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이제 이 기나긴 이야기의 마무리를 할 때가 온 것 같다. 작은 내(川)가 모여서 강이 된다. 삶의 작은 조각들이 모여서 기억을 만들고 종국에는 기다란 이야기를 만들기도 한다. 한국전쟁 이후에 만난 가난한 남녀 사이에 한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게 되었고 그도 이제는 늙어가고 있다. 과연 그는 무엇을 남기려 할 것인가?
인간은 삶의 주인공으로서 자율성과 자유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이것은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는 공간에서 가장 우선시 두어야 할 중요한 가치일 것이다. 남의 지배나 구속을 당하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의 원칙에 따라 어떤 일을 하는 것을 우리는 자율성, 또는 자율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살아감으로써 우리는 환경과 상황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자신을 완성해가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 한다.
생로병사의 가르침은 오래 살지 못한다는 두려움보다는 외톨이가 되고 기피당한다는 소외에 대한 두려움을 일깨운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부터는 그다지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때가 돼서는 돈을 더 바라지도, 권력과 명예 또한 부질없음을 깨닫는다. 단지 남은 시간 여력을 다하여 이 세상에서 자신만의 삶의 이야기를 쓸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삶을 조명할 때 단순하게 매 순간을 평균해서 평가하지 않는다. 그렇게 수학적으로 자신의 생을 관조할 사람은 없다. 어차피 인생은 잠자는 시간을 포함해 별다른 일 없이 지나가기 마련이다. 인간에게 개개인의 삶이 의미 있는 까닭은 그것이 한 편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의 의미 있는 순간들이 모여서 그 전체적인 구도를 결정한다. 사람들은 추억을 나누고, 애정이 담긴 물건과 지혜를 물려주고, 관계를 회복하고, 이 세상에 무엇을 남길지 결정한다. 또한, 대부분 사람들은 죽기 전에 신과 화해하고 남겨질 사람들이 괜찮으리라는 것을 확실히 해 두고 싶어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마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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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것은 그러한 나의 이야기를 스스로 쓰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항상 변화한다.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을 만날 수도 있다. 관심사와 욕구가 변할 수도 있다. 그래서 100가지의 스토리를 계획한 『옛날의 금잔디』의 후반 부분부터는 이야기를 이어나가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리는 자신의 개성 및 삶의 핍진성과 합치하는 방식으로 삶을 꾸려 갈 자유를 유지하고 싶어 하고 그 내용을 적어두려 애쓴다.
태어나 들꽃처럼 살다가 일기장 한 장 남기지 않고 소리 없이 사라지는 방식의 삶이 있고, 장황하고 무겁고 두꺼운 부피의 책을 남기는 경우도 있다. 그 어느 경우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그의 삶이 어떻게 기록되었는가와 관계없이 한 사람의 생애는 “태어나 살았다 죽었다”라는 세 마디 단어로는 요약되지 않는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다. 그 이야기에는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고 플롯이 있다. 그가 어디서 태어나 어떤 꿈을 키웠는가, 누구를 죽도록 사랑하고 누구를 미워했는가, 무슨 갈등에 빠지고 어떤 좌절과 상처를 경험했는가, 무엇을 성취하고 무엇을 잃었는가 하는 내용이 있다. 그의 이야기 속에는 이 모든 극적 요소들이 빠짐없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도정일).
성공한 기업인, 지면을 장식하던 정치인, 연예인, 한때 대중의 기억에 남아있는 유명 인사만이 자서전을 남기라는 철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의 삶이나 평범하기 그지없는 나의 삶이나 이야기는 비슷하기 마련이다. 삶이 끝나는 순간 한 인간의 이야기도 끝난다. 나나 그는 한 편의 이야기를 남기고 떠난다.
누구나 죽기 전에 한 번은 소설을 쓰는데, 그게 바로 자기 인생의 이야기다. 자기 인생이 어디서부터인가 잘못됐다고 해도 이야기의 관점에서는 별문제가 안 된다. 죽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 인생의 이야기를 얼마든지 다시 쓸 수 있으니까(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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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이 근본적으로 문학적인 것은 이처럼 우리 누구나가 다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작가이기 때문이다. IMF 즈음에 금융회사에서 5년가량 근무한 적이 있었다. 모든 서민이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을 받고 있을 시기였다. 오랜 기간 그 회사에 근무한 동료는 이렇게 말했다.
“모집인, 저분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개인의 인생역정이 영화보다 더 파란만장한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그랬다. 모든 인간들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약 40년 만에 만난 고교 동창회의 친구들과 나눈 이야기에서 저마다 각각의 파란만장한 소설을 만날 수 있었다. 놀라워라!
문학은 먼 곳에 따로 있지 않고 글쓰기가 업인 문학인들만이 만드는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 있고 삶 그 자체가 드라마이며 소설이다. 요란스럽게 자서전을 남기고 누가 대필하여 전기를 써주지 않아도 인간은 자기 자서전의 주인공이고 자신만의 이야기의 작자이다. 산다는 것이 결국은 한 편의 자서전을 쓰는 일이며 스스로 플롯을 만들고 이야기를 꾸미는 일이다. 이 사실은 중요하다.
기나긴 이야기의 마무리로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지 많은 생각을 했다. 삶이 때로 기만과 배신의 순간을 요구했다 할지라도 그 순간을 바로 잡기 위한 참회와 성찰의 시간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행간의 의미로 쓰고 싶었다. 삶이 때로는 허위와 구부러짐과 굴종을 강요했다 할지라도 그 구부러진 것들을 펴기 위해 노력했다고도. 남을 사랑하고 베풀고 함께 울어준 순간도 있었고 반대로 배신당하고 상처받은 것 또한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나는 이것이 바로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쓸 뿐 아니라 어떤 커다란 ‘이야기의 틀’ 속에서 개개인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인간이 어딘가에 태어난다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어떤 큰 이야기의 틀 속에서 태어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학이 존재 이유도 그러할 것이다. 문학은 다른 어떤 이유에서보다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돕는다는 이유로 중요하다. 그러기에 얼굴을 두껍게 만들어 대단치 않은 잡다한 기억을 되살려 짧지 않은 이야기로 늘려 보았다. 3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옛날의 금잔디』를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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