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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김훈 장편 소설 『남한산성』

by 언덕에서 2017. 10. 17.

 

 

김훈 장편 소설『남한산성』

  

 

 

 

김훈(金薰, 1948~ )의 장편소설로 2007년 4월에 출간되었고 2017년 특별판으로 재출간되었다. 병자호란이 소재다.

 1636년 겨울, 조선 왕 인조의 어가행렬은 청의 공격을 피해 서울을 떠나 남한산성에 들었다. 장편소설『남한산성』은 그후 47일 동안 고립무원의 성에서 벌어진 참담했던 날들의 기록을 담은 작품이다. 쓰러진 왕조의 들판에도 대의는 꽃처럼 피어날 것이라며 결사항쟁을 고집한 척화파 김상헌, 역적이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삶의 영원성이 더 가치 있다고 주장한 주화파 최명길, 그 둘 사이에서 번민을 거듭하며 결단을 미루는 임금 인조의 이야기다.

 '삶은 치욕을 견디는 나날'이라고 말하는 작가는 조선의 가장 치욕적인 역사를 소설로나마 서술한다. 이 소설은 2017년 황동혁에 의하여 영화로 제작되어 발표되었다.

 

 

영화 <남한산성 The Fortress> , 2017 제작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조선임금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머문 16361214일부터 1637130일까지가 그 시대적 배경이다. 인조와 그의 신하들은 2만 명 청의 대군에 포위되어 있.

 남한산성에 고립된 사람들은 살아 있으나 아무도 살아 있지 않다. 삶의 뜻을 묻지 않고 어떻게 죽지 않을까를 묻는다는 점에서 그들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마치 내일 태양과 그 빛이 완전히 사라져 지구 전체가 암흑에 빠지리라는 예고를 받은 사람들처럼 공황 상태에 빠져 사지를 떨며 유예된 죽음을 견딜 뿐이다. 그들은 산성에 머무를 수도 없고 산성을 버리고 나아갈 수도 없는 암담함 속에서 쇠진해 갈 따름이다.

 성 안의 남은 곡식으로 성 안 사람들이 연명하는 것은 길어야 두 달이다. 성 안의 소출은 내년 가을에나 가능하고, 청의 대군에 막혀 성 밖의 곡식을 들여오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 고립무원의 성을 위협하는 것은 성을 에워싼 청의 대군과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절망과 공포다. 하루하루 양식은 고갈되고, 고갈은 죽음을 더 가깝게 불러온다. 굶주린 자들은 아귀와 같이 집착하고 매달린다.

 예조판서 김상헌1은 양주 석실에서 조정이 파천했다는 급보를 받고 혼자 남한산성으로 향한다. 송파 나루에서 사공의 인도로 강을 건넌 뒤 김상헌은 사공의 목을 벤다. 사공은 어가를 인도해 강을 건너게 했는데, 좁쌀 한줌 받지 못한 것에 툴툴댄다. 사공은 청병을 인도하고 곡식이라도 얻어 볼까 해서 강가를 어슬렁거린다. 김상헌은 그런 사공 앞에서 이것이 백성인가. 이것이 백성이었던가하고 절망한다. 국가의 존망과 임금의 안위를 걱정하는 김상헌의 고통이 오늘 무엇을 먹고 삶을 연명할 것인가를 걱정하는 사공의 고통보다 더 크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대의라고 믿는 것에 잇댄 고통을 가진 김상헌의 칼은 윤리적 갈등 없이 사공의 목을 벤다.

 임금은 힘이 없고, 주전파와 주화파의 말싸움은 끝이 나지 않는다. 그들은 말싸움으로서 신하된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 임금의 안위와 국가의 존망은 위태로운데 신료의 실천으로 옮길 수 없는 말만으로 날이 새고 날이 진다.

 결국 인조는 적장 칸에게 항복하고 목숨을 구걸하기로 한다. 임금은 서문에서 삼전도까지 걸어가 적장 칸에게 머리를 세 번 조아려 절을 한다. 조선 임금이 숨 쉬는 몸-죽음을 마다하고 윤리적 삶을 선택했다면 백성들은 성 안에 갇혀 굶어 죽거나 적의 무력으로 몰살당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두 길은 다 죽음의 길이었다. 삶의 길은 제3의 길이었다. 그것은 서날쇠와 같은 민초가 간 길이다.

 

영화 <남한산성 The Fortress> , 2017 제작

 

 

 1623년 광해군이 무력(인조반정)으로 쫓겨난 뒤 인조와 인조를 추대한 반정세력은 광해군을 은혜를 저버린 ‘망나니’라고 떠들었다. 그들은 평안감사 박엽과 의주부윤 정준 등 후금의 통로를 맡은 자들을 재빨리 처형했다. 이를 본 명나라 장수들은 “통쾌한 일”이라고 찬양했다. 그들은 떠오르는 후금과의 교류를 철저히 끊고, 꺼져가는 명나라에 기울었다. 모문룡 같은 간상배에게 쌀 80만석을 보내주는 따위 등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요동에 위축되어 있던 명나라 군사들을 지원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유발하여 나라를 다시 쑥대밭으로 만들고 민생을 도탄으로 몰아넣었다.  

 이 소설 『남한산성』은 1636년 12월 14일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 갇힌 성 안에서 벌어진 말과 말의 싸움, 삶과 죽음의 등치에 관한 참담하고 고통스러운 낱낱의 기록을 담고 있다. 이 중심에는 쓰러진 왕조의 들판에도 대의는 꽃처럼 피어날 것이라며 결사항쟁을 고집한 척화파 김상헌과 역적이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삶의 영원성은 치욕을 덮어서 위로해줄 것이라는 주화파 최명길2이 있다. 무능한 왕 인조는 그 둘 사이에서 번민을 거듭하며 결단을 미루기만 할 뿐이다. 전시총사령관인 영의정 김류의 복심을 숨긴 좌고우면, 산성의 방어를 책임진 수어사 이시백의 ‘수성守城이 곧 출성出城’이라는 가열찬 기상은 남한산성의 아수라를 한층 비극적으로 보여준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 아, 잠깐 멈추어라.

 조선 왕(인조)이 절을 멈추었다. 칸(청 태종, 홍타이지)이 휘장을 들치고 일산(日傘) 밖으로 나갔다. 칸은 바지춤을 내리고 단 아래쪽으로 오줌을 갈겼다. 바람이 불어서 오줌 줄기가 길게 날렸다. 칸이 오줌을 털고 바지춤을 여미었다. 칸이 다시 일산 안으로 들어와 상 앞에 앉았다. 칸이 셋째 잔을 내렸다. 조선 왕은 남은 절을 계속했다. (356쪽)

 작가는 370년 전 조선 왕이 ‘오랑캐’의 황제에게 이마에 피가 나도록 땅을 찧으며 절을 올리게 만든 역사적 치욕을 정교한 필체로 복원하고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갇힌 성 안의 무기력한 인조 앞에서 벌어진 주전파와 주화파의 치명적인 다툼 그리고 꺼져가는 조국의 운명 앞에서 고통 받는 민초들의 삶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무섭도록 끈질긴 질감을 만날 수 있다. 

   

 

 

  1. (1570~1652)인조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청서파의 영수이며, 1636년 병자호란 때 예조판서로 주화론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을 주장하다 인조가 항복하자 파직되었다.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부수찬·좌랑·부교리를 지내고, 1608년(광해군 즉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사가독서한 뒤, 교리·응교·직제학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었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났다. 귀국 뒤 좌의정·영돈녕부사 등을 지냈다.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을 추진할 때 북벌군의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불렸다 [본문으로]
  2. (1586~1647) 임진왜란 이후 최대 전란인 병자호란을 맞아 ‘주화(主和)’라는 과감한 현실론으로 나라를 살린 재상이 있으니 그가 바로 최명길(崔鳴吉)이다. 최명길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이다. 1586년(선조 19) 영흥 부사를 지낸 최기남(起南)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여덟 살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영특하고 어른스러운데다 문장과 한시를 잘 지었다. 어느 날은 “오늘은 증자(曾子)가 되고 내일은 안자(顔子)가 되고 또 다음 날은 공자(孔子)가 되리라.”고 말하니 아버지가 기특하게 여겼다는 일화도 있다. 1602년(선조 35) 성균관 유생이 되었으며, 1605년(선조 38) 증광문과에 급제해 승문원 관원으로 뽑히고 사관으로 추천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열일곱 살에는 이항복과 신흠(申欽)의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그 영민함으로 스승에게 주목을 받았다. 광해군 대에는 병조 좌랑까지 올랐다가 파직되었으며, 1623년(광해군 15) 김류(金瑬), 이귀(李貴) 등과 함께 인조반정을 일으켜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이 되었다. 이조 참의, 이조 참판, 부제학, 대사헌 등을 거쳐 좌의정, 우의정, 영의정을 역임했다. 최명길의 활약이 그 어느 때보다 두드러진 것은 청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였다. 당시 조정의 분위기는 존명사대주의에 사로잡혀 척화(斥和)가 우세했다. 그럼에도 최명길은 싸울 힘이 없을 때는 국토를 보존하고 왕을 지키며 백성이 어육이 되는 것을 막는 것이 우선이며, 그 길은 주화뿐임을 내세워 청과 담판을 짓고 전쟁을 매듭지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