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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희곡

프리드리히 실러 5막극 희곡 『빌헬름 텔(Wilhelm Tell)』

by 언덕에서 2016. 8. 11.

 

 

 

프리드리히 실러 5막극 희곡『빌헬름 텔(Wilhelm Tell)』

 

독일 극시인 프리드리히 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1759.11.10∼1805)1의 5막극의 희곡으로 1804년 발표되었다. 전설을 바탕으로 한 역사극으로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스위스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텔’을 주인공으로 하여 실러의 근저사상인 자유의 문제를 취급한, 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대중성이 풍부한 작품이다.

 자유 독립의 정신이 강한 스위스 사람들은 태수의 이유 없는 압제에도 은인자중하며 살았다. 인내에도 한계는 있는 법.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스위스 사람들은 마침내 활의 명인 빌헬름 텔을 중심으로 굳게 뭉쳐, 포악한 태수 게슬러를 쓰러뜨리고 자유와 독립을 지켰다. 

 유럽에서는 스위스가 아닌 그리스에서도 텔에 관련된 유물이라는 것이 많이 있으며, 그를 기념하는 사원과 기념물도 있고, 또 이 나라의 우표에도 그의 초상이 사용되고 있지만, 실지로는 전설적인 인물이라 한다. 텔의 이야기에 관해서는 괴테가 1797년 스위스 여행시 텔의 사실(史實)을 제재로 한 서사시를 쓰려고 구상하고 있던 중 실러도 1802년경 츄디의 스위스 연대기를 읽게 되어 한 줄기의 암시를 얻어 그는 괴테에게,  “당신이 쓰려고 하는 텔의 이야기를 나도 희곡으로 쓰려는데 당신께서는 이의가 없는지요?” 하고 물었더니 괴테는 쾌히 승낙할 뿐만 아니라 텔에 관한 자료까지 양보해 주었다고 한다. 이 원고를 후일 괴테에게 보냈을 때, 뛰어난 좋은 작품이라고 칭찬하고 자신의 작품인 양 기뻐하였다고 전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3세기 말엽, 스위스의 3주는 오스트리아의 지배 하에 있었다. 당시 알브레히트 황제는 대단히 탐욕하고 잔인한 자로, 제위를 얻자 스위스의 약소함을 깔보고 그 영토를 함스브르크 가문의 것으로 만들려고 야심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야심에서 가장 횡포한 자를 스위스 3주의 태수로 보내어 혹정(酷政)을 하게 하였다. 반항하면 그것을 구실로 전쟁을 일으켜 스위스를 삼키려는 속셈이었다.  

 새하얀 눈과 얼음으로 덮인 알프스 산꼭대기에는 아름다운 호수와 초록색 목장이 있다. 사람들은 거기서 사냥도 하고 물고기를 잡기도 하며, 또는 소를 키우면서 겉으로는 평화롭기 이를 데 없는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내막을 알고 보면, 벌써 오랜 세월 동안 포악한 태수들의 학정에 괴롭고 고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알토르프 마을에는 특히 그 학정이 심했다. 성을 쌓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모진 일을 하여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태수인 게슬러는 마을 넓은 초원에 장대를 세우고 그 위에다 모자를 씌운 뒤 누구든지 거기에 인사하고 지나도록 강요하였다.

 어느 날, 텔은 장남인 발터를 데리고 그곳을 지나가다가 모자에 경의를 표하지 않은 죄로 용병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악하고 심술궂은 태수 게술러는 텔의 아들 발터의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놓고 그 사과를 활로 쏘아 맞히면 용서해 주겠다고 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실수한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 것인가? 게슬러는 어쩌면 그러한 불행스런 사태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텔은 게슬러에게 아무리 빌었으나 텔을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텔은 모질게 결심하여 활을 쏘았다. 화살은 사과 한가운데 정통으로 맞았다. 주민들 사이에 만세 소리가 터졌다. 그것도 잠시뿐, 텔의 허리춤에 있었던 또 하나의 화살이 자신을 쏘아 죽이려던 것이었음을 알았을 때 게슬러는 텔을 가만두지 않았다. 죄인으로 배에다 싣고 자기 성으로 연행하여 갔다.

 그러나 연행되는 도중에 텔은 폭풍이 부는 시간을 이용해 탈출에 성공하게 되고, 끝내는 바위산 위에서 게슬러를 쏘아 죽이는 데 성공한다.

 스위스 마을마다 종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자, 일찍부터 때가 오기를 기다리며 봉기 태세에 있던 스위스 3주의 백성들은 일제히 들고 일어나게 되었다. 그들은 태수의 성을 공격하여 이를 함락시키고, 폭군의 주구(走狗)들을 나라 밖으로 추방해 버리고 말았다. 모든 사람들은 한데 뭉쳐 “텔 만세! 텔 만세!”를 소리높이 외쳤다.

 폭풍이 사라진 스위스의 마을에는 평화로운 태양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동양의 대표 고전문학이 '삼국지'라고 한다면 서양의 그것은 '빌헬름 텔'이라고 할 정도로 서양인 전체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작품이다. 빌헬름 텔 전설(Legend of Wilhelm Tell)은 스위스에 전해 내려오는 영웅 빌헬름텔에 관한 전설로 스위스는 한때 오스트리아 함스부르크 가(家)의 지배를 받아 왔다. 이 무렵 스위스인들은 오스트리아에서 파견한 관리들의 압박정치에 매우 시달렸다. 이 시대를 배경으로 생겨난 것이 이 전설이다.

 빌헬름 텔은 정치적ㆍ개인적 자유를 위한 투쟁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텔이 역사적으로 실존한 인물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통속 전설에 따르면 그는 13세기와 14세기초 우리 주뷔르글렌 출신의 농부로서 오스트리아의 권력에 대항하다가 아들 머리 위에 놓인 사과를 쏘아야 했으며, 총독의 생명을 위협했다는 이유로 체포당했고 감옥에 가는 도중 그 총독의 생명을 구해주고 도망쳤지만 결국 매복하고 있다가 총독을 죽였다고 한다. 아마도 이 사건들이 다른 사건들과 함께 오스트리아 통치에 대항하여 봉기하라는 신호가 되었으리라고 추측된다.

 이 전설의 고전적 형식은 길크 추디가 쓴 <위스 연대기>(1734~36)에 나타나는데, 이 책에 따르면 텔의 행동 날짜는 1307년 11월이고 스위스가 해방한 것은 1308년이다. 그렇지만 텔이 존재했는지에 관한 분명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활의 명수를 시험한 이야기는 민담에 널리 퍼져 있었으며,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삭소 그람마티쿠스의 <덴마크 인의 업적>에 기록되어 있고, 또한 영국의 민요 <클라우즈리의 윌리엄>도 비슷한 내용이다. 민족 혁명의 시대인 초기 낭만주의시대에 텔의 전설은 독일의 극작가 J.C.`프리드리히 폰 실러가 쓴 감동적인 희곡 <빌헬름 텔>(1804)을 통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정의와 평등과 자유를 사랑하는 실러의 정신이 이 작품을 통해 뚜렷이 표현되었다. 전 작품 안에 맥맥이 흐르는 것은, 인간 본연의 자유라는 관념에다가 조국의 독립이라는 알기 쉬운 형식을 취한 것으로, 일종의 자유주의 정치극이다.

 의용의 지사 텔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의 활약이나 운명을 희곡적으로 그리는 것이 목적은 아니며, 스위스 3주의 민중 전체가 지배자의 압제에 반항하여 궐기하였다는 사실도 주제가 아니며, 승리를 획득하게 된 그들의 자유와 정의의 정신을 주인공으로 한 희곡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훗날 독일 국민이 외적의 압박 아래 고통을 당했을 때나 국운이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마다 애국적 적개심을 북돋우고, 용기를 준 것은, 실로 실러의 이 <빌헬름 텔>이라 한다. 극의 내용이 오스트리아의 악정을 풍자한 폭군 살해의 극이라는 이유로 오스트리아에서 배척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이 극이 비인에서 처음으로 상연된 것은 발표된 지 23년 후인 1827년의 일이었다.

 

  1. 독일의 시인·극작가.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재학중에 쓰기 시작한 《군도(群盜)》를 극장에서 상연함으로써 큰 호응을 얻었고, 이는 독일적인 개성 해방의 문학운동인 '슈투름 운트 드랑'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독일의 국민시인으로서 괴테와 더불어 독일 고전주의문학의 2대 거성으로 추앙받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프리드리히 실러 [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두산백과)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