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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朋滿座

빅터 플랭클 자서전『죽음의 수용소에서』

by 언덕에서 2017. 8. 2.

 

빅터 플랭클 자서전『죽음의 수용소에서』

 

 

 

  

 

 

 

                                                                  

“잘 듣게 오토. 만약 내가 집에 있는 아내에게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리고 자네가 아내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녀에게 이렇게 전해 주게. 내가 매일같이 매시간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을. 잘 기억하게. 두 번째로 내가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 세 번째로 내가 그녀와 함께했던 그 짧은 결혼 생활이 이 세상의 모든 것, 심지어는 여기서 겪었던 그 모든 일보다 나에게 소중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전해 주게. 오토. 자네는 지금 어디에 있나? 아직 살아있나? 우리가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낸 후 자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자네 아내를 다시 만났나? 그리고 기억하나? 자네가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는 동안에도 내가 자네에게 내 유언을 한 마디 한 마디 외우게 했던 것을.”

 

 

 

 

 

 빅터 플랭클1이 쓴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겪은 생사의 엇갈림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잃지 않고 인간 존엄성의 승리를 보여준 자서전적인 체험 수기이며 정신분석이론서다. 지옥 같은 체험을 바탕으로 프랭클 박사는 자신만의 독특한 정신분석 방법인 로고테라피 이론을 완성한다.

 역사에는 끔찍한 고통을 이겨낸 인물이 수없이 많다. 대표적인 사람이 이 책의 저자 빅터 플랭클인데, 정신과 의사로 활발한 활동 중이었던 그는 2차대전 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 죽음 앞에서 온갖 고초를 겪게 된다. 그는 독일군에게 체포되어 수용소에 들어가자마자 평생 연구한 원고를 빼앗기는데, 생명과 같은 원고를 돌려달라고 애원했지만 돌아온 것은 무수한 발길질과 냉소뿐이었다. 발가벗겨진 그에게는 안경과 허리띠가 전부였다. 그러나 얼마 후 허리띠마저도 빵 한 조각과 바꿔 먹고 만다. 견디기 어려운 추위와 배고픔, 정신적 공허감 속에서 무수한 동료들이 눈앞에서 죽어갔는데 그를 포함한 극소수만이 목숨을 부지했다.

 

 

 

 한 장의 모포로 9명이 바닥에서 웅크려 칼잠을 자는 비참한 상황에서 그의 수용소 생활 첫날은 시작된다. 플랭클은 3년 동안 아우슈비츠를 포함해 네 곳의 수용소를 전전한다. 살아남기 위해 매일 유리 조각으로 면도하고, 동상 걸린 발을 신발 속에 구겨 넣으면서도 모진 고통을 온몸으로 견뎌낸다. 매일 수많은 수용자가 죽어 나가는데 그러한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동료를 발견하게 된다. 그 와중에서는 그는 왜 살아야 하는지의 이유를 아는 사람은 어떠한 극한 상황도 견뎌낼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희망이 있으면 절망의 환경도 인내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임을 깨닫는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의지, 자신을 바꿀 힘은 자신이 결정하는 것임을 체감한다.

 저자는 인간이란 매일 아무 감정 없이도 남을 해칠 수도 있는 끔찍한 존재라는 것을 매일 목격한다. 그러나 죽음에 직면해서도 마지막 남은 빵 한 조각을 기꺼이 주위에 나눠줄 수 있는 위대하고 강한 존재임도 또한 깨닫는다. 어느 날 밤. 그는 온종일 중노동에 시달린 몸에 배고픔을 참으며 누워 있는데 누군가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듣는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다니…."

 수용소 막사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수용자 모두 석양으로 붉게 물든 하늘을 보며 말없이 눈물을 흘린다. 내일 어떤 순간을 맞게 되더라도 그 순간만은 인간 본연의 감성을 공감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다. 자신의 내면과 소통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는 살아남았고, 아우슈비츠에서의 생활을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으로 남겼다. 

 그는 3년 동안 네 군데의 수용소로 옮겨졌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삶을 포기하지 말라’는 다짐이 그를 살렸다. 부모와 아내, 남동생을 모두 잃는 비극 속에서도 그는 좌절하지 않고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사실 그는 함께 체포되어 이송된 수용소가 갈리는 바람에 아내가 수용소 입소 초기에 사망한 것도 알지 못했다. 기나긴 고통의 시간의 종말, 1945년 8월, 전쟁이 끝나 고향인 빈으로 돌아온 후에야 아내가 사망한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록 목숨을 건져 고향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자신의 삶이 앞으로 더 살아갈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정신과 의사인 그가 심한 우울증에 빠졌고, 살아남은 그의 친구들은 그가 자살할까 걱정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우울함의 늪에서 빠져나온 그는, “인생에서 어떤 시련을 겪는다는 것, 그것이 어떠한 종류의 일이든 간에 그 사람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다”라는 말을 주위의 지인들에게 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생각을 조금씩 확장해가던 그는 자신의 수용소 시절을 되돌아보면서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불과 9일 만에 초고를 완성한 이 책의 독일어판 제목은 <한 심리학자의 강제수용소 체험기>다. 영어판 제목은 <인간의 의미 탐구(Man's search for meaning)>인데, 한국에서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이후 그가 쓴 31종의 저서 중 가장 널리 알려졌고, 미국 전역의 학교에서 필독서가 되기도 했다.

 

 

 

 

 

 빅터 프랭클은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서 돌아왔으며, 그곳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신의학계에 한 획을 긋는 의미치료라는 '로고테라피(Logotheraphy)' 이론을 정립했다. 그의 로고테라피 이론에 따르면, 극한의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삶과 죽음은 개인의 내적인 힘으로 결정된다고 한다. 그는 개인의 선택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삶을 결정함을 강조한다. 결국, 자신의 인생을 나아가게 하거나, 주저앉게 만드는 것은 둘러싼 환경이 아니라 본인에게 달렸다는 의미다.

 나치가 만든 악명 높은 강제수용소에서의 모든 상황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상실하도록 만든다(최근, 북한의 강제수용소에서 간신히 탈출에 성공한 탈북자들의 수기에서도 동일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평범한 삶에서는 당연했던 모든 인간적인 목표들이 그곳에서는 철저히 박탈당한다.

 그러한 극한상황에서도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운명을 초월하는 인간의 능력을 보여준 사람들이 있다. 정신과 의사인 저자는 환자들이 그런 특별한 능력을 갖추려면 어떻게 그들을 도와야 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환자들에게 상황이 아무리 참담해도 어떻게 하면 무언가를 위해 자기 삶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을 깨우쳐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반복해서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느냐는 것은, 즉 고결한 사람이 되느냐, 인간의 존엄을 잃고 짐승 같이 되느냐는 것은 그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음을 강조한다. 어떤 시련이 오더라도 인간에게는 단 한 가지 자유, 즉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삶의 길을 선택할 정신의 자유만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고 그 자유를 잃게 되면 물리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홀로코스트 경험 같은 끔찍한 시련도 자신의 도덕적 가치를 실현할 중요한 가치로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여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고 강조하는데 매일의 경제적 어려움과 인간적 소외 속에서 알아가는 현재의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내용이다.

 


- 월간지 '맑고향기롭게' 2017년 8월호에 게재됨 -

 

 

 

  1. Viktor Emil Frankl 빈 의과대학의 신경정신과 교수이며 미국 인터내셔널 대학에서 로고테라피를 가르쳤다. 그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 이은 정신요법 제3학파라 불리는 로고테라피 학파를 창시했다. 1905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고, 빈 대학에서 의학박사와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3년 동안 다카우와 다른 강제수용소가 있는 아우슈비츠에서 보냈다. 이 때의 경험을『강제수용소를 체험한 한 심리학자』라는 책으로 1946년 출판하였다. 강제수용소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을 자유와 책임 있는 존재로 파악한 독자적인 실존분석을 세우고, 그 치료이론으로서 의미치료로 로고테라피(Logotherapy)를 주창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