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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강경애 단편소설 『원고료 이백 원』

by 언덕에서 2017. 7. 19.

 

 

강경애 단편소설 『원고료 이백 원』

 

 

 

강경애(姜敬愛. 1907∼1943)의 단편소설로 1935년 2월 [신가정]에 발표되었다. 프롤레타리아 이념이 담긴 단편소설로 주인공은 장편 소설을 신문에 연재하고 받은 원고료 이백 원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 남편과의 갈등이 생기면서 그 해결 과정을 후배 K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1935년이면 지금으로부터 무려 80여 년 전이다. 따라서 당시의 200원이라고 한다면 추측컨대 지금의 가치로 얼추 2000만 원 정도 되었을 것이다. 주인공은 그 200원으로 옷을 사고 금가락지도 손에 끼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낀다. 하지만 철저히 가부장적인, 더욱이 사회주의자인 남편은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되레 구타하면서 속물적 문인이라며 내쫓기까지 한다.

 강경애는 1930년 식민지시대 문학사에서 개성적인 리얼리즘 소설로써 문학활동의 한 시범을 보여준 작가이다.  그녀가 활동한 1930년대의 식민지문학은 개항 이래 계속되어 온 외래문화 수용의 결과가 자체 내의 문화와 상호 충돌하면서 빚어낸 많은 문제점들이 그 원형적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때이다다양한 목소리를 가지고 나름의 현실인식 태도와 대응방식을 보여준 많은 작가들 가운데 강경애는 식민지 시대의 여러 궁핍화 현상을 탁월한 솜씨로 그려낸 작가로 오늘날 평가되고 있다. 강경애는 불우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 작품은 밝은 면보다는 어두운 면, 상류사회보다는 서민생활을 리얼한 수법으로 강렬하게 묘사하고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배경은 1930년대 만주. 편지를 쓰는 ‘나’는 여성소설가이다. ‘나’는 최근 어떤 신문에 연재소설을 써서 이백 원의 원고료를 받게 되어 있다. 가난한 살림살이에 목돈이 들어오게 되자 어떻게 쓸까, 하는 궁리를 하게 된다. 어린 시절을 무척이나 가난하게 보낸 ‘나’는 학용품을 온전하게 가져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남의 책을 빌려 공부를 해야 했다. 심지어 종이와 붓이 없어서 옆 동무의 것을 훔쳤다가 들켜 선생님께 꾸지람을 들은 적이 있을 정도다. 동무들이 양산을 산다, 옷을 산다 할 때에도 그런 것 한 번 가져본 적이 없이 자랐다.

 ‘나’는 이백 원이 생기면 금반지를 하나 사고, 시계도 하나 살 궁리를 한다. 남편에게는 양복이나 한 벌 해주면 되겠지, 하는 생각도 한다.

 마침내 원고료가 들어오자 ‘나’는 남편에게 뭘 하는 것이 좋겠냐고 물어본다. 그러자 남편의 대답은 엉뚱하게도 남을 도와주자는 것이다. 우선 급한 일이라고 남편이 내놓는 것은 응호라는 사람을 입원시키고, 그다음에는 홍식이라는 사람의 부인을 돌보자는 것이다. ‘나’는 할 말을 잃고 만다. 이제껏 가난 속에서 구두 한 켤레 온전한 것을 신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런 형편은 돌아보지 않고 남들 도와줄 생각만 하는 남편이 야속하기만 하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데, 남편이 갑자기 덤벼들어 ‘나’를 후려치며 소리 지른다.

 “내 네 마음을 모르는 줄 아니. 에이 치사한 년, 가라! 그 돈 가지고 내일 네 집을 가. 너 같은 치사한 년과는 내 못 산다. 왼 여우 같은 년……. 너도 요새 소위 모든껄이라는 두리홰눙년이 되고 싶은 게로구나. 아, 일류 문인으로서 그리해야 하는 게지. 허허, 난 그런 일류 문인의 사내 될 자격은 못 가졌다. 머리를 지지고 볶고, 상판에 밀가루 칠을 하구 금시계에 금강석 반지에 털외투를 입고, 입으로만 아! 무산자여, 하고 부르짖는 그런 문인이 되고 싶단 말이지. 당장 나가라!”

 그렇게 나는 문 밖으로 쫓겨난다. 북국 만주의 밤은 날씨가 몹시 추운 데다 눈발까지 날린다. 처음에 ‘나’는 화가 치밀어 저놈의 사내와는 이제 못 산다, 독한 마음먹는다. 그러나 그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동경으로 유학을 갈까. 그러나 학비를 어째야 할까. 그러다 나는 남편 홍식이 죽은 뒤에 추위에 떨며 사는 부인과 그 헐벗은 아이들을 생각해 낸다. 감옥에서 심장병을 얻어 출소한 후 뼈만 앙상한 채 치료도 못 받고 누워 있는 응호의 얼굴도 떠올린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생각한 금반지며 시계며 남편의 양복이며 하는 것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터무니없는 꿈이었는지를, 얼마나 위태로운 꿈이었는지를 깨닫는다.

 나는 집안으로 들어가 남편에게 용서를 빈다. 그리고는 응호를 입원시키고, 홍식네 모자를 도와주기로 한다. 삼남의 이재민들이 만주를 향하여 남부여대 밀려드는데, 처자는 요릿집에 또는 부호의 첩으로 빼앗기고 벌판을 헤매는 사람들의 울음이 들려오는데, 간도에는 토벌단이 몰려들어 총소리가 요란한데, 그 와중에 금반지나 시계 같은 꿈이나 꾼 자신이 부끄러울 뿐이다. 

 

 

 

 

 이 글을 읽는 이 대다수는 남편의 폭력 부분을 비난할 수 있을 듯하다. 이 부분은 여권의 개념이 없었던 당대의 한계로 보인다. 진보적 작가였던 강경애로서도 어쩔 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것을 칭찬해서는 안 되겠으나, 오늘의 눈으로 무작정 비난해서도 안 되는 지점인 듯하다.

 강경애는 사회경제적 모순을 작품의 기본적인 갈등구조로 삼아 당대의 역사인식에서 가장 진보적인 입장을 취했으면서도 정치조직이나 이론에서는 고립적이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문학사적으로 오히려 과소평가되어 왔다. 또한 분단 이후 그녀의 문학에 대한 평가는 후기의 자연주의적 작품에 초점을 맞추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1980년대 이후에야 올바른 연구 작업이 시작되어 초기·중기의 진보적 사실주의 작품을 재평가받게 되었다. 가난을 묘사하는 데 있어 조명희와 나란히 견줄 만큼 비참한 장면을 드러냈고, 빈부의 차이에서 오는 인간의 생존본능을 그리는 데에서는 최서해와 닮을 만큼 잔혹한 장면을 많이 그렸다.

 

♣ 

 

 강경애는 15세 때 의붓아버지마저 죽자 의붓형부의 도움으로 평양숭의여학교에 들어가 서양문학을 공부했다. 3학년 때 동맹휴학에 앞장섰다가 퇴학당했다. 퇴학 후 고향으로 돌아가 흥풍 야학교를 세워 잠시 계몽운동을 하다가, 고향 선배인 양주동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금성사에서 동거하며 동덕여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그러나 1년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근우회 장연 지부에서 활동했다.

 남편 장하일은 사상범으로 체포된 경험이 있고, 만주에서도 계속 활동한 민족운동가였다. 그녀가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과 직접 관계하지 않았음에도 사회과학적 현실인식이 뚜렷한 작가의식을 바탕으로 진보적 사실주의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1932년 장연군청에 근무하던 장하일과 혼인한 뒤, 만주로 건너가 남편은 동흥중학교 교사로 일했고 그녀는 소설을 썼다. 생활이 궁핍해지자 같은 해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1933년 다시 간도 용정으로 가서 소설 창작에 전념했다. 만주에 있는 문학 동인으로 이루어진 [북향(北鄕)]에 참여했고, [조선일보] 간도지국장을 맡기도 했다. 1939~42년에 건강이 악화되어 귀국한 후, 창작 활동을 중단한 채 지내다가 37세의 나이로 병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