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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일화(逸話) 둘

by 언덕에서 2016. 4. 26.

 

 

 

일화(逸話)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방향 감각이 무뎌지는 날이 있다. 그날도 그랬다. 모처럼의 서울행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한성대 역에서 지하철 4호선을 타고 서울역에서 1호선으로 환승하여 시청역으로 가는 길이었다. 오후 4시 반, 1호선 전철 안으로 발을 디뎠는데 빈자리가 하나 보였다. 그때 나는 순간적으로 실수를 한 거다. 한 구역만 가면 되므로 그냥 서있다 다음 역에 내리면 되는데 잠시라도 편해지자는 욕심에 빈 자리에 앉고야 만 것이었다. 옆자리에는 점잖은 노인 신사 한 분이 앉아 계셨다. 그런데 앉으니 바로 다음 역에 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그래서 앉자말자 바로 일어서고 말았다. 내리기 전에는 항상 문 앞에서 준비를 해야 한다는 오랜 강박관념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 짧은 순간에 두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내가 앉았던 자리 바로 옆에 앉은 분 입장에서는 불쾌할 수가 있겠다는 생각이 하나였고, 그 노인 신사가 무척 눈에 익은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째 생각은 노인천시의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당사자인 그분이 행여 느꼈을지 모르는 모멸감이 있을 수 있겠다는 나의 노파심이었고, 두 번째 생각은 그분이 방송매체를 통해 여러 번 만난 분이 분명하다는 사실이다.

 차이나 컬러 드레스셔츠를 입고 전철 내 옆자리에 앉아계셨던 그분은 지난 17대 대선 때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강지원 변호사가 틀림 없었다. 순간 ‘실례했습니다’라는 인사말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시청역입니다’라는 차내 방송 멘트가 울리기 시작했고 나는 열린 문을 통해 급히 내려야 했다.

 그분 입장에서는 자신을 유심히 쳐다보는 것으로도 모자라 (무슨 이유인지) 자리에 앉자말자 일어서는 내가 불쾌했을 것이다. 늦게나마 사과 말씀 올린다.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호감 갖고 있는 분을 전철에서 만나 뵈리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고, 그날 저의 일정은 너무 바빴습니다. 오해 마시기 바랍니다.”

 

 

 

 

 


 동창회나 모임 등에서 친구들을 만나서 사는 얘기를 듣다보면 뻔한 소재의 이야기에 똑같은 귀결에 이르게 된다. 

 “사사건건 국정에 발목을 잡고 철 지난 운동권 논리에 사로잡혀 있는 야당 꼴 보기 싫었으나, 고집불통에다 타협을 모르는 데다 민주주의의 기본조차 모르는 정부 여당이 더 싫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가, 국민을 계속 졸(卒)로 보고 있다. “

 PK에서는 여소야대까지는 안 되었지만 여당의 텃밭이라는 공식이 무너진 것만은 분명해보였다. 우리 동네에서는 과거 독수리 5형제 중의 막내로 YS 곁을 떠나 야당의 길을 택했던 이가 고향으로 내려와 4년간 야인 생활을 한 끝에 금배지를 달게 되었다.

 낙선한 여당 국회의원은 옥스퍼드 대학 경제학 박사 출신으로 인격자에다 여권에서는 보기 드문 경제학자라고들 했다. 그러나 동네가 변한 것이 없는데다, ‘대통령의 최측근’이라는 지난 선거의 캐치프레이즈가 이번 선거에서 독(毒)이 되었을 것이라는 후문이 있었다.

 지난 휴일, 아파트 입구에서 아내와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바다가 보이는 등산로를 가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 누군가 승용차에서 내려서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우선 아내에게 악수를 청했고 다음에는 내게 악수를 청했다. 나는 악수에 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간 고생 많았어요.”

 이건 친하든 말건 간에 동양적인, 너무나 동양적인 화법이다. 그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우리 앞을 사라졌는데, 뒤돌아서서 가는 곳을 응시하니 골목 안의 작고 조촐한 식당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낙선한 여당 국회의원, 그였다.

 언젠가, 퇴근길이었는데 당시는 선거 유세가 한창이던 때였다. 그의 보좌관들이 내게 다가와 ‘의원님께 인사하시죠.’하는 바람에 내가 그를 벌레 보듯 바라본 적이 있다.

 내가 보는 관점에서는 ‘오만’이라는 덧이 그에게 패배를 안겨준 것으로 보인다. 무엇이든지 원인 없는 결과란 있을 수 없다. 선거에서는 졌지만 ‘인생살이’라는 무대에서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된 것에 그는 감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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