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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朋滿座

읽기 민망했던 책『사랑은 언제나 서툴다』

by 언덕에서 2018. 3. 7.

 

읽기 민망했던 책 『사랑은 언제나 서툴다』 

 

 

 

 

 ※ 제가 이 책을 읽고 느낀 내용을 포스팅한 것은 2013년 8월 29일입니다. 블로그를 통해 알게된 분이 그해 8월 중순에 위의 책을 보내주셔서 읽게 되었습니다. 그분께도 이야기했고, 블로그에도 썼지만 읽기가 거북한 책이었어요. 요즘 신문이나 뉴스를 장식하는 'me too'에 관한 기사를 보면서 이 책을 읽은 기억을 돌이켜 보게 되었습니다. 노벨문학상 후보가 되곤 하던 유명 시인, 연극계를 대표하는 연극인, 당대 최고의 극작가, 검찰 간부, 가톨릭 사제, 국제적인 영화감독, 이름만 대면 아는 영화배우, 대학교수 등이 저지른 성폭력에서 이제는 차기 대통령감이라는 이까지 성폭력 가해자로 등장하는 현실은 우리 사회 전반의 도덕의식이 어디까지 와 있는 건지를 깨닫게 만듭니다.

 이 책의 저자는 '서툰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는 어떨까 하고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위에 거론한 이들도 권력을 가졌던 자신이 뭔가를 서툴게 표현했을 뿐이라고 말하겠지요. 남이 그러면 스토킹이나 성폭력이고, 자신이 하면 서투른 사랑이고...
 당시 올렸던 포스팅을 다시 게재합니다.

 


 

 

 

 

 

 

지인으로부터 책을 한 권 선물 받았다. 신문의 지면에서 자주 대하던 시인의 시를 곁들인 에세이집이다. 제목은 『사랑은 언제나 서툴다』……. '나이 많은 시인인 저자'가 '부하직원인 젊은 아가씨'를 사랑한다는 내용이다. 만년의 괴테도 그랬다. 박범신의 '은교'라는 소설의 내용도 그렇다. 책을 보내신 분의 정성을 생각해서 대단히 조심스레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어느 날 홀연, 잔잔한 일상에 찾아 온 한 잎의 사랑, 그 하늘거리는 사랑에 겨워 몰래 가슴 적시는 시인, 이 책은 나태주 시인의 자전 에세이이다. - 표지  

 충분히 안 쓰고 넘어가도 좋을 문제를 가지고 글을 써보려고 한다. 차라리 덮어버리고 넘어가는 편이 여러 가지로 이로운 일일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위태롭기까지 한 이야기들,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남자와 여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 10쪽

 

 

 사실의 기초 위에 작가적 상상력을 가미하였지만, 대부분 직접 겪고 느낀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저자는 고백했다. 이 책은 초등학교 교장을 정년퇴직하여 <금강연구원>의 원장으로 부임한 나태주1 시인 자신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내용을 적었다. 그다지 예쁘게 생기지도 않고 세상의 잣대로는 오히려 평범한 아이에 속하는 '예슬'이라는 스물네 살 여직원에게 전하는 글의 모음이다. 그는 잔잔하게 그러나 뜨겁게 자신의 심경을 그리고 있다.

 저자는 마치 세밀한 그림을 그리듯 작은 기쁨, 작은 떨림도 놓치지 않고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고, 이야기의 마디마다 그때그때의 감정을 한 편의 시로 남겨 놓았다. 책을 펴낸 출판사는 독자에게 ‘이 책을 덮을 즈음이면 아비인 듯, 도둑인 듯, 가슴 졸이며 바라볼 수밖에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노 시인의 쓸쓸한 뒷모습이 우리 가슴에 남을 것이다’고 설명했다. 

 그렇다.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라도 그 당사자를 천진하게 만들 수 있다. 한 편의 시로 태어나는 노 시인의 사랑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어쨌든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첫 페이지를 열기 시작할 때부터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씁쓸함과 민망함에 얼굴을 붉혀야만 했다.

 

 

  

 언제나 슬이가 나의 사진 찍기에 협조적이었던 아니다. 어떤 때는 매우 매몰차게 거절을 했다. 심할 때는 긴 머리칼을 늘어뜨린 채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나중에는 화를 내며 항의까지 한다. 지금까지 슬이와 트러블이 있었다면 그것은 모두가 이 사진 찍기 과정에서 생긴 일이다. 일단 거부하면 그날은 안된다. 그런 때는 잠시 불행함과 참담함에 빠지기도 한다. - 62쪽

 

 유명한 시인, 칠십이 다된 직장 상사가 손녀뻘인 부하 여직원을 '사랑한다'고 썼다. 그래서 틈만 나면 카메라로 그 여직원을 모습을 수시로 찍는다. 여직원은 화를 내며 항의하기도 한다. 출장갔다 올 일이 있으면 귀걸이. 목걸이 등을 선물하고 그 반응을 살핀다. 운전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출장 외근 시에는 그 여직원에게 차를 운전하게 한 후 동승하여, 사적인 대화를 도모한다. 지극히 사적인 감정을 문자로 보내고, 대답이 없으면 그 이유를 묻는 문자를 재차 보내기도 한다. 정신적 사랑이라고 주장하며 수시로 걷잡을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받아달라고 통사정 한다. 그리고 여직원의 반응이 신통치 않으면 고민하고 괴로워한다. 이 책은 그런 내용이다.

 

 가끔은 내가 사준 귀걸이도 하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기도 하고 마음이 편한 날은 사진도 찍게 해주고 그래라. 그래야 내가 덜 섭섭하지. 올해 생일선물은 챙기지 않을 거야. 네가 불편하게 생각하기 때문이야. 대신 용돈은 조금 준비했어. 두었다 좋은데 쓰기 바란다. - 233쪽

 

 시인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삐딱하게 바라본다고 오해하지 마시라. 이 책은 초지일관 일방적인 구애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직장 성희롱'이란 이런 게 아닐까? 처자식. 손주가 있는 상사가 부하 여직원에게 이렇게 사랑 고백을 마구잡이로 해도 되는 것일까? 그것도 상대방이 부담스러워하고 거부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물론 책의 내용에는 항상 여직원이 거부하는 것은 아니고 어떤 때는 그의 마음을 수용하기도 한다고 썼다. 직장생활의 상하관계를 생각해보자. 상사에게 찍혀서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시인의 예술적이고 감성적인 부분을 지나치게 까칠하게 해석한다고 반박할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보자. 내 딸이 직장 상사, 그것도 가정이 있는, 아주 나이 많은 직장 상사에게 이런 사랑고백 행위를 당한다고 생각해보자. 오로지 불쾌하고 불안한 마음이 아니겠는가? 

 '직장에서의 성희롱'을 당하는 여성들 대부분은 상사의 보복이 두려워 제대로 의사표현을 못하는 법이다. 순수한 노 시인의 서정적 감정이라고? 당하는 사람이 괴로우면 그건 명백한 성희롱이고 성추행이 아닌가? 이 책에서도 상대여성 ‘예술’이가 수시로 저자에 행동에 침묵하고 거부하는 모습과 표현을 나타내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그녀는 책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원장님, 저도 알아요. 예술가들은 마음속에 누군가를 생각하며 예술작품을 만든다는 걸 알아요. 그치만 저는 그냥 직원이고 원장님은 원장님이시잖아요. 원장님도 저를 좋아하는 마음을 마음속에 간직하기만 하고 표현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228쪽  

 

 그는 손녀뻘 되는 부하 여직원을 사랑한다는데 자신의 표현대로 위태롭기 짝이 없다. 과한 표현은 노추(老醜)로 비칠 우려가 있다. 인생을 아름답게 사는 방법은 다양하다. 이런 식으로 간다면 세상의 모든 스토킹 범죄가 합리화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파렴치한 성범죄자도 ‘사랑’ 때문이라는 낮 간지러운 표현을 쓰는 것을 우리는 신문에서 접하곤 한다. '예술'이란 단어는 모든 팩트(fact)를 무시할 수 있는 보호막이 될 수 있을까?

 시인의 러브스토리 배경인 <금강연구원>은 어떤 곳인지 모르겠다. 행여 지자체가 운영하는 공적(公的)기관이라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 초등학교 교장, 장학사 등 고위 교육공무원을 경험한 유명인사는 인사권을 쥐고 있다는 이유로 부하 여직원에게 예술적. 정신적 사랑을 강요하는 부끄러운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었다.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프롤로그 말미에는 이런 표현도 나온다.

 

 그러나 가는 데까지는 가보고 싶다. 사랑하는 마음, 그리운 마음, 안쓰러운 마음이 좀 나를 도와주었으면 좋겠다. 슬아, 네가 날 좀 도와주어야겠다. 왜 내가 너를 사랑해야만 했는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쓰고 싶다. 어떻게 사랑했는지, 그 과정을 밝히고 싶다. 우리 같이 가자. 책의 끝부분까지 손잡고 함께 가보자. 부탁한다. - 11쪽

 

 

 

 혹시 이 포스팅을 읽은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 물을지 모르겠다.

 "니가 예술(藝術)을 알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알도록 노력하겠다. 그렇지만 정도(正道)가 무엇이고, 금도(禁道)가 뭔지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