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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철학서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의 『자유론(On Liberty)』

by 언덕에서 2015. 11. 13.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의 『자유론(On Liberty)』 

 

 

공리주의1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의 『자유론On Liberty』은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쯤에 나온 책이다. 이 책은 그가 살았던 영국을 비롯 프랑스, 독일 등 유럽의 독자들을 겨냥해 쓴 것이다. 그런데 밀의 『자유론』을 곰곰이 읽다보면 자꾸 우리 사회의 이런저런 모습들이 눈에 아른거린다. 마치 밀이 2000년대 초엽의 한국 사회와 한국인, 특히 한국의 지식인들을 향해 이 책을 준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밀의 『자유론』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를 향한 경구로 가득하다.

 

 

 개인의 자유는 자신의 사고와 말, 행위가 다른 사람들을 해치지 않는 모든 범위에서 절대적이다. 국가의 법률이나 일반적인 도덕적 판단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을 약간 현대적 표현으로 바꿔본다면, 누구도 다른 사람이 동성애를 하거나, 술에 취하거나, 텔레비전 앞에서 잠을 자거나, 돈을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거나, 개고기를 먹는다거나 하는 것 등을 방해할 수 없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누구도 타인에게 단지 그들의 태도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생활양식을 방해할 수 없다. 즉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개고기를 먹는 것보다는 현미밥을 먹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 결정은 당사자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술을 마시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른 사람이 좋아서 하는 음주를 막을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이 그 일을 통해 손해를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애주가가 10분 만에 맹장을 제거해야 하는 외과의사이거나, 교통버스 기사라면 사정은 달라진다(모든 음주운전은 마찬가지다). 그런 경우에는 국가의 법이 그 일에 개입하게 된다.

 

 

 밀에 따르면, 도덕적인 행위는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규정되지 않고 개인의 경험과 확신에 근거할 때만 어느 정도 유용하다. 의견의 옳고 그름에 대해 정치문화가 어느 정도 강제적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옳은 의견과 행동의 강제성은 있을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밀은 런던에서 토크빌☜을 만났을 때 그에게 동감하며, 누구도 다수의 독재에 맞추기를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밝힌다. 사람은 실수할 수 있다. 하나의 의견이 다수에 의해 지지를 받는다고 해서 당연히 옳은 것은 아니다. 사회는 의견의 차이를 요구한다. 그 사회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소수의 견해를 경청해야 하며 아웃사이더들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떤 일을 하도록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밀과 토크빌이 동감한 점들이다.

 인간은 자신의 의견을 바꿀 수 있기 때문에 밀은 사상과 토론의 자유를 고집한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을 억압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밀은 풍속이 엄격한 빅토리아 사회에서 살았다. 그는 개인의 절대적 자유를 위한 변론을 일상 경험으로부터 썼다. 일상에서는 도덕적 감시가 공중(公衆)을 통해 상상할 수 없는 정도로 철저히 행해졌다. 시민적 예절에 대한 엄격한 요구는 짙은 안개처럼 사회 전체의 틈을 통해 사적인 생활공간으로 침투했고, 통상적 규칙에 벗어나는 누구도 그냥 두지 않았다.

 밀은 사회 정치적 측면에서 본다면 개인의 사상과 행동의 절대적 자유라는 이념은 다른 이념을 해치지 않는 한 보장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의견의 다원주의와 소수의 발언의 자유, 다양한 삶의 방식들의 존중, 진리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 개인의 불가침성, 공중의 의견으로부터 의식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자유, 사회의 아웃사이더, 자유로운 토론, 어떤 일을 위한 이익집단을 조직할 수 있는 권리, 도덕의 독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권리 등을 옹호했다. 그런 측면에서 21세기 다중문화사회에서 밀은 여전히 교훈적이다.

 

 

 밀은 나와 다른 의견, 다수와 다른 소수 의견이 옳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지적하고, 나와 다른 의견, 소수 의견을 억압하거나 무시하지 않는 자세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한다.

 “(사회는) 개인의 사사로운 삶 구석구석에 침투해, 마침내 그 영혼까지 통제하면서 도저히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는다. 사회는 이런 방법을 통해 다수의 삶의 방식과 일치하지 않는 그 어떤 개별성도 발전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아예 그 싹조차 트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급기야는 모든 사람의 성격이나 개성을 사회의 표준에 맞도록 획일화시키려고 한다.”

 밀이 말하는 자유란 이처럼 직접적인 억압뿐만 아니라 삶의 모습이 표준화되고 획일화되면서 개인의 다양성이 위축되는 사회 자체를 염두에 둔 것이다. 그래서 밀은 『자유론』에서 “인간 사회에서 누구든, 개인이든 집단이든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 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며 이 유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명사회에서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권력의 행사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감정과 자신이 처한 환경에 대해 다른 그 누구보다도 더 정확하게 판단할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각자에게 맡겨두고 간섭하지 않는 것이 본인을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나 최선의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를 볼 때 분명히 자유가 통제되어져야 하는 상황이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사회가 개인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의 한계를 이야기하며 다루고 있다.

“전체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 그것은 마치 어떤 한 사람이 자기와 생각이 다른 나머지 사람 전부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만큼이나 용납될 수 없다. 생각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현재 세대뿐만 아니라 미래의 인류에게까지 강도질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흔히 자유에 대한 억압을 생각할 때 ‘폭력과 강압을 앞세운 독재 권력’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인류의 역사는 이런 지배자의 권력 남용에 대한 견제와 투쟁으로 이어져 왔고, 그 결과 오늘날의 자유 민주주의 체제가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런 독재 권력은 대다수 국민의 저항에 부딪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존립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대중 민주주의가 자리 잡은 오늘날, 과연 개인의 자유는 충분히 보장되고 있는 것일까? 이같이 개인의 자유에 대한 의문을 최초로 제기한 사람이 바로 존 스튜어트 밀이다.

 

 

 밀은 이 책을 통해 개인의 자유, 특히 사상과 언론의 자유가 권력이나 사회의 여론에 의해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밀이 지향하고자 했던 자유 민주주의의 본질은 다른 의견, 특히 소수 의견에 대한 존중과 배려에 있던 것이다.

 물론 이런 개인의 자유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지 않는 한”이라는 사회적 제약이 따르지만 밀이 보다 무게를 두었던 것은 사회적 공익보다는 개인의 자유였다. 또한 밀은 대중 민주주의 사회가 될수록 정치 선동이나 대중 여론 등을 통해 개인 의사에 대한 통제나 제한이 강화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우려했는데, 이 점은 대중 민주주의가 일반화된 모든 사회에서 반면교사가 된다.

 이처럼 민주주의와 자유의 문제를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보며 그 개념을 명확히 세우고자 했기 때문에, 『자유론』은 오늘날 대다수 국가가 지향하는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이론적 토대를 세웠다고 평가되는 그야말로‘살아 있는’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1806.5.20~1873.5.7) : 영국의 경제학자ㆍ철학자ㆍ사회과학자ㆍ사상가. 런던 출생. 경제학자 J.밀의 장남으로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조기교육을 받았다. 밀 자신의 말에 의하면 3세에 라틴어, 8세에 그리스어, 12세에 논리학을 터득하였다고 한다. 이미 10대에 어엿한 지식인으로 성장하여 아버지가 근무한 동인도회사에서 일하면서(1823) 한편으로는 문필생활을 시작하였다.

   소년기에 읽은 J.벤담의 저서에 영향받고, 공리주의에 공명하여 공리주의협회의 설립에 참가하여 연구 ·보급에 힘썼다. 그러나, 1826년 우울증에 걸린 것이 전기가 되어 감정을 경시하고 이성을 만능으로 보는 공리주의에 의문을 품게 되었으며, 칼라일, 워즈워스, 콜리지 등의 영향을 받아 사상적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65∼1868년 하원의원이 되었으며, 사회개혁운동에도 참가하였다.

   대표적인 경제학 저서에 <경제학 시론집>(1830)과 <경제학 원리>(1848) 등이 있는데, 그는 A.스미스나 D.리카도 등의 영국 고전파 경제학 이론을 계승하면서도, 경제공황이나 빈곤 등 새로운 역사적 과제에 대해서도 고려하여, 종래의 고전파 이론의 재구성과 보완을 시도하였다. 즉, 자연적인 생산법칙에 의하여 발생한 사회적 곤란을 분배의 인위적 공정(公正)과 사회의 점진적 개혁에 의해서 회피하려는 이론을 전개하였다.

   또한 사회과학의 방법론적 반성으로서 저술한 <논리학체계>(1843), 종래의 공리주의적 자유론을 대신하여 인간정신의 자유를 해설한 <자유론(On Liberty)>(1859), 정치상의 대의제와 분권제의 의의를 강조한 <대의정체론>(1861) 등이 있고, 그 밖에 <공리주의>(1863) <해밀턴 철학의 검토>(1863)등의 철학적 저서와, 영국의 여성해방사상 기념비적 문헌이 된 <여성의 종속(The Subjection of Women)>(1869) <자서전>(1873) <종교에 관한 에세이 3편>(1874) <사회주의론>(1879) 등이 있다.

  그의 사상은 만년에는 점차 사회주의에 가까워져 갔지만, 그의 사회주의는 그 후의 영국에서 마르크스주의와는 다른 개량주의적 사회주의로 발전하였다.

 

 

☞토크빌(Alexis (Charles-Henri-Maurice Clérel) de Tocqueville 1805 ~ 1859) : 프랑스 파리 출생으로 미국의 교도행정 개혁을 연구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의 민주주의>를 저술했다. <미국의 민주주의> 첫 부분으로 인해 정치학자로서 즉각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1933년부터 영국을 방문, 철학자이며 급진개혁가인 존 스튜어트 밀과 교류했다. 프랑스로 돌아온 이후 <미국의 민주주의>의 마지막 부분을 저술, 1840년에 출간했다. 이 시기 정치에 입문했고, 1849년 6~10월, 짧은 기간 외무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1851년 12월 2일에 일어난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에 반대하다가 투옥되고 신체제에의 맹세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모든 공직을 박탈당했다. 1856년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 혁명>을 출판하는 등 역사연구에 집중하며 마지막 생애를 보냈다.

 

 

  1. 공리주의 이론은 어떤 행위는 행복을 증진시키려고 할 때 옳은 행위이고 반대의 경우는 그른 행위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이란 행위자의 행복이 아니라 행위의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의 행복이다. 벤담이나 밀은 쾌락과 고통이 인간행위에 동기를 부여한다고 믿었다. 밀은 행복이 인간행위의 유일한 목적이기 때문에 행복의 증진은 모든 인간행위를 평가하는 기준이라고 보았다. 벤담은 인간은 행동할 때 항상 자신의 쾌락을 최대화하고 고통을 최소화하려 하며, 그러한 행동이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에 최대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보았다. 많은 철학자들이 공리주의 이론을 수정·발전시켜 ‘규칙 공리주의’, ‘이상 공리주의’, ‘소극적 공리주의’ 등을 제시했다. G. E.무어, 스티븐 툴민, 패트릭 노얼 스미스 등이 대표적 인물들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