을 생각하지요. 길을 걸을 때에는 직장 일이나 식사 등 다른 일을 생각하고요.”

중용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중에서

 

 그륀 신부가 중용을 강조하는 것은 영성생활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영성 수련이란 탈속한 사람들의 특별한 일이 아니라, 누구나 일상생활 가운데 실천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영성생활'을 '항상 선행하고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자신의 결점을 극복해가는 것'이라고 정의하지 말라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어렵고 부담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주의를 기울이는 노력'이라고 생각하라고 권한다. 그래야 실천하기도 쉽고 즐겁고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주의 기울이기'는 이렇게 설명한다. "내 안의 두려움 시기 질투 무절제 슬픔을 들여다보고, 그 모든 감정을 두루 지나 영혼의 밑바닥에 이른다. 그렇게 들여다보면 내적인 공허감을 돈·재산·존경·인정·성공·명예 같은 외적인 것들로 채우려는 노력도 멈추게 된다."
 그는 '주의 기울이기' 노력을 일상에서 실천한다. 가령 수도원 가구가 낡아 새것으로 바꿔야 할 경우, 싼 제품을 구입할 것인지 돈은 더 들더라도 수도원에서 직접 만들어 쓸 것인지 결정해야 할 때에도 적용한다. 수도사들과의 토론 끝에 직접 만들어 쓰기로 결정하고는 "길게 보면 그게 더 싸고, 지구를 위하는 길"이라고 한다.
 극단의 함성이 높고 '중도'와 '중용'이 매도당하는 시대, 그래서 더욱 '슬기로운 절제' '알맞게'의 정신이 귀하게 여겨진다.

 

 

 이 책에서 설명하는 이야기들은 이제까지 자기 계발서에 나오는 실천법과 사뭇 다르다. 그동안 우리가 읽어 온 책들에서는 주어진 시간에 얼마나 일을 더 할 수 있는지에만 관심을 기울여 왔다. 하지만 이 책은 해야 할 일로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전적으로 현존하는 방법을 알려 준다. 즉,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주는 압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고 온전한 자기가 되는 법을 가르쳐 준다. 이러한 중용을 실천하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꼭 알맞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고, 우리가 마주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가르쳐 줄 수 있도록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꿔 주는 계기가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