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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근경일기(近頃日記)

by 언덕에서 2016. 9. 23.



근경일기(近頃日記)







9월 14일 (수)


연휴 시작.

열차를 타고 부산에서 밀양을 왕복하다. 시내와 떨어진 언덕 위에 자리한 밀양성당은 언제나 조용해서 쓸쓸한 느낌마저 든다. 영남루가 내려다 보이고 코스모스가 곳곳에 피어있다.

 성당 뒷편 『천상낙원』이 공식명칭인 건물, 그곳의 납골당도 그 모습 그대로다. 고인(故人)의 명패를 구리판으로 바꾸려면 입금과 함께 신청하라는 안내문이 붙여져 있고, 많은 납골함 입구가 사진이 새겨진 구리 명판으로 바뀌어져 있다. 성당 사무실에 들러 입금 후 바꿀까 어쩔까 생각하다, 내가 갖고 있는 몇 장의 부모님 두 분 사진의 균형이 맞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내 단념했다. 두 분이 함께 찍으신 사진이 모두 흐리다. 그러니 50대의 아버님과 70대의 어머님이 나란히 있는 사진은 어색할 것 같다. 두 분은 변한 모습으로 저 세상에서 만났셨을까?

 늦은 저녁 시간에 ○○와 만났다. 그는 머리를 길러 묶었고 개량 한복을 입고 있었서 '부활'의 김태원을 연상하게 했다. 명절 연휴가 아니면 만나기 어려운 죽마고우다.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전어회가 어떤가 제안하니 콜레라 때문에 위험하지 않겠느냐며 손사래를 친다. 횟집 옆의 고깃집에 갔는데 종업원들이 유난히 불친절하다. 연휴임에도 쉬지 못하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만취.




9월 15일 (목)


한가위. 아침부터 비가 오다 그치기를 종일 반복한다. 추석합동위령미사에 참석하다. 젊은 보좌신부님의 강론은 판에 박은 듯해서 다소 지루하게 느껴졌다. 요즘의 나는 젊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단면적인 경우가 많다고 판단하고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있다.

 미사를 마치고 성당을 나서는데 마당에서 기다리던 신부님께서 우리 부부에게 인사하신다. 젊은 보좌신부님은 수단을 입지 않고 로만칼라 상의를 입었는데 하의는 청바지 계통이다. 게다가 머리는 스포츠형. 콧수염을 기른 신부님도 보았으니 특별히 이상한 모습은 아닐 것이다.

 미사 때 전자오르간을 반주하던 아가씨가 빠른 걸음으로 우리 앞을 지나갔다. 아들 아이의 동기로 초등학교 선생님이라고 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둘은 지금도 친할까? 저 아가씨 입장에서는 뭔가 어색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들면서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점은 아집과 같은 고정관념이 무슨 성채처럼 굳건해진다는 점일 것이다. 유연한 사고와 끊임없는 반성과 자기성찰만이 건강한 인격으로 향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9월 16일 (금)


리메이크된 영화 <벤허>를 보았다. 이스라엘 땅에 부임한 로마 총독이 본시오 빌라도로 나오고, 벤허와 비슷하게 생긴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벤허와 대화하는 장면 등이 특이했다. 뿐만 아니라 전투선의 노예로 추락한 벤허가 로마 장군 알리우스에게 구출되지 않고 난파된 선박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는 모습도 원작이나 전작(前作)과 다른 부분이다.

 마지막 부분은 짜증스러울 정도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것이 원작의 영향이든, 각색의 영향이든……. 그러니까 극의 클라이맥스라고 보이는 전차 경주에서 승리한 벤허가 중상을 입은 메살라에게 화해를 청하게 되고 벤허를 죽이려고 비수를 숨긴 메살라는 그에 감동하여 뉘우치고 곧장 포옹하게 되는 장면. 원수를 용서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한 여름 인파가 붐비는 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미니스커트를 입은 젊은 여성이 아름다운 이유는 아슬아슬함이 안겨주는 긴장감 때문이다. 부족함의 미덕? 그러나 포르노 사이트에서 전라의 모습으로 포즈를 취한 미모의 여성을 보노라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같은 미모의 여성이지만 그 노골적임이 아름다움을 상쇄하기 때문이다. 관객에게 강요하지 않아도 관객들은 ‘설정’ 자체만으로 감독의 메시지를 읽는다.

 시내 중심부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 같은 피켓을 들고 있는 장면을 흔히 대한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도 그런 느낌? 코가 크고 키가 큰 파란 눈의 유럽인이, 예수로 등장하여, 벤허에게 설교하는 장면에서 ‘서구인(西歐人) 너희들은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조소를 일게 만든다.



9월 17일 (토)


종일 비가 온다. 뉴스 일기예보를 보니 한반도의 아열대화는 가속화되어 이제는 가을이 1.5개월 정도라고 하니 변화하는 세상에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신문에는 대만 언론에 소개된 내용이라며 미국이 중국과 합의하여 북한을 점령하지 않고 체제 전복을 하지 않는 범위에서 북의 핵무기 시설만을 정밀 폭격할 것이라는 시나리오가 소개되어 있다. 피터 팬 신드롬. 30세를 약간 넘긴 애송이의 눈치를 보는 동북아시아의 운명이 한심스럽게 느껴진다.

 경제는 ‘진보’고 ‘안보’는 보수라고 스스로 주장하던 정치인 A씨가 ‘사드 배치’에 대한 반대 입장을 이제야‘철수’하는 모양이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모습은 굳건하기 짝이 없는 그의 권력의지에서 기인한다. 그의 대안(代案)없는 비판은 철학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나는 판단하고 있다. 물론 정치적 약자라고해도 권력 의지가 없으라는 법은 없다. 그런 그도 언젠가 타인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힘(권력)을 획득하게 되면 강자로서 권력을 행사할지도 모른다.

 고전문헌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니체는 고대 그리스인을 높게 평가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타자를 극복하고 그들 위에 서는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위대한 길을 갈 수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고대 그리스인들은 타자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에 그들만의 고귀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고 여긴 셈이다.

 그러나 급격히 변화하는 세상에서 권력 의지만으로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해 나는 회의적이다. 뭘 알아야 면장을 하지 않겠는가? 대중은 항상 변덕스러운 존재임을 A는 잊고 있는 듯하다.



9월 18일 (일)


오늘도 비가 오락가락.

 오전에는 구시가지를 들러서 M모드 사진을 찍다가 중앙성당까지 이르게 되었다. 중앙성당은 다시 주교좌성당이 되어있어서 이전에 비해 새롭게 보였다. 주교좌성당1. 하나의 교회집이 명칭에 따라 달라 보인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이 문제가 있다는 근거이기도 하다.

 오후에는 명대 말의 양명학자인 탁오 이지의 『분서』를 읽었다. 그는 이 책에서 맹자를 그침 없이 비판한다.

 “공자의 학설을 배우기 원했던 것이야말로 맹자가 맹자로 그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이지에 따르면 스승의 권위에 벗어나지 못하면 제아무리 학식이 뛰어난 맹자라도 참된 삶을 산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서양에서도 스승을 넘어서라고 주장했던 철학자가 있다. 니체는 자서전 성격을 책 『이 사람을 보라』에서 스승을 넘어서야 제자의 도리를 다한다고 주장한다.

 “영원히 제자로만 머문다면 선생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내가 쓰고 있는 월계관을 뺏으려 하지 않는가?”

 그는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제자가 스승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그 제자는 올바른 가르침을 받은 것이 아니며, 스승 또한 제대로 가르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가령 모든 인류가 "제자가 스승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인류는 발전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어떤 제자가 스승에게 열심히 배운다. 하지만 그는 스승보다 약간 못 미친다. 왜? 스승을 넘을 수 없으니까. 그가 스승이 되어 누군가를 가르친다. 그의 제자는 또 그보다도 약간 못 미친다. 이런 식으로 가다 보면 결국 제자는 점점 바보가 될 수밖에 없다. 교육을 받아도 덜 떨어진 인간만을 양산할 뿐이다. 교육이 그런 결과를 원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스승을 넘어서지 않는 한 인류에게 발전은 없다. 따라서 "스승을 넘어서라"는 그들의 주장은 "전복의 철학"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발전의 철학”인 셈이다.

 임제는 “무위진인(無位眞人)”으로 살라고 이야기했다. 이는 '자리가 없어야 참다운 사람‘이라는 뜻인데, 이처럼 모든 자리, 즉 일체의 권위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참된 사람이 될 수 있음은 통렬한 가르침이다.

 맞는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아들을 가진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타인으로부터 "애비보다 아들이 낫네!"라는 말을 자신에 대한 최고의 찬사로 여긴다. 아들이 자신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의 모든 아버지야말로 최고의 스승인 셈이다.

 긴 연휴였다. 듣자하니 내년은 추석은 휴가 하루를 넣으면 열흘 연휴라고 한다. 미리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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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주교좌란 원래 교회의 의식 때 주교가 앉는 의자를 말한다. 따라서 이 의자는 주교의 권위나 가르침 혹은 직위를 나타낸다. 그러기에 주교좌 성당이란 주교의 좌가 있는 성당을 말한다. 주교좌 성당은 교구의 중심 교회로서 주교가 직접 관할하며 미사도 집전한다. 주교는 교구 내 어느 교회에서도 머물 수 있으나, 상주하는 특정한 교회를 지정하여 영구적으로 관할하는데, 이 성당을 주교좌 성당(대성당)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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