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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朋滿座

간디에 맞선 인도 민중의 대부 『암베드카르 평전(Ambedkar)』

by 언덕에서 2017. 9. 26.

 

 

 

간디에 맞선 인도 민중의 대부 『암베드카르 평전(Ambedkar)』

                                                                    

 

 

 

『암베드카르 평전』은 인도 사회의 최하층민인 불가촉천민1으로 태어나 그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사회개혁가이자 정치가인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Bhimrao Ramji Ambedkar, 1891~1956)의 일대기를 다룬 책으로 2005년 출간되었다. 영문 제목과 부제는 「Ambedkar: Towards an Enlightened India」이다. 게일 옴베트2가 쓴 이 책은 '간디와 맞선 인도 민중의 대부’라는 부제가 들어있다.

 '달리트'라고 불리는 불가촉천민은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서 최하층인 카스트 '수드라'에도 들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과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이 불결해진다고 하여 차별을 당했다. 간디를 비롯한 힌두민족주의자들은 카스트 제도를 힌두교의 원리라는 측면에서 유지하면서 불가촉천민에게는 인간적인 온정을 베풀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렇듯 간디는 카스트 제도 철폐에 대해서 미온적이었고 방관적 태도를 보였다. 반면 암베드카르는 힌두교와 카스트제도가 존재하는 한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당하는 불가촉천민의 정당한 인권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카스트 제도에 기반을 둔 이러한 비상식적인 제도를 철폐하고 불가촉천민이 하나의 인간으로서 독립국가 인도에서 정당한 정치적 권리를 누리게 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인물이지만 암베드카르는 인도에서는 곳곳에 동상이 세워져 있을 정도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이 책은 암베드카르가 활동하던 1940년대 독립 전후의 인도는 물론이고 현대의 인도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1. 불가촉천민이라는 신분차별

 

암베드카르는 1891년 인도의 마디아프라데시 주, 모우의 암바바데 마을에서 하급 장교 람지 사크팔의 열네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그의 형제들 대부분은 성장하다 죽었다). 그는 인도 카스트 제도상 최하층 계급인 달리트(불가촉천민) 출신으로, 그의 할아버지와 부모는 군인이었는데, 영국 군대에 있었던 부모 덕분에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은 생활을 했다.

 1906년에 힌두 전통 관습대로 당시 9세였던 소녀 라마바이(Ramabai)와 결혼하고 1908년에 그의 집으로 데려왔다. 첫 부인 라마바이는 29년만인 1935년에 사별했는데, 1948년 사비타(Savita)와 재혼하였다. 재혼한 부인인 사비타는 후일 남편 암베드카르의 성을 따서 자신을 사비타 암베드카르라 하였다.

 암베드카르는 1896년 이후 다폴리의 초등학교와 인도 국립고등학교를 다녔으나 불가촉천민의 신분이었으므로 온갖 멸시와 폭력, 인간적 수모를 겪었다. 학창시절 수업시간에 책상과 의자가 주어지지 않아, 교실 바닥에 돗자리나 지푸라기 거적을 깔고 앉아 수업받았다. 담임교사를 비롯한 교사들은 암베드카르를 비롯한 불가촉천민 학생들에게 부정을 탄다고 다가오지도 않았다.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재학 중 산스크리트어 수업은 아예 수강이 금지되는 불이익도 받았다. 그의 담임교사는 그에게 대학 추천장 써주기를 주저하였다. 1904년 아버지의 군생활이 끝나자 가족을 따라 뭄바이로 이주하여 엘핀스톤 대학으로 진학했다. 대학에서도 불가촉천민이라는 그의 신분에 대한 차별과 멸시와 폭력은 계속되었고 그의 고민과 인격적인 모욕감은 극심했다. 신분의 차별을 극복하고자 더욱 학업에 매진하였으며, 그 결과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였고, 대학원 진학 시험에 합격하였다. 

 1912년 뭄바이대학교 엘핀스톤 대학을 졸업한 후, 영국 육군에 자원입대하는데 영국군 육군 소위로 바라트 라트 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노동과 아르바이트로 대학교 진학과 유학을 준비하였고, 그 시절 만났던 사회사업가 켈루스카는 그의 유학을 주선하였다.

 켈루스카의 도움으로 바로다 주지사 장학금을 받고 미국으로 유학, 컬럼비아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915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를 받았으며, 1917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장학금 지원이 만료되면서, 주립 장학금 혜택에 따른 조건대로 인도로 귀국, 주청의 공무원으로 10년간 봉직한다. 그러나 박사학위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가촉천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주청을 찾아오는 주민들에게 멸시와 무시를 당했다.

 얼마 뒤 그는 주청 공무원직을 사퇴하고 뭄바이로 돌아가 석사, 박사학위 논문을 힌두어로 출간하였고 뭄바이 시드넘 대학의 법학, 경제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러나 대학교수가 된 뒤에도 귀족, 중인층 학생들에게 멸시를 당했고, 대학 내 동료 교수들 사이에서 신분차별을 당했다.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그레이 법학원에 입학하였다. 1922년 법학원을 수료하고 영국변호사 자격과 런던 정경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위공무원이나 박사학위의 교수가 되어도 계속되는 이와 같은 불가촉천민이라는 대우, 그에게 신분차별이란 뼈에 사무치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2. 평등보다는 힌두교를 중시하였던 마하트마 간디와의 끝임없는 갈등

 

 귀국 후 1923년 4월 다시 영국령 인도총독부의 공무원에 임용되었으나, 구 귀족층, 브라만 층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고 또다시 사퇴했다. 그는 변호사로서 하층민의 무료 변론을 시작으로 인권 운동에 참여하였다. 1927년 그는 마하라시트라 주콜라바 군의 마하드에서 불가촉천민들에게도 공공용 식수시설 이용을 찬성하는 법안을 발의하여 군 의회에 통과시켰다. 하지만 귀족, 브라만계열의 결사반대로 천민층이 식수를 마실 수 없게 되자, 약 1만 명의 불가촉천민을 이끌고 거리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때 신분제도를 명시한 힌두교 마누법전을 불태웠다. 이후 영국 원탁회의에 인도 불가촉천민 대표로 참석하여, 불가촉천민의 분리선거와 권익증진을 요구하였으나, 힌두교 교리를 중시하는 마하트마 간디에 의해 좌절되었다.

 1930년부터 1932년 암베드카르는 영국, 인도 원탁회의에 인도 식민지의 불가촉천민계층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때 그는 총독부와 영국 정부를 향해 불가촉천민의 힌두사원 강제노역 금지를 건의하고, 여성의 참정권 허용, 여성 교육 허용, 불가촉천민에게도 학교 진학 기회를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때도 마하트마 간디의 국민회의파와 끊임없이 갈등하였다.

 1935년 뭄바이 법과대학의 학장으로 초빙되어 2년간 재직하면서 독립노동당을 결성하였다. 군소 정당으로 출발하였으나 불가촉천민 및 평민들의 지지를 얻어 총독부의 노동부 장관으로 취임하였다. 그해, 첫 부인 라마바이가 오랜 병석 끝에 사망했다. 첫부인 라마바이는 힌두 성지순례의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 암베드카르는 죽은 아내 라마바이를 불가촉천민 등록대장에서 삭제해줄 것을 힌두교 측에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암베드카르 장례식

 

 

3. 죽을 때는 힌두교도로 죽지 않겠다

 

 이에 격분한 암베드카르는 욜라선언을 통해 "나는 내가 원치 않게도 힌두교인으로 태어났지만, 죽을 때는 힌두교도로 죽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22개의 서약4'을 나열하고 신분차별이 없는 불교로의 개종을 선언한다. 달리트 인권해방과 여성의 재산상속권 주장, 이혼의 권리 주장, 가정폭력 반대 등의 권익증진에도 힘쓰며 하층민들의 교육을 위해 5개의 대학을 설립하고, 헌법개정을 통한 대학 입학 할당량 보장을 이끌어내었다.

 1942년 인도의 영국총독부 노동부 장관으로 취임한 그는 인도 독립 시까지 재직하였다. 1947년 독립한 인도의 초대 네루 내각의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인도 건국헌법 초안적성위원회 의장, 인도 헌법기초위원장이 되었다. 그해 8월부터는 인도의 새 법전의 초안 및 편찬에 참여하였다. 인도 상원의원으로도 선출되어 민중들 곁에서 그들의 인권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죽는 날까지 <붓다와 그의 법(法)>이라는 불교서적의 원고교정 작업을 했다.

 그는 불면증, 당뇨병과 약물 복용 후유증으로 고생하였고 동시에 다리에 신경통과 인슐린 부작용 등을 겪으면서도 헌법 초안을 주도하였다. 법무부 장관으로 재직 중 신분제도는 불평등한 악법이라며 신분제도를 명시한 힌두교마누법전을 폐기했지만, 귀족, 브라만 층의 격렬한 반발에 부딪쳤고, 마하트마 간디 역시 또다시 강하게 반발하였다. 반대파의 압력에 의해 법안이 좌절되자 법무부 장관직을 사임하였다. 

 

 

 

4. 암베드카르 운동

 

 불교도가 된 그는 불교에 관심을 갖고 부처의 자비와 평등사상을 사회개혁의 새로운 대안과 이상으로 생각하여 불교 부흥 운동을 주도하였다. 신분제도에 구애되지 않는 새로운 불교 운동은 그의 이름을 따서 '암베드카르 운동'이라고도 부른다.

 그는 불가촉천민 차별이나 신분제도의 근원은 힌두교에 있다고 보고, 1957년 인도 나그푸르에서 수십만 명의 평민, 불가촉천민들과 함께 힌두교를 버리고 불교로 개종하였다. 그해 10월 14일 광장에서 직접 지은 '22가지 서약'을 외치고 그는 "나와 함께 불교로 귀의할 사람은 일어서시오"라고 말하자 그 곳에 모인 평민, 불가촉천민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서 암베드카르의 서약을 반복하고 개종했다. 이후 하층민 사이에서 힌두교와 기존의 전통 종교, 토속신앙을 거부하고 불교로 개종하는 이들이 나타났고, 5백만 명 가까이 불자가 증가하여 이를 불교 부흥이라 부른다. 개종식을 마친 암베드카르는 행사를 종료하고, 네팔 카트만두 주에서 개최되는 세계불교도연맹의 개회식에 인도 불자 대표의 한사람으로 참석하고 즉석에서 연사로 지명되어 연설하였다. 그해 12월 6일 수면 중 갑자기 사망하였다.

 12월 7일 파티이 해변에서 거행된 불교식 화장 식에는 약 70만 명의 추모객이 찾아왔다. 평민과 불가촉천민 등 하층민 인도인들은 '바바사헤브(아버지와 같은 스승)'이라고 부르며 존경하고 있다. 그의 헌신적인 참여인권운동의 결과로 현재 불가촉천민 달리트들이 훗날 인도의 대통령, 하원의장, 대학총장, 정당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생전에 인도 헌법개정을 통한 인권향상에 힘써서 모교 컬럼비아 대학에서는 그에게 명예법학박사학위를 수여하였다. 그의 재혼한 두 번째 아내는 2003년까지 살아있었다.

 

 

 

 

  1945년 암베드카르가 불가촉민 및 하층 카스트와 함께 새로운 국가에 대해 기대했던 광범한 개혁안이 좌절되었다. 그 결과, 독립 인도에서 힌두교 이데올로기가 호전적이고 잔인한 모습으로 다시 살아났다. 결혼과 상속에 관한 개혁법안인 힌두가족법의 통과가 거부된 후 암베드카르는 한 연설에서 똥더미 위에 궁궐을 짓는다는 표현을 했다. 그가 말한 똥더미는 카스트 제도라는 인도 사회의 문화적, 사회적 관습을 가리킨다

  암베드카르는 힌두교야말로 카스트 제도의 뿌리라고 확신하고 공개적으로 힌두교를 버리겠다는 선언을 했다. 그가 힌두교 대신 어떤 종교를 택할 것인지에 대해 인도 내의 모든 종교지도자들이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는 무려 20여년에 걸친 숙고 끝에 불교야말로 인도 사회에서 불가촉민들이 의지할만한 종교라고 결론을 내리고 불교 서원식을 대대적으로 치렀다. 암베드카르가 불교로 개종한 후 수십만 명의 인도인들이 불교로 개종했다. 그의 책 붓다와 달마는 국내에도 여러 차례 소개되었다.

 개방 경제구조의 우리나라는 사드 배치를 이유로 중국이 가하는 비열하고 천박한 보복에 실망하고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최근 들어 부쩍 커진 인도의 국제경쟁력과 엄청난 잠재력에 대해 이야기한다그러나 인도가 가진 국력 밑바탕에는 최하층인 달리트의 희생이 깔려 있다는 점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 책 『암베드카르 평전』을 읽으면 현대 인도의 명암을 되짚어 볼 계기를 갖게 될 것이다. 

 

 

- 월간 소식지 '맑고향기롭게' 2017년 12월호에 게재

 

 

 

 

 

 

 

 

 

 

 

 


  1. 불가촉천민이라는 말의 사용과 그와 관련된 차별행위는 1949년 인도의 헌법제정회의에서 채택된 헌법에 의해 불법으로 규정되었다. 전통적으로 직업 또는 생활습관이 더러운 일과 관련되어 있으면 불가촉천민으로 규정되었다. 불가촉천민들은 여러 가지 사회적 제약을 받았으며 남부에서 차별이 더욱 심했다. 오늘날의 인도 헌법은 법적으로 불가촉천민을 지정 카스트와 지정부족 등으로 규정함으로써 이들의 곤란한 처지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불가촉천민 신분의 불법규정과 함께, 헌법에 따라 이들에게 특별 교육혜택과 직업상의 혜택이 주어졌으며, 의회에서도 특별 대표권이 부여되었다. 이러한 조치들을 위해 1955년 불가촉천민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순수한 계급과 오염된 계급이라는 전통적인 차별은 아직도 인도 사회에 남아 있다. [본문으로]
  2. 저자 게일 옴베트는 원래 미국인으로 미국 미니애폴리스에서 태어났으나 인도 시민이 됐다. 버클리의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사회학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78년 이후 인도인인 남편 바라트 파탄카르와 함께 마하라슈트라 주 남부의 소도시인 카세가온에 정착해 살고 있다. 현재 사회운동 활동가이면서 뉴델리에 있는 네루 기념박물관 겸 도서관의 선임연구원이다. 그녀는 인도에 관한 책을 많이 저술했다. 주요 저서로 『인도의 불교 -브라만주의와 카스트에 대한 도전』(2003), 『달리트의 전망』(1995), 『달리트와 민주주의혁명』(1994), 『혁명의 재창조 -인도의 신사회운동과 사회주의 전통』(1993), 『식민지사회의 문화적 도전 -마하라슈트라의 비브라만 운동』(1966) 등이 있다. 최근에는 남편의 도움을 받아 마라티어 문헌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고 있다. [본문으로]
  3. 개인의 출생시부터 계층의 위치가 정해지는 제도로, 카스트란 가문·결혼·직업에 의해 결정되는 특정한 지위를 가진 집단을 가리킨다. 카스트는 사람들이 취하는 사회적 교류와 직업 선택에 관해 여러 규정을 두고 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카르마, 즉 업(業)이라 불리는 힌두교 관념에 의해 정당화된다. 힌두교에 의한 카스트는 브라만(성직자), 크샤트리아(왕족·무사), 바이샤(평민), 수드라(하층민) 등 4개로 구분되며, 그외 불가촉천민이 있다. 카스트 제도는 힌두교도가 있는 나라, 즉 인도, 네팔 등에 존재하였다. 오늘날에는 법률적으로 폐지되었지만, 여전히 실제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본문으로]
  4. ◦ 나는 브라만, 비슈누, 마하데바의 신을 인정하지 않고 예배하지 않는다. ◦ 나는 라마신, 크리슈나의 신을 인정하지 않고 예배하지 않는다. ◦ 나는 가우리, 가나파티, 그 외 힌두교의 여러 남신, 여신을 인정하지 않고 예배하지 않는다. ◦ '신은 어떤 화신으로 나타난다'라는 힌두 전통을 믿지 않는다. ◦ '붓다가 비슈누의 화신'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전승은 오류이다. ◦ 나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행하지 않는다. ◦ 나는 불교에 반하는 어떠한 말과 행위도 하지 않는다. ◦ 나는 어떤 의식도 브라만의 손을 빌리지 않는다. ◦ 나는 모든 인간, 전 인류는 평등하다는 주장을 인정한다. ◦ 나는 차별을 거부하고, 평등 사회를 이룩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 나는 8정도를 준수한다. ◦ 나는 10파라미타를 준수한다. ◦ 나는 일체 중생에 대한 연민의 마음으로 불살생을 준수한다. ◦ 나는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 ◦ 나는 헛된 말을 하지 않는다. ◦ 나는 음란한 행동을 범하지 않는다. ◦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 나는 불교의 지혜, 지계, 삼매에 따라 생활하고자 노력한다. ◦ 나는 인간을 불평등하게 취급하는 힌두교를 버리고 불교를 받아들인다. ◦ 불교는 참된 종교라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 어제까지의 나를 버리고 나는 이제 다시 태어났음을 인정한다. ◦ 나는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고 지키고, 행동한다는 것을 신성하게 맹세한다.” — 암베드카르 22선언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