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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을 읽다

다산 정약용 서간집『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by 언덕에서 2017. 6. 14.

 

 

다산 정약용 서간집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이백 년 전, 기름지지 못하고 메마른 남도 땅에서 18년간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붓을 놓지 않았던 외로운 학자가 있었다. 다산 정약용(이하 다산으로 칭함)이 그분이다. 조선말 대표적 실학자인 다산은 매형 이승훈1의 영향으로 실학에 관해 많이 공부했는데, 1801년 나이 40세 때 신유사옥2에 휘말려 유배지로 귀양을 떠난다. 이후 다산은 1818년 귀양에서 풀려나기까지 18년간 유배지를 전전하면서 지배 권력의 피해자로서 못다 이룬 꿈을 학문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처절한 삶을 살게 된다.

 다산은 세상에 두 번 다시 나오기 어려운 불세출의 학자였다. 그는 당시의 세계를 둘러보아도 따라올 이가 없는 최고의 사상가·정치가·행정가였으며, 그 시대 최고의 의사, 지리학자, 과학기술자였다. 그가 남긴 저서만 해도 500여 권인데, 같은 시대를 살았던 추사 김정희는 감히 다산의 세계를 논평할 수 없다라는 평을 했고, 그가 태어난 지 250주년 되는 2012, 유네스코는 다산의 탄생을 기리는 해로 정하기도 했다. 유네스코는 '마틴 루터킹 I Have a Dream 연설 50주년', '이탈리아 작곡가 베르디 탄생 200주년' 등과 함께 정약용 탄생 250주년을 세계적으로 기념할 만한 중요한 해로 선정했다. 이렇듯 현대의 외국 학자들도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대학자라고 평하고 있다

 

▲ 전남 강진군에 있는 다산초당. 과거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는 다산이 유배지 강진에서 강원도에 있는 두 아들과 지인들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편지로 보낸 내용이 주된 글 모음집이다. 1810년 유배 죄인 정약용은 아내 홍 씨 부인이 보낸 치마를 받았다. 시집올 때 아내가 입었던 다홍치마 5폭이었다. 그는 낡은 치마폭을 자르고 중국산 종이를 오려 붙여 작은 서첩을 꾸몄다. 가족들에게 주기 위해서였다. 당시 큰아들 정학연은 28, 둘째 아들 정학유는 25세였다. 노을처럼 빛바랜 붉은 치마에 썼기에 이것을 하피첩(霞帔帖)이라 부른다. 아득한 객지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아버지가 어머니의 빛바랜 치마 위에 당부의 글을 썼으니 다산의 바람대로 두 아들은 감회가 일었을 것이고 두 어버이의 은혜를 가슴 깊이 새겼을 것이다. 이 글 모음집에는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비롯해. 아들에게 내려주는 가훈, 둘째 형님 정약전에게 보내는 편지, 제자들에게 당부하는 글 등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글들은 다산의 수많은 문집 중에서 편지와 가계(: 경계의 말씀) 부분만을 따로 골라 수록한 것이다.

 다산은 불세출의 대학자이기 전에 자식에게는 엄한 아버지였고, 형제에게는 다정다감한 동생이었다. 또한, 제자에게는 올바른 스승이었고, 아내에게는 따스한 남편이었음은 물론이다. 다산이 유배의 고통 속에서 가족과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는 진솔한 한 인간의 내면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어서 오늘날의 우리에게 지혜와 짙은 감동을 안겨준다.

 편지에서 다산은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아들 학연3(學淵)과 학유4(學游)가 실의에 빠지지 않도록 세세한 부분까지 격려하고 있다. 그러나 아들은 편지를 통해 아버지에게 권유한다.

 아버님, 권세가들에게 귀양살이에서 풀려나도록 도와줄 것을 간청하심이 어떠한지요...

 이러한 의견에 다산은 사소한 일을 가지고 절조를 잃어버려서야 되겠느냐라며 매섭게 질책하는데 불의와 타협하지 않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소망은 추상과도 같다 

 

▲ 부인이 보내온 치마폭에 글과 그림을 적어 책으로 묶은 하피첩(霞皮帖). 다산이 자식들에게 보내는 간곡한 당부들이 모아져 있다.

 

 

 편지에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무슨 공부를 해야 하며, 가족 간 윤리, 친인척과의 인간관계, 양계, 양잠하는 법, 심지어 친구를 사귀고 술을 마시는 법도까지 세세하게 적혀져 있다. 이 편지들을 읽다 보면 시대를 불문하고 세상의 모든 아버지의 마음은 똑같음을 알 수 있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막내아들의 죽음을 듣게 된다그의 글은 슬픔을 견딜 수 없어 오열하고 통곡하지만이달 들어서는 공사 간에 슬픔이 크고 밤낮으로 가신 이에 대한 그리움을 견딜 수 없으니 이 어인 신세인가더 말하지 말기로 하자라는 표현을 쓴다이러한 문장에서는 대학자도 견디기 어려운 극한의 슬픔 속에서 감정에 무작정 매몰되지 않는 절제가 묻어난다이렇듯 글의 표면에는 엄격함이 넘치지만횡간에는 자상하면서도 애끊는 부정이 흐른다외롭고 고단한 유배 생활 속에서도 자신의 어려움을 전혀 내색하지 않고 오직 아들들이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 때문이다.

 다산은 자신과 같은 이유로 흑산도로 유배 간 둘째 형님 정약전(丁若銓)과도 서간을 주고받으며 변함없는 우애를 나누었다. 절해고도인 흑산도에서 어류와 조류를 관찰하던 정약전은 그 관찰의 결과를 기록하여 책 제목을 자산어보(玆山魚譜)라 명명했다. 약전은 흑산(黑山)이라는 섬의 이름이 너무 검기에 밝은 빛이 도는 자산(玆山)으로 칭하고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둘은 형제이지만 평생지기와도 같은 관계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서로 불우한 처지에 구애받지 않고 학문과 삶에 대한 식견을 나눈다. 특히 육지와 멀리 떨어진 고도 흑산도에서 다산보다 더 외로운 유배생활을 하는 형님의 건강을 염려하여 개 잡아먹는 법까지 자세히 적어놓은 글에서 나이가 들어도 변치 않는 형제애를 느낄 수 있다.

 다산이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가난한 제자들의 생계까지 염려해주는 자상한 스승의 마음씨가 잘 드러나 있다. 불합리하더라도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역설처럼 다산 자신은 과거제도를 맹렬히 비판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런 제도를 통해서만 벼슬길로 나아갈 수 있는 현실을 인정한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과거 공부에 힘을 다하라고 주장하거나 애써 힘든 길로 가지 말고 지름길로 가라고 당부하는 현실적인 가르침 등은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표현이다. 이 편지글들은 다산이 실학자로서 얼마나 튼튼한 현실주의적 사고와 실학사상을 지녔는지 보여준다. 교육자의 위상이 땅에 떨어지고 교권이 흔들리는 작금의 세태에서 진정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돌이켜보게 만든다.

 

 

 

 다산이 실의에 빠진 아들들에게 우리는 폐족이다.라고 한 선언은 포기나 좌절이 아니다. 다산은 자기가 처한 현실을 이유로 자신과 후손들의 운명을 결정짓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비록 벼슬길은 막혔으나 성인이 되고, 문장가가 되고, 진리에 통달한 선비가 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좋은 점이 많다.

 이는 다산이 현실을 오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의 용기를 북돋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내가 너희 억울함을 충분히 이해한다., 요즈음 네 글을 보니 조금씩 나아지고 있구나. 내가 알고 있으니 용기를 가져라.라며 두 아들의 마음을 이해하며 격려한다. 끝을 알 수 없는 질곡의 고통 속에서도 자녀와 형님, 그리고 제자들에게 보낸 다산의 편지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아버지의 당부이자 동생의 따스함, 스승의 사랑이 담긴 손 편지 자체여서 절절하기까지 하다.

 유배지에서 다산이 아들과 형님,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글에는 자상하고 간곡한 아버지와 스승의 정이 넘치면서도 그 밑바닥에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들려는 뜨거운 의지가 용솟음친다. 참다운 스승을 만나기 어려운 오늘날, 다산이 서한으로 전한 내용은 우리에게 더없이 소중한 깨우침으로 다가온다.

 

- 월간지 '맑고향기롭게' 2017년 6월호에 게재됨 -

 

 

 

 

 

 

  1. 세례명 베드로. 본관은 평창(平昌).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蔓川). 아버지는 참판 동욱(東郁)이며, 어머니는 이가환(李家煥)의 누이이다. 한국천주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으로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이다. [본문으로]
  2. 신유교난이라고도 한다. 정조는 천주교와 남인에 대하여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했으나 1800년 순조 즉위 후 벽파가 정권을 잡자 원론적 입장에서 천주교와 남인을 탄압했다. 1801년 정순왕후는 사학을 엄금하고 뉘우치지 않는 자에게는 반역죄를 적용하였다. 이유는 천주교가 혈연과 군신의 관계를 부정하여 인륜을 무너뜨림으로써 백성들을 오랑캐나 금수의 상태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천주교에 관여했던 남인 인사와 교회를 이끌고 있던 인물들이 대거 체포되어 많은 인사가 옥사하거나 처형당했다. 신자 약 100명이 처형되고 400여 명이 유배된 같은 해 12월에 척사윤음이 공표되면서 일단 마무리되었으나 이후에도 천주교 박해는 계속되었다. [본문으로]
  3. 조선 정조 때 문관. 자 穉修(치수). 호 酉山(유산). 본관 羅州(나주). 父 若鏞. 정조 때 벼슬이 直長(직장)에 이르렀고, 아우 學游(학유)는 ‘農家月令歌(농가월령가)’를 지어 유명하다. [본문으로]
  4. 본관은 나주(羅州). 호는 운포(耘逋). 정약용(鄭若鏞)의 둘째 아들이다. 일생을 문인으로 마쳤다. 1816년(순조 16) 한 해 동안 힘써야 할 농사일과 철마다 알아두어야 할 풍속 및 예의범절 등을 운문체로 기록한 「농가월령가」를 지었다. 모두 518구의 국한문혼용으로 되어 있는데 농시(農時)를 강조하고 농구관리와 거름의 중요성, 그리고 작물과목·양잠·양축·양봉·산채·약초·김장·누룩·방적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농사내용과 세배·널뛰기·윷놀이·달맞이·더위팔기·성묘·천렵(川獵)·천신(薦新) 등의 민속적인 행사 등이 광범하게 포함되어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