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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옛날의 금잔디

인다라의 구슬

by 언덕에서 2016. 11. 23.

 

 

 

인다라의 구슬

 

 

 

 

 

1. 재개발 주택

 

아파트에서 산 지가 17년째다. 그전에는 지금 살고 있는 대형 아파트 단지 뒤의 재개발 대상인 주택가에서 살았다. 아버님께서 남겨 놓으신 집에서 대학생 때부터 어머니와 둘이서 살았는데 내가 결혼하여 두 명의 아이를 슬하에 두게 되니 삼 대 다섯 명이 사는 집이 되어버렸다. 나는 대기업에, 아내는 공무원으로 부부가 맞벌이한 관계로 형편이 비교적 넉넉했는데도 그곳을 떠나지 않은 이유는 편리함보다는 이웃 간의 보이지 않는 정이 좋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최근에서야 내리게 된다.

 우리 아이 두 명은 집 옆의 골목들을 다니면서 많은 친구를 사귀었고 집으로 데려오곤 했다. 큰애가 다섯 살 즈음인 것으로 기억한다. 동네가 동네인 만큼 빈한한 가정이 많았다. 점심때가 되면 큰애의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오곤 했는데 어머니는 귀찮아하지 않고 새밥을 해서 일일이 꼬맹이들에게 먹여 보냈다. 어느 토요일, 정오 경에 퇴근해서 집에 도착하니 우리 집의 밥상 앞에는 예닐곱 명의 아이들이 북적거렸다. 밥때인데 어찌 우리 손주만 밥을 먹이느냐는 것이 어머니의 항변이었다.

 지금은 다 자란 아이 두 명은 무엇을 모두 혼자 가지는 것보다 남과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한다.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익혀온 습관 때문이리라고 생각한다. 고운 성품을 손주들에게 물려주고 세상을 떠나신 어머님께 늦게나마 감사드린다.

 

 

2. 구걸

 

20년 전, 그 동네에는 다섯 살짜리 사내아이인 우리 큰애를 좋아하던 여섯 살짜리 ‘하나’라는 소녀가 있었다. 그 애도 우리 집에 와서 점심을 먹곤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아이 집 앞에는 금발미용실이라는 동네미장원이 있었다. 이전에 이발소에서 머리를 자르던 나는 허름한 변두리 마을의 미용실이지만 좀 더 세련되고 싶어서 그곳을 찾곤 했다. 미용실의 여주인은 40대 후반의 뚱뚱한 여인이었는데 내 머리를 자르면서 다른 손님과 대화 중이었다.

 “앞집 하나 할머니 말이에요. 올해로 팔십이지요? 한 번씩 아들 몰래 담요 같은 것을 들고 버스를 타데요. 그다음 날에는 하나가 빠짐없이 과자를 많이 사 먹는 것을 보면 틀림없어.”

 미용실 주인의 대화를 훔쳐 들으면서 생각을 조합해보니 그 할머니는 용돈이 궁하면 구걸을 다닌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집 미용사는 그 실례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거리에서 그렇게 하는 할머니를 보았다는 소문도 있다고 했다.

 당시 나는 오지랍이 넓어서 하나 아빠가 실직했다는 어머니의 하소연 때문에 일자리를 구해준 적이 있었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니 슬픔 같은 감정이 밀려왔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가난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그때보다 양극화가 더 깊어지고 있다.

 

 

3. 금발 미용실

 

아이들에 커감에 따라 방이 두 개인 그 재래식 주택에서 살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하루에 왕복 60km가 되는 직장까지 출퇴근하려면 승용차가 필수였고 좁은 동네 골목길에 주차하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동네 앞의 아파트 단지에서 우리 집과 가장 가까운 거리의 큰 평수 아파트를 구입했고 어머니에게 함께 가기를 종용했지만, 어머니는 그 집에 남기를 고집하셨다.

 그로부터 6년이 흘렀다.

 휴일. 머리를 자를 때가 되어 단골 미용실을 찾았으나 마침 그날은 휴업 중이었다. 발길을 돌려 아파트 뒤의 주택가 예전에 갔던 ‘금발미용실’에 가보았다. 그 가게는 손님이 많지 않아서 금방 이발을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주인아주머니와 친구인 듯한 여인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어머! ○○ 아빠 아니세요?”

 “예, 안녕하세요.”

 주인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마음이 아프시죠? 벌써 일 년이 다되어가네…….”

  내 머리카락을 다듬던 여자는 말을 이어갔다.

 “○○ 아빠가 이사 가고 나서 동네에서 말이 많았어요. 형님이 둘이나 계시는데도 줄곧 모친을 모셨잖아요. 그 전에는 단정하기 짝이 없었던 ○○할머니 행색이 바뀌기 시작하더라고요. 동네 사람들은 효자 아들 내외를 쫓아내더니 저 할머니가 추레해지기 시작했다고도 하구요.”

 하아, 집에 아들이 없으니까 추레해졌다는 표현이 오히려 맞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이렇게 물었다.

 “하나네는 지금도 이 앞집에 사나요?”

 “아니요. 벌써 이사 갔어요. 하나 할머니는 아직 살아있다던데.”

 “당시 어머니가 저를 쫓아낸 것은 절대 아니구요. 집이 좁아서 큰집으로 이사 간 건데 어머니 입장에서는 돌아가신 아버님의 흔적이 있는 그 집을 떠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

 “그리고 저의 어머니가 그렇게 추레하게 보이게 만든 것은 전적으로 제 책임이겠지요. 저는 입이 열 개 있어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구요.”

 

 

4. 전화

 

매월 정기적으로 글을 연재하고 있는 잡지의 편집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 글의 독자 한 분이 나와 반드시 통화하고 싶어 하시는데 전화번호를 알려드려도 괜찮겠냐는 것이다. 다음날 알지 못하는 전화번호가 내 휴대폰 액정에 떴다.

 “안녕하세요. 저는 대구에 사는 독거노인입니다…….”

 사연은 이랬다.

 올해 75세인 할머님은 초등학교 교사 출신이라고 했다. 올해 4월에 남편과 사별했는데 막상 당해보니 생각보다 후유증이 컸던 관계로 지금도 힘들다고 하셨다. 남편이 입원해 있던 병원의 원무실에서 권한 책을 읽으며 병간호를 했는데 그때 내가 쓴 글을 접했다고 했다. 너무도 감명 깊어서 아홉 번이나 계속해서 읽었다는 것이다. 그때 그 고마움 때문에 자신이 손수 담근 된장을 전하고 싶다고 청했다.

 기억을 되살려 보니 별것 아닌 글이었다(http://blog.daum.net/yoont3/11301956). 나의 언행 하나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분처럼 누군가 알지 못하는 분에게 감동을 주고 또 어머니의 경우처럼 상처를 주게 되기도 한다. 박노해 시인의 <인다라의 구슬>이라는 글이 생각났다.

 

인다라의 하늘에는 구슬로 된 그물이 걸려 있는데 구슬 하나하나는 다른 구슬 모두를 비추고 있어 어떤 구슬 하나라도 소리 내면

그물에 달린 다른 구슬 모두에 그 울림이 연달아 퍼진다 한다. - 화엄경

 

작은 연어 한 마리도 한 생을 돌아오면서 안답니다

작은 철새 한 마리도 창공을 넘어오면서 안답니다

지구가 끝도 없이 크고 무한정한 게 아니라는 것을

한 바퀴 돌고 오면 이리도 작고 여린

푸른 별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지구 마을 저 편에서 그대가 울면 내가 웁니다

누군가 등불을 켜면 내 앞길도 환해집니다

내가 많이 갖고 쓰면 저리 굶주려 쓰러지고

나 하나 바로 살면 시든 희망이 살아납니다

 (후략)

 

 

 세상살이의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따뜻하게도 하고, 힘들게도 하고, 웃음 짓게도 하는 그런 것이다.

 할머님이 힘들게 빚은 된장을 우리가 받아도 되겠느냐고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아내는 이렇게 답했다.

 “받은 만큼 우리도 베풀면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바로 살면 나비 효과가 생겨 세상이 밝아진답니다.”

  '부처님은 집 안에 있다(佛在家中)'라는 고사(古事)가 떠올랐다. 내 아내와 내 자식들은 집 안에 있는 부처님들이라는 것을 깨닫곤 한다.

 

 

 


 

 

한 해 동안 제 블로그를 찾아주고 제 글을 읽어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일일이 찾아뵙지 못하고 이렇게 인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며 기쁜 일 많으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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