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창섭 단편소설 『미해결의 장』
손창섭(孫昌涉. 1922~2010)의 단편소설로 1955년 6월 [현대문학]에 발표되었고, ‘군소리의 의미’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미해결의 장」은 한국전쟁 이후 절대적인 궁핍과 과대망상에 빠진 병적 인간들의 이야기다. 절망적인 삶이 지속하는 결말을 통해 어떠한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는 것이 손창섭 소설의 기본 구도라고 할 수 있다.
일기체의 형식으로, 일인칭 화자 지상과 미국 유학병을 앓는 그의 가족, 모임 ‘진성회’의 일원인 문 선생과 장 선생, 창녀 광순 등의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작가의 초기 소설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왜곡되고 무능한 인간 군상을 통해, 1950년대 한국의 전후 현실을 반영한 작품이다.
손창섭은 김성한, 장용학 등과 함께 1950년대의 우리 문학계를 빛냈다. 천성이 비사교적이고 외곬이어서 문단의 기인(奇人)으로 알려졌으며, 착실한 사실적 필치로 이상인격(異常人格)의 인간형을 그려내어 1950년대의 불안한 상황을 잘 드러냈다. 독특한 시니시즘의 필치, 불의에 참지 못하는 다혈질의 성격 창조, 거침없이 파국으로 몰고가는 주제의 결말은, 중래 상식적인 문학관을 크게 뒤바꾸어 놓았다. 소설가 손창섭은 1955년 <혈서>로 [현대문학사 신인문학상]을 받았고, 1959년에 단편 <잉여인간>으로 제4회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그 후 1984년 일본으로 귀화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나(지상)’는 식구들로부터 이방인이 되고 비난과 조소의 대상이다. 나는 궁핍한 집안의 맏아들로서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 식구눈 총 7명의 가족들이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하며 힘겹게 살아가지만 제각기 추구하는 삶의 이상과 꿈이 있다. 대장(아버지)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나에게 대신 이루도록 강요하기도 하고 나머지 자식들이 나중에 성공할 것이며 자신도 그 덕을 보며 살 것이라는 생각을 품고 있다.
아버지는 문 선생, 장 선생과 함께 진성회(眞誠會)를 만들어 국가 민족과 인류 사회를 위해서 진실하고 성실하게 일을 하다가 죽자는 거창한 대의를 내걸고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토론을 벌인다. 그러나 실상 이들은 제 가족의 생계도 꾸려나가지 못하는 무능력자들이다. ‘나’ 는 대학에 적을 두고 있으나 휴학한 상태며 하는 일도 자신을 해결할 방안도 없이 그저 그렇게 살아간다.
맏딸 지숙은 여대생으로 집안사정상 힘들게 공장에서 제품 일을 하고 있고 나머지 지현, 지철, 지웅은 미국유학이 가는 것만이 성공된 삶인 양 생각하고 있으며 최종 목표도 바로 미국유학이다. 모친은 미국유학이고 뭐고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는 것이 살아가는 목표라 할 수 있다.
나는 또 어떤가. 장 선생의 여동생인 창녀 광순을 찾아가는 것이 ‘나’의 유일한 생활이다. 광순은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고 '위자료'라며 얼마간의 돈을 주기도 한다. 나는 집에서 탈출하고 싶어지면 광순을 찾아가 그녀의 이불 안에서 낮잠을 청하기도 하고 그녀에게 마치 용돈을 받는 양 삼백환 씩 받아오기도 한다.
나는 집안에서 항상 이리저리 치이곤 하는데, 대장에게 항상 나가서 죽으라는 소리와 함께 뺨을 일상적으로 맞기도 하고 동생 지숙은 자신이 미국유학을 포기했다고 하여 경멸의 시선을 따갑게 보내기도 한다. 하다못해 현실도피처로 선택한 광순의 집에서 그녀의 가족들에게까지 치이기도 한다.
대장이 매일 죽으라고 소리쳐도 나는 죽음에 대해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던 중 빚에 몰려 가족의 유일한 생계 수단인 재봉틀을 빼앗기게 된 날, 나는 또 광순을 찾아가서 용돈을 받아 나오다 깡패들에게 무수히 두들겨 맞는다. 깡패들의 주먹을 견디지 못한 나는 얼굴에 피를 흘리며 자리에 꼬꾸라지면서 무의식 중에 "광순이, 광순이!" 하고 신음 소리처럼 불러보는 것이었다.
전후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손창섭은 인간 실존에 대한 비관적인 태도를 그의 초기작들을 통해 보여주었다. 단편소설『미해결의 장』 역시 작가의 사상이 전환되지 않은 시기인 1959년의 작품인지라 작품 전반에 흐르는 시대적 우울함과 인간 존재에 대한 회의가 짙게 배어 나온다.
손창섭 초기 단편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하나 같이 신체적인 장애인이거나 육체적으로는 정상일지라도 정신적으로 불완전한 인물이 대다수를 이룬다. 이것은 작가의 인간관 자체가 부정적인 까닭이다. 이러한 이유로 창조되는 인물들의 의지적, 정서적 결함은 작가의 어린 시절이 불우했던 사실에 많은 관련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밥을 굶더라도 미국 유학은 꼭 해야 한다는 ‘나’(지상)의 가족, 생계를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국가와 민족, 인류 사회를 위해 일하다 죽자는 ‘진성회’의 일원들, 창녀 광순에게 용돈을 타다 쓰는 무능력자 ‘나’ 모두 비정상적인 인물들이 등장한다. 등장인물들은, 주변인뿐만 아니라 경험 자아로서의 자기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일인칭 화자 ‘나’의 냉소적 시선을 통해 제시된다. ‘나’는 자기 삶과 주변 관계들에서 아무런 ‘필연성’을 느끼지 못하며, 인간의 행동 자체가 무가치하다는 극단적 허무주의에 빠져 있다. 그러므로 ‘나’에게 있어 가족이나 진성회가 추구하는 허황한 가치들은 자기기만에 불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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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창섭은 1950년대의 불안한 사회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인간에 대한 모멸과 자조, 극도의 절망과 궁핍 등 부정으로 가득 찬 시각으로 인간의 실존세계를 다룸으로써 종래의 한국소설과는 구분되는 독특한 작품세계를 확립한 작가이다. 주로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정체된 운명을 살아가다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는 현대인을 그려내었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 아무리 행복한 사람이라도 몇 시간 동안은 충격과 무력감에 빠져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나’란 인물의 극단적인 허무주의는 부정적인 현실을 감추는 당대 이념에 대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작품 속에서 아메리칸드림, 사회적 출세, 국가 담론 등과 같은 지배 이념의 허구성을 자각하고, 그것을 수동적으로나마 거부하는 유일한 존재다. 따라서 ‘나’의 허무주의적 의식 역시 그러한 현실 비판의 소산이다.
『미해결의 장』에서 드러나는 절대적 궁핍과 존재의 무의미함은 손창섭의 창작 기반인 전쟁 체험이나 전후 현실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소설의 작중 인물들이 겪는 절망의 원인을 당대의 구체적인 현실과 연결해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미해결의 장」에서 전후 현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재현되기보다는 ‘나’라는 한 분열된 주체를 통해서만 파악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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