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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이문열 단편 소설 『사로잡힌 악령(惡靈)』

by 언덕에서 2018. 2. 9.

 

 

이문열 단편 소설 『사로잡힌 악령(惡靈)』 

 

이문열(李文烈, 1948 ~ )의 단편소설로 1994년 발간된 ‘이문열 중·단편전집’ <아우와의 만남> 말미에 게재된 작품이다. 책 발간 이후, 특정인을 연상시키다는 민족문학 진영의 비난 때문에 전집 목록에서 삭제되었다.

 '이문열 중단편 소설집 <아우와의 만남> 초판'에 실린 중, 단편소설 목록(제목)은 다음과 같다. 「아우와의 만남」, 이강에서, 홍길동을 찾아서, 시인과 도둑, 미친 사랑의 노래, 시인의 사랑, 황장군전, 사로잡힌 악령」등 8편이다. 이 중 「황장군전」은 2000년 출간된 장편소설 「아가」에 전편 내용이 인용된 관계로 동일 작품의 중복 게재에 관한 비판이 있었다. 

 이 단편집에서 주목받는 소설 『사로잡힌 악령』은 법조인 화자의 1인칭 시점으로 환속 승려 시인의 악행을 추적하는 내용을 다룬 작품이다. 소설 속 승려 출신 시인으로 지칭되는 ‘악령’은 유명 고승의 상좌임을 내세워 문화예술계 명사와 교분을 사냥하듯 쌓았고, 여성 문학도와 동료 문인의 부인 여럿을 계속해서 농락한다는 내용이다. 이 소설은 민족문학 진영을 대표하는 모 시인을 연상케 해서 문단의 주류인 진보 진영은 작가와 작품에 대한 거센 비난을 퍼부었다. 반대로 해당 시인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는 여성 문인의 증언과 그 장면을 목격했다는 이들의 양심선언이 계속해서 이어졌고, 그 결과로 한국문단 주류 세력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은 끊이질 않았다. 

<최영미 시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삼십 년 전, 법학도인 ‘나’는 유명한 법학자인 스승의 자택에서 그분의 일을 돕는 중이었다. 나는 누더기 승복 차림에 짚신을 신은 이십 대 중반의 승려가 저명한 법학자에게 당당히 내방을 통보하고 찾아와 마주 앉는 장면을 보고 놀란다. 그는 아버지뻘 나이의 법학자를 친구처럼 예의 없이 대했다. 나와 비슷한 나이의 그는 ‘나’의 친구 운규의 아버지에게도 그렇게 행동했다. 그는 술병을 차고 찾아와서 아버지 연배가 되는, 당대의 유명 시인인, 운규 아버지와 대작하곤 했다. 그는 승복에 가려진 거짓말과 뻔뻔스러움을 밑천으로 이른바 ‘명사(名士) 사냥’을 하는 듯했다.

 이후 그를 만난 것은 내가 사법고시 준비를 하던 사찰에서였다. 술에 취해서 절을 찾아온 그는 그곳 총무 스님에게 노자를 뜯어내는 중이었다. ‘나’를 발견한 그는 동양화 · 서양화의 대가는 물론, 유명 문인과 학자들의 이름을 대며 그들 모두가 ‘친구’라고 자랑했다. 자신은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큰스님의 상좌라고 자랑했다.

 이후 서른 가까운 나이에 신춘문예에 당선한 그는 ‘환속 승려’라는 이름으로 봇물이 터진 듯 글을 쏟아 놓기 시작했고, 그의 대중적인 명성은 높아갔다.

 시간이 흘러‘나’는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신출내기 검사가 되었다. 어느 날, 그가 관련된 사건이 내게 맡겨졌다. 승려였다가 환속하여 시인으로 이름을 얻은 자가 유부녀를 겁탈했고, 충격으로 시인인 남편이 자살한 사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친하게 지내던 교수가 외국에 공부하러 간 사이에 부인을 덮친 사실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를 ‘악령’으로 부르고, 그의 행적을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악이 번성하는 한 파렴치한 엽색의 식단도 풍성했다. 자랑스레 휘젓고 다니는 색주가는 기본이었고, 손쉽고 뒤말 없는 유부녀는 속되게 표현해 간식이었다. 시인의 허명에 조급했다가 화대도 없이 침실봉사만 한 신출내기 여류시인이 있는가 하면, 뜻도 모르고 관중의 갈채에 홀렸다가, 느닷없이 그의 침실로 끌려가 눈물과 후회 속의 아침을 맞는 얼치기 문학소녀가 존재했다. 그 자신이 과장하는 시인이란 호칭에 눈부셔 옷 벗기는 줄도 모르다가, 살이 살을 비집고 들어서야 놀라 때늦은 비명을 지르는 철없는 여대생 또한 그랬다. 그러나 그가 성적인 행실 때문에 공식적으로 기소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이후, 좋지 못한 행실로 술상을 덮어쓰고, 또 어디선가는 단짝인 문사에게 된통으로 얻어맞았다는 소문이 들렸다. 유부녀를 집적이다 눈이 뒤집혀 덤비는 남편에게 쫓겨 밤중에 담을 넘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뿐만 아니라, 배가 북채만 한 여동생을 데리고 나타나 칼을 빼들고 설치는 청년 앞에 꿇어앉아 싹싹 비는 꼴을 보았다는 사람도 존재했다. 뒤늦게 들었지만 그는 자살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어느 날, ‘나’는 그가 주모자급의 시국사범이 되어 구속된 것을 발견했다. 들리는 바로는, 순수문학 마당에서 모든 게 거덜 난 그가 술김에 구속문인 석방탄원서에다 서명한 것이 변신의 계기가 되었다. 그 바람에 남산으로 끌려가 사나흘 호된 취조를 당했고, 그곳을 나와 보니 ‘저항 시인’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세계가 기다렸다.

 이후 10 ․ 26과 12 ․ 12를 거쳐 5 ․ 18이 터지면서 그는 '저항시인'에다 '민중시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날들의 끄트머리에는 '민족시인'이란 칭호가 다시 덧붙여졌다. 그가 쓰는 책은 일정 부수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고, 늦은 나이임에도 젊고 아름다운 약사를 아내로 얻게 되었다. 민중과 저항의 보호막이 벗어진 뒤에도 그의 번성은 계속됐다. 이제 그를 다치게 할 칼은 없어 보였다. 악령은 이제 자신의 악 속에 갇혔고 사로잡혔다!  

<류근 시인>

 

 단편 모음집의 대표작인 <아우와의 만남>이 발표된 시기는 1994년 여름이었다. 단편 소설 <아우와의 만남>은 당시에 불거져 나왔던 '통일 문제'를 재빨리 수용하여 소설로 만든 셈이다. 이 소설에서 작가가 제시한 통일론의 여러 모습들은 대체로 극단적이거나 무모한 모습이다. 그것은 마치 정계와 학계가 서로 왈가왈부식 논쟁을 거치던 분기점을 떠나 자유로이 경계를 넘나들며 객관적인 눈을 견지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는 '너희들이 아무리 그래봐야 통일의 문제는 현실적 이론이나 핏줄이 섞인 감정의 어느 쪽이든 결국은 닥쳐봐야 안다'는 식의 냉소에 가깝다. 그의 소설 <영웅시대>나 <변경>에서 작가가 누누이 억울함이 깃든 목소리로 호소하던 주변인으로서의 입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시절에는 결국 주류가 될 수 없었지만 이제는 그 소외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난 인물이 발언권을 얻은 모습처럼 보인다. 

 중·단편 모음집 <아우와의 만남>에 수록되었던 『사로잡힌 악령』은 발표되자마자 논란을 일으켰다. 소설은 화자인 ‘나’의 시선으로 한 승려 출신 시인의 기회주의적이고 엽기적인 행적을 쫓는다. 환속 후 문단으로 적을 옮긴 주인공은 민족시인으로 추앙받지만 자신의 욕구와 야망을 채우는 데 시대를 이용하는 기회주의적인 인물이다. 명사들과 교류하며 높아진 입지를 이용해 여성들을 농락하는 그는 화자에 의해 ‘악령’으로 지칭됐다. 소설 출간 후 모 시인을 연상케 한다는 이유 때문에 민족문학 진영이 들끓었다. 이들의 비난을 견디지 못한 작가와 출판사는 『사로잡힌 악령』을 목록에서 삭제하고야 말았다. 작가는 이 작품의 원고를 아예 없앴다고 밝혔다. 

 

 

 

“힘이 없는 악은 의미가 없다. 악이 악다워지려면 힘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권력이든 물리적 폭력이든 재력이든, 지식이나 기술 혹은 특수한 재능이든 상대를 강제하거나 마비시킬 수 있는 힘을 지녀야만 악은 악답게 자란다”. 『사로잡힌 악령』이 고발하는 모 ‘저항 시인’의 위선이다.

 한때 유명한 고승의 상좌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환속승려 출신 시인은 현재 민족시인으로 추앙된다. 자신의 이름값을 이용해 문화예술계 명사들과 사냥하듯 교분을 틀고 문학을 지망하는 여성과 친구의 부인 등을 마구잡이로 농락하는 등 '악마성'을 과시한다. 그가 자신이 본래 속했던 순수문학 진영에서 점점 설 자리를 잃자, 갑자기 민주투사의 탈을 뒤집어쓴다. 1970~80년대 저항문학의 선두에 섰던 그는, 그러나 문민정부가 들어서는 등 상황이 바뀌자 또다시 저항시인의 탈을 벗어던진다. (이후 정권이 바뀌자 다시 저항시인이 된 그는 2000년에는 대통령과 동행하여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으로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과 술잔을 나눈다)

 한국을 대표하는 원로시인의 성추행을 고발한 최영미 시인의 시 '괴물'이 재조명되었다. 류근 시인은 해당 원로 시인의 성추행 문제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며, 그 시인의 이름을 지목했다. 류근 시인은 글에서 "놀랍고 지겹다. 6~70년대부터 공공연했던 그 시인의 손버릇, 몸버릇을 이제야 마치 처음 듣는 일이라는 듯 소스라치는 척하는 문인들과 언론의 반응이 놀랍다"라고 덧붙였다.

 

 

 

 

 

 


  1. 효봉 스님 (1888~1966)1937년부터 10여년간 송광사 삼일암에서 후학을 지도하면서 정혜쌍수(定慧雙修)에 대한 구도관을 확립하였다. 1947년 해인사 가야총림 방장(方丈)으로 추대되었고, 1954년 경상남도 통영군 미륵산에 미래사(彌來寺)를 창건, 1956년 네팔에서 열린 세계불교도우의회에 참가하고 돌아와 조계종 종회의장에 취임하였다. 1957년 종무원장이 되었으며 1958년 종정에 추대되고, 1962년 통합종단 초대 종정에 오르는 등 우리나라 불교계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평소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 제자들을 엄하게 가르쳐 문하에서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경상남도 밀양군 표충사 서래각에 머무르던 1966년 10월 15일 오전에 입적하였다. 다비 후 나온 사리 50과를 송광사와 표충사·용화사·미래사 등에 나누어 모셨다. [본문으로]
  2. 」『불교』스승의 대를 이을 여러 승려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 ≒상족01(上足).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