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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봄이 오는 소리

by 언덕에서 2018. 2. 28.

 

 

 

봄이 오는 소리

 

 

 

 

 

 

 

 

 

1. 할아버지 맞잖아!

 

 작년 4월에 이사 왔으니 지금 사는 집에서 2년째 사는 셈이다.  옆집인 1102호에는, 젊은 부부가 두 아이와 함께 산다. 30대 중반인 부부 슬하의 두 아이는 3살 된 사내아이와 6살 된 여자아이다. 천진난만하기 짝이 없는 이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유치원을 다녀오다가, 퇴근길의 나와 엘리베이터에서 만나곤 한다. 그때마다 두 아이는 반가운 얼굴을 하며, 나를 향해 소리친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아이 엄마는 무척 당황하면서 두 아이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아니야, 할아버지가 아니야.……. 옆집 아저씨야. 할아버지라고 부르면 안 돼!”

 두 아이로부터 처음 ‘할아버지’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몹시 당황했다. 집에 와서 아내에게 이야기했더니, 아내도 비슷한 경우를 당한 모양이다. 두 아이는 아내에게도 ‘할머니!’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래도 나보다 아내가 좀 나았던 것은 이후로 호칭이 바뀌어 둘에 한번은  "아줌마, 안녕하세요!"라고 한다 했다.

 내 나이가 아직 50대 중반이고, 손주를 보려면 적어도 10년은 기다려야 할 듯하다. 장성한 우리 아들과 딸은 도무지 결혼할 생각이 없다. 어제 퇴근길이었는데, 유치원에서 엄마와 함께 돌아오던 옆집 아이 둘을 엘리베이터에서 또 만났다. 두 아이는 반가움을 못 이기겠다는 듯, 큰 소리로 나를 향해 소리쳤다.

 “야아! 할아버지다!”

 민망한 듯 내 눈치를 보던 아이 엄마가 말했다.

 “또 그랫! 할아버지가 아니라니깐? 옆집 아저씨야!”

 그러자 작은 아이가 엄마에게 따지듯 말했다.

 “할아버지가 맞잖아!”

 아이 엄마는 안절부절못했다.

 내가 두 아이 중 여자아이를 향해 말했다.

 “하하, 얘들아, 나는 할아버지가 아니란다. 아저씨도 아니고……. 그냥, '젊은 오빠'라고 불러줘!”

 그리고 사내아이를 보며 말했다.

 “음……. 너는 나를 ‘젊은 엉아’라고 부르면 안 되겠니?”

 갑자기 아이엄마가 “푸핫!”하고 웃었다.

 두 아이가 아내에게는 ‘아줌마’로 부르고, 나를 만날 때마다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유달리 흰머리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 틀림없다. 귀찮더라도 두 달에 한번은 꼭 염색을 해야겠다.

 

 

2. '나성에 가면 '

 

 

 


 

 내가 20대 때, 유행하던 노래 제목이었는데, 당시 나는 ‘나성’이 어디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알고 보니 ‘로스앤젤레스’ 음역어였다. 음역어는 한자음을 가지고 외국어 음을 나타낸 말로, 이런 표현은 많다. 예를 들어 필리핀을 ‘비율빈’으로 러시아를 ‘노서아’로 표현하는 식이다. ‘나성에 가면 편지를 써주세요’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그 ‘나성’이라는 곳이 평화와 희망과 사랑이 흐르는 꿈같은 성곽처럼 느끼곤 했다.

 당시에 비슷한 노래도 유행했다. 카펜터스와 음색이 비슷한 ‘이성애’라는 가수가 부른 ‘이별의 국제공항’이란 노래가 그것이다.  외국 곡에다 가사를 붙인 번안 곡으로 기억하는데 후렴 부분에 나오는  “L. A, International Airport,  추억의 국제공항~~,  ”이라는 후렴 가사가 주는 의미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나는 'L. A,'라는 부분의 의미를 '라, 라, 라...'의 멋스러운 표현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Los Angels'를 줄이니 ‘L. A’라는 말이 되고 결국은 'L. A, International Airport'라는 말은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나성’에 가면 편지를 달라'는 노래나, '눈물이 나서 너와 헤어질 수 없다'는 ‘나성’ 공항에 관한 노래는 결국 판타지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10년 이상이 걸렸다는 느낌이다. 1980년대 초반 가난한 한국인이 나성에 가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3D업종 공장에서 노가다 근무, 세탁소 직원, 편의점 알바, 식료품점 직원 등이었을 것이다. 기술이나 경제력 등 우리 젊은이가 미국인에게 환영받을 그 무엇이 있었겠는가?

 요즘 도시 변두리에서 심심찮게 만나는 동남아나 중앙아시아 이주근로자 무리를 보면서 그 노래들을 떠올려 본다. 연휴 때 본 TV 다큐멘터리에서는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두 나라 현지의 젊은이들이 등장했다. 한국에 이주노동자로 갔다 돌아와서 집안을 일으킨 사례는 신화처럼 많았고, 그 영향으로 동남아 나라들의 대다수 젊은이가 ‘산업연수생’에 뽑혀 한국에 가기 위해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다 용케 시험에 걸린 이의 아내나 연인은 헤어짐을 견뎌야 하는 안타까움을 삼키며 편지를 쓰는 장면이 등장했다. 내용은 뭐, 짐작할 수 있었다. ‘나성에 가면’노래 가사처럼 편지를 쓰는 식으로 ‘안산에 가면’또는 '김해에 가면'이거나 ‘추억의 인천공항’또는 '추억의 김해공항' 하는 식으로 지명만 살짝 바뀌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단에서, 거리에서 초라한 모습을 한 낯선 이주노동자들을 흔하게 만나곤 한다. 먹고 살기 위해 부모형제, 아내와 연인, 자녀들과 별리를 참으며 우리가 회피하는 업종에서 신음하며 일하는 이들이다. 어제의 우리 모습이니 따뜻하게 대하자.

 

 

3. 책 읽는 지겨움

 

 

 

 

 

 '미키 기요시1'의 독서론은 그대로 하나의 인생론이라는 느낌이었다. 세상의 추이와 인간사의 이치를 꿰뚫는 절묘한 균형 감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책 읽기는 보통 남독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박독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 특히 책을 읽는 자가 자신의 전문 분야를 지녔을 때에야 비로소 온전한 독서가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은 인상적이었다.

 누구든 자신의 인생을 바쳐 도달한 어떤 지점, 그곳에 이르기까지 축적해 온 개인적 경험과 안목에 기반을 두어 독서할 때만이 저자와 독자 사이에 이상적 교감이 이뤄질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서 내게는 특히 울림이 컸다. 한 사람의 독서가가 된다는 것, 이것은 균형 잡힌 인격을 지향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글을 배운 사람으로서 시도해볼 만한 가장 높은 단계의 목표일 수도 있다. 그간 나는 쉬지 않고 읽은 책에 관한 내용을 어쭙잖은 블로그에 빠짐없이 올리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시들해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책장을 살펴보니 읽어놓고 독후감을 쓰지 않은 책들이 수십 권이다. 이럴 땐 당혹스럽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싶다. 나이 든다는 것의 피로함... 내 인생 최고의 영화 ‘화양연화’에서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대사가 갑자기 떠올랐다.

 

뚜벅뚜벅 발자국 소리를 남기며 이렇게 나의 한 시절을 지나쳤소.”

 

 

4. 동창생

 

 

 

 30년 이상 철석같이 믿었던 친구가 내게로부터 이제는 너무 멀어져버렸음을 알고 수습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내 마음이 변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 변한 것이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간 나는 나름대로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될 것이다 라며 자신있게 인생을 예측하며 살았던 듯하다. 지난해, 그것이 여지없이 틀려버렸음을 알게 되었다. 인생을 헛살았다는 자괴감이 넘쳤다. 그런데 반전(反轉)이 생겼다.

 고교 반창회에서 25년 전에 헤어진 다른 절친을 만나게 되었다. 해후의 기쁨은 이루 형언하기 어려웠다. 그 역시 그랬다고 했다. 그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결론적으로, 동그라미로 살다가 어느날 이가 빠졌고, ‘이가 빠진 동그라미’는 빠진 부분을 다른 곳에서 찾게 된 것으로 해석하게 되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사이에는 해후가 있었다. 괴테와 쉴러 사이에도 해후가 있었다. 독서에 있어서도 똑같이, 혹은 스승으로서 혹은 친구로서 책과 해후가 있을 것이다. 일생 이런 해후를 경험하지 못한 자는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결국 아무것도 안 읽은 것과 똑같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우리는 이런 해후를 경험할 수 있을까. 스스로 구함으로서 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구하는 것이 없는 자와는 마주치는 일도 없을 듯하다. 가량 마주친다 해도 그것임을 모르고 지나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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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897~1945)일본의 마르크스 주의철학자. 제2차 세계대전 뒤 일본에서 노동자와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일어난 비(非)공산당원 민주사회주의운동의 이론적 바탕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교토[京都]제국대학을 졸업한 뒤 1922년 독일로 가 마르틴 하이데거, 하인리히 리케르트 밑에서 공부하고 돌아왔다. 1927년에 도쿄 호세이대학[法政大學]의 철학교수가 되었으며 1928년 영향력있는 평론지 〈신흥과학의 깃발 아래 新興科學の旗のもとに〉를 발간해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를 널리 보급했고 그뒤 여러 해 동안 많은 저서를 펴냈다. 그가 펴낸 책들은 모두 마르크스주의가 필연적으로 다른 철학을 압도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는 이무렵 많은 추종세력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통합하려는 진보적 시도로 말미암아 프롤레타리아 과학협회라는 공산주의자 모임에서 쫓겨나게 되었고(1930), 공교롭게도 같은 해에 정부에 의해 공산주의 지지자로 체포되어 6개월 동안 구류 처분을 받았다. 대학으로 돌아온 뒤 군사력 증강에 반대했으나 1942년 육군에 징집되어 필리핀에서 1년 동안 복무했다. 파견근무가 끝나가면서 점차 정부를 비판하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지만, 공산당원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1945년에 다시 체포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40일 뒤에 도요타마[豊多摩] 구치소에서 죽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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