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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철학서

『방법서설(方法序說.Discours de la methode)』 어떤 책일까?

by 언덕에서 2015. 11. 5.

 

 

  

 

『방법서설(方法序說.Discours de la methode)』어떤 책일까?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Descartes Rene.1596∼1650)의 저서로 1637년 네덜란드에서 간행되었는데 '이성의 올바른 사용과 과학적 진리의 발견을 위하여'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이 저서는 인간의 이성적 사유가 반드시 따라야 할 규범들을 확립하고, 지식의 체계를 세우기 위한 출발점으로서 '의심'을 비판의 적극적 수단으로 삼는다. 그리하여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형이상학적 근본명제에 도달한다.

 이 작품은 절대적으로 확실한 진리의 가능성을 인간 이성의 능력 속에서 찾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합리론 철학의 전형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데카르트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기본적인 입문서이다.

 데카르트의 초기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이 철학서는 정신지도 규칙과 데카르트의 철학적 사유방법으로서의 방법 서설 등이 설명되어 있다. 『방법서설』은 원래 네 편의 글로 이루어진 것으로 이 책에서 번역한 『방법서설』은〈굴절광학〉,〈기상학〉및〈기하학〉에 앞서는 첫 번째 에세이로서 뒤의 자연과학적 주제를 탐구하기 위한 서론이다.

 

 

 

 

 

 

 

 『방법서설』의 정확한 표제는 '이성을 올바르게 인도하고, 제 학문에 진리를 구하기 위한 방법론, 부(附) 이 방법을 시험한 굴절광학ㆍ기상학 및 기하학(Discours de la methode pour bien conduiresa raison et chercher la verite dans les sciences, plus la dioptrique, les meteores et la gemetrie, qui sont des essais de cette methode)'이다.

 대개 『방법서설』을 칭할 때 '서문에 해당하는 방법서설의 부분'만을 독립시켜 지칭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 논문 속에는 만인에 공통된 이성이 명백히 인정하는 것이 아니면, ‘어떠한 것도 진(眞)으로서 받아들이지 말 것’이라는 명제(命題)로부터 출발하여, 일체를 의심하되, ‘생각하는 나(Cogito ergo sum)'만은 의심할 수 없다는 적극적인 단정에 도달하는 것으로서, ’그의 방법‘뿐만 아니라, 그의 철학의 근저의 성립 과정을 기술한 ’정신적 자서전‘이다.

 이 저서는 무엇보다도 '방법의 이야기'이다. 그것도 자기 자신의 학문적 생애를 이야기한다는 형식을 취하여 학문 연구의 방법과 형이상학ㆍ자연학의 개요를 논술하고 있다. 결국 기성 권위에 의하지 않고 자신의 두뇌로써 사물을 사고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을 좇아야 하는가를 스스로 탐구해 온 저자의 정신 역사를 솔직하게 논술하였다.

 이 책은 프랑스어로 씌어진 최초의 철학 문헌으로서 높이 평가되지만, 사실은 라틴어 번역이 나온 후 유명해졌다. 데카르트 자신이 강조하고 있듯이 이 책은 누구를 ‘가르치기 위한 논문’이 아니라 진리 탐구를 위해 자신이 설정한 방법과 그 결실을 ‘보여주기 위해’ 쓴 글로 보인다. .

 

 

 

 

 

 

 

 

 아주 짧은 분량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유럽 사상계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철학하는 방법'을 네 가지로 압축하여 소개하고 있지만, 그 내용이 너무나 상식적이어서 그것 자체만으로는 큰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방법서설』이 유명해진 이유는 '철학하는 방법'을 요약해서가 아니라, 그가 오랜 사색 끝에 발견한 '진리에 가장 가까운 명제'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명제다. 데카르트는 감성이나 감각의 존재를 무시하고 오직 '생각하는 이성'만이 인간의 속성을 대변해줄 수 있는 진리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의 주장을 대하노라면 궁금증이 생긴다. 우리를 '생각'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감각과 감성이다.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진한 행복함이 느껴지고, 그런 행복감이 느껴지려면 어떤 방식으로든 감각을 교환해야 한다. 후각과 미각을 통해서 그리고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는 식욕을 느낀 후 음식을 먹게 되고 그 뒤에 비로소 "나는 다음에도 또 이 음식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하기 위해서는 '이성'뿐만 아니라 감성과 감각 역시 중요한 요소인데 그는 이점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데카르트는 학문(철학)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기존의 진리들에 대해 의문을 품는 ‘회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1+2 =3’이라는 수식이 틀릴 수도 있으며, 과학적으로 증명된 확실한 다이아몬드 광석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유리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맞는 논리인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데카르트는 그렇게 우리의 인식이 틀릴 가능성이 있다는 근거로 “신(神)이 우리를 틀리게 인식하도록 만들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갑자기 신이 끼어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철학적으로)신의 존재 가능성을 어떻게 증명한단 말인가? 그가 살았던 신권주의 시대의 부산물인 이 철학서의 한계이기도 하다. 당시 암울한 시대의 부산물은 철학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던 셈이다.

 

 

 

 

 

 

 

 데카르트는 여러 저서에서 신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을 애썼다. (신학을 제외하고)신의 존재 여부에 관한 문제는 사실 그 누구도 증명할 수 없는 불가지론에 속한다. 그런데도 그는 (철학이란 학문을 동원해서)온몸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 그 까닭은 그가 살았던 시대가 신권주의 시대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가 정말 어리석은 인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이성을 인간만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전유물로 인식했다는 것은 커다란 오판이었고, 그러한 오판은 몇 세기에 걸쳐 인간을 가장 오만방자한 동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런 오만방자함이 행동으로 실천된 것은 후세의 '무분별한 자연 파괴'와 '잔인한 동물 학대'였다.1 

 이성은 인간에게만 선천적으로 부여된 특권은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후천적 교육을 통해서만 만들어진다. 유아기의 교육은 그래서 중요하다. 데카르트는 칸트 등의 다른 이성론자들과 비슷하게 이성을 '신의 선물'로 보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신이 아니라 올바른 교육을 통해서 이성은 만들어진다.

 

  1. <마광수의 인문학 비틀기 [본문으로]</마광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