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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철학서

에피쿠로스의 쾌락은 무엇이었을까? 『쾌락』

by 언덕에서 2016. 3. 17.

 

 

 

 

에피쿠로스의 쾌락은 무엇이었을까? 『쾌락

 

 

 

 

 

 

 

 

에피쿠로스(Epikouros.BC 341∼BC 270)는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철학자이며 유물론자이다. 아테네에 학교를 세우고, 이것을 '정원학교'라 불렀다. 헬레니즘 시대란 그리스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로부터 시작된 외세의 침입을 받아 그 지배 하에 있었던 시대로, 그로 인하여 그리스 본래의 문화에 외국의 문화가 혼합되었으며, 이 상태는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그리스의 고전적인 철학도 그 모습이 퇴색되어, 주로 개인적인 인생 문제가 주된 관심이었다.

 에피쿠로스 또한 이 인생 문제를 사색의 주제로 삼았다. 그가 300편 가까운 철학서를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지금 전해져 오는 것은 대부분 몇 가지 구절을 모은 단편들 뿐이다. 이 책은 그 단편 조각들을 모은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주장한 철학자다. 쾌락이란 말은 ‘행복’이란 단어와 같은 뜻을 지녔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쾌락’은 흡사 ‘음란’, ‘퇴폐’, ‘문란’ 등과 비슷한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사실 육체적 쾌락보다는 정신적 쾌락에 더 기울어 있었다. 그는 최고의 쾌락을 ‘정신의 평정상태’라고 주장했고, 이를 바탕으로 쾌락주의 학설을 펼쳐나갔다. 그가 단호하게 말한 “쾌락만이 유일한 선(善)이고, 고통만이 유일한 악(惡)"이라는 구절은 후대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육체적 쾌락을 경시하거나 멸시한 것은 아니다. 그는 육체적 쾌락 역시 선한 것이라 생각했고, 그 자신도 육체적으로 자유로운 생활을 즐기기 위해 ‘결혼’이라는 올가미에 걸려들지 않고 독신주의를 고수하였다. 그는 정신적 쾌락이 육체적 쾌락보다 한 단계 더 격이 높은 것이라 주장했다.

 그의 쾌락주의 배경에는 확고한 유물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영혼이나 신(神) 따위의 존재를 확고하게 부정했다. 그리고 신에 대한 숭배를 전제로 하는 종교 행위를 미신이라고 확신했다. 신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또한 ‘도덕’을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도덕이 행복의 조건은 되지만 행복 그 자체는 아니라고 본 것이다. 즉 다시 말해서 한 개인이 덕성(德性)을 쌓는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해지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행복이란 ‘성취’를 높여가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줄여나가는 데서 생긴다고 주장했다. 유교나 기독교와는 비슷하면서도 매우 다른 헬레니즘적인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한 ‘욕망’은 쾌락에 대한 욕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세속적 출세욕과 물욕을 의미한다. 즉 육체적 쾌락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정치적 출세욕’을 줄여가야만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죽을 때까지 어떤 공직도 맡지 않고 다만 학교 선생으로 살았다. 그는 정치참여야로말로 불행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는데 플라톤의 정치만능주의와 비교되는 대목이다.

 

 

 

 

 

 

 

「에피쿠로스주의(Epicurianism)」란 본래 에피쿠로스의 학설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에피쿠로스가 주장하는 쾌락주의가 전용되어 감각적 향락주의, 즉 육체탐닉이라든가 식도락 등을 의미하게 되었다. 에피쿠로스주의자라는 명칭도 이러한 향락주의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되었다. 이것은 관념론자들이 유물론을 공격하는 재료로도 삼아 왔다. 또 원자론이나 무신론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에피쿠로스학파(Epicurean school)」라는 용어는 에피쿠로스의 학설을 신봉한 파를 말한다. 에피쿠로스가 죽은 뒤 이 학파는 약 600년간 계속되었으나, 그동안 스승의 학설을 변경하거나 발전시킨 사람은 없으며, 오직 한 사람 눈에 띄는 제자로는 루크레티우스(BC 94-BC 55?)가 있을 뿐이다. 그는 <만물의 본성에 대하여>라는 책을 써 에피쿠로스의 원자론 및 쾌락설을 상세히 논하였다.

 에피쿠로스의 저서는 대부분 산일(散逸)하여 겨우 단편적(斷片的)인 것밖에 남아 있지 않는데 에피쿠로스의 사상은 이 책에 의해 후세에 전해진 셈이다. 그의 쾌락주의는 감각적인 쾌락을 물리치고 간소한 생활 속에서 영혼의 평화를 찾는 데 있었다. 따라서 원자론을 기초로 하는 그의 방대한 체계는 이 윤리적 생(生)의 실현을 초점으로 하였다. 그러나 이 학파는 쾌락주의라는 표면적인 주장 때문에 많은 오해와 비난을 받아왔다. 그러다 겨우 근세에 와서야 P.가생디가 에피쿠로스 철학을 부흥시켜 이것이 J.로크를 통해 영국 경험론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한편 오늘날 쾌락주의자라는 뜻으로 쓰이는 ‘에피큐리언’은 원래 ‘에피쿠로스의 무리’라는 뜻이다.

 

 

 

 

 '쾌락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에피쿠로스는 고대 그리스 시대에 자신의 학파를 일구어냈던 저명한 철학자이다. 그는 때로는 비수 같은 언어로, 때로는 따뜻한 설득의 언어로 '쾌락이란 무엇인가?'라는 명제를 추적했다.

 사람들은 흔히 에피쿠로스를 쾌락주의자라고 말하지만, 에피쿠로스가 추구한 쾌락은 '모든 정신적·육체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특히 순간적이고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했던 퀴레네 학파1와는 달리, 에피쿠로스는 지속적이고 정적인 쾌락을 추구했다. '아타락시아'란 바로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평안한 상태'를 가리킨다.

 그의 철학은 그가 살았던 시대와 나란히 간다. 알렉산더 왕이 죽은 이후 권력 투쟁 속에서 그리스는 피폐되어갔고, 국가를 지탱하던 중류층도 점차 빈민화되어갔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의 개인주의의 대두와 무관치 않다. 저 자신에만 의존하여 어떻게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것인가? 그러나 그의 철학은 '개인'의 틀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개인이 관계 속에 있는 개인임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철학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새롭게 떠올려볼 가치가 있다. 국가 질서, 나아가 세계 질서의 급격한 변화와 더불어, 탐욕스런 이기주의와 경박한 쾌락주의가 휩쓸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에피쿠로스의 성찰로부터 소중한 깨달음과 지혜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믿음에 익숙해져라. 왜냐하면 모든 좋고 나쁨은 감각에 있는데, 죽으면 감각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게 되면, 가사성2도 즐겁게 된다. 이것은 그러한 앎이 우리에게 무한한 시간의 삶을 보태어주기 때문이 아니라, 불멸에 대한 갈망을 제거시켜 주기 때문이다.--- p.43

 

 

 

 

 

 

 

 

  1. 고대 그리스철학 학파의 하나.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아리스티포스(Aristippos)의 출생지인 북아프리카 퀴레네에서 시작된 학파. 소크라테스가 주창한 인격의 가치의 내용은 쾌락에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것은 지적(知的)인 쾌(快)라 설명하며 쾌락주의를 설파하였다. 이 학파의 후계자로 무신론자라 불린 테오도로스(Theodōros, B.C. 4세기)는 영구적 쾌를 추구, 이것을 정신적인 행복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나아가 헤게시아스(Hēgēsias, B.C. 3세기)는 소극적인 쾌, 즉 쾌는 추구해도 얻기 어렵기 때문에 고통 없는 상태에 그치고자 자살을 주장하였다. 이 학파는 사회적 견해로서 노예제 하의 귀족지배를 옹호, 그리스 노예제 몰락 과정에서 귀족의 의식을 표현하고 있다. [본문으로]
  2. 일을 시킬 만한 성질.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