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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김영하 장편소설 『검은 꽃』

by 언덕에서 2016. 2. 13.

 

 

 

김영하 장편소설 검은 꽃 

 

 

 

 

 

김영하(金英夏, 1969~ )의 장편소설로 2004년 발간되었다. 그해 [동인문학상] 수상작이다. '검은 꽃'은 용설란으로도 불리는 멕시코 사막에서 자라는 '에네켄'이라는 선인장 류의 식물을 의미한다. 밧줄이나 포대 등의 원료로 쓰인다.이 작품 『검은 꽃』은 1905년 멕시코로 떠난 한국인들의 이민사를 그려낸 장편소설로 "가장 약한 나라의 가장 힘없는 사람들의 인생 경영을 강렬하게 그린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안고 멕시코행 기선에 승선한 1,033명 중 소설 속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열 한 명의 한국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외려 희망에의 배반이었다. 에네켄농장1의 채무노예가 된 그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멕시코 전역을 떠도는 신세로 전락한다. 한번 배반당한 희망은 소설을 관통하는 내내 회복되지 않는다. 낯선 땅 위의 한,국인들은 안주에 대한 꿈을 간절히 이어가지만 멕시코에 불어 닥친 혁명과 내전의 바람, 이웃나라 과테말라의 정변에 휩쓸려 전장을 전전하고, 발밑의 풀뿌리처럼 ‘신대한’을 국호로 내건 소국을 세워보지만 정부의 소탕작전에 의해 대부분 전사하고 만다.

 

<소설 속 조선인들의 주 무대는 유카탄 반도의 메리다였다. 화살표는 조선인들의 이동경로. 이후 조선인들은 베라크루즈 등 멕시코 각지로 흩어진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기울어져가는 대한제국의 운명을 놓고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에 돌입할 즈음인 1905년 4월 영국 기선 일포드 호는 조선인 1,033명을 싣고 제물포항을 출발하여 외교관은커녕 교민 하나 없는 멕시코로 출발한다. 전직 군인, 황족, 양반, 농민, 건달, 노예, 무당, 전직 천주교 신부 등 다양한 계층과 그들의 식솔이 구성원이다. 다양한 출신 성분을 지니고 있지만 재산이 없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 조선인 승객들은 멕시코에 가면 좋은 일자리와 미래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승선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낯선 환경과 에네켄2 농장에서의 가혹한 노동뿐이다. 그들은 대륙식민회사의 농간에 의해 일손이 부족한 멕시코에 채무노예로 팔려간 것이다.

 4년이란 의무기간 동안 그들은 여러 농장에 분산 수용돼 채찍을 맞는 등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착취를 당한다. 간혹 파업이나 봉기 등을 통해 반항을 해보지만  직접적 폭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농장주에 유리한 현지법에 의해 간접적으로 희생을 강요당한다. 4년이란 계약기간이 만료된 이후에도 조선 사람들은 경제적 자립을 이루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멕시코 전역을 떠도는 부랑자 신세가 되어 그들 중 일부는 멕시코에 불어 닥친 혁명과 내전의 바람에 휩쓸려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인다.

 그 와중에 이웃나라인 과테말라에서도 정변이 일어나 혁명군 측에서 군인 출신 조선인들에게 거액을 제시하며 참전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리하여 42명의 조선인들이 과테말라 북부 밀림지대에 도착해 한동안 정부군과 교전하는데, 그들을 이끈 인물이 그곳에 ‘신대한’을 국호로 내건 작은 나라를 세우자고 제안을 해서 명목뿐인 임시정부가 세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소강상태가 지난 후 그들은 과테말라 정부군의 대대적인 소탕작전에 의해 대부분 전사하고 만다. 

 

 

 

 

 이 소설은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처럼 민족의 수난사나 항쟁 등의 궤적을 따라가지는 않는다. 작가는 "계급과 남녀노소를 초월해서 모여 있는 장면"이나 "농장에서 해방 뒤, 갈 곳 몰라 떠도는 유랑의 삶"에 더 관심을 갖는다. 멕시코에 팔려간 이들과 대한제국에 남아 일제의 지배를 받던 이들의 두 부류 가운데 누가 더 운이 좋은가 묻는 것은 의미 없는 물음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소설의 주요 인물인 11명의 무법자들이, 그들이 세웠던 나라가 있던 남미의 밀림 속에서 사라져 간 과정은, "무를 향한 긴 여정"의 종착점이다.  

『검은 꽃』은 1905년 멕시코로 떠난 한국인들의 이민사를 그려낸 장편소설로 2004년 동인문학상 수상 당시 “가장 약한 나라의 가장 힘없는 사람들의 인생 경영을 강렬하게 그린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백 년 전 멕시코로 떠나 완전히 잊혀져버린 이들의 삶을 간결한 문장과 힘 있는 서사로 생생하게 되살려낸 이 작품은 1900년대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에게 뜨거운 울림을 준다.

 소설의 내용은 허구가 아니라 분명한 민족수난사다. '검은 꽃'은 밧줄의 원료가 되는, 용설란이라고도 불리는 에네켄이라는 선인장류의 식물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소설은 비극과 희극이 수시로 교차하면서, 지옥에 비유된 배의 홀수선 아래 선실에서 밀림 속의 피라미드 신전 꼭대기까지, 상승과 하강을 거듭하는 인간 군상의 운명의 기복을 보여주고 있다. 화자는 이러한 아이러니를 통해 지나간 역사의 한 단락을 조명하면서 인간과 세계의 근원적 불완전성을 보여준다.

 '이 소설의 잃어버린 근대의 항해가 앞으로의 항해에 어떤 지침을 던지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다시 잃어버린 자기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어느 문학평론가의  위 표현은 이 소설을 적절하게 요약하고 있다. 이 작가에게 역사의 ‘리얼리티’는 과거의 사라진 순간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 있지 않다.

 

 

 

 

<1905년 멕시코 이민자들. 사진출처 : 국무총리실 블로그>

 

 

 이 작품은 1부 ~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2부는 멕시코 혁명 속의 한국인 발자취에 대해 집중하고 있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는 작가만이 알 것이다. 멕시코 혁명은 1910년 멕시코에서 장기 집권하던 포르피리오 디아스에 대항하여 프란시스코 마데로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시작된 무장 투쟁이다. 멕시코 혁명은 사회주의, 자유주의, 아나키즘, 트로츠키즘, 인민주의, 토지 균본론 운동 등 다양한 사상이 활동하였다.

 혁명은 체제에 대한 반란에서 시작하여 여러 편이 갈린 내전으로 발전하였다. 대립이 계속되다 1917년 멕시코 헌법이 통과되었다. 멕시코 혁명은 대개 1920년까지 지속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1920년대에도 산발적으로 소요가 이어졌다. 또 크레스테로 전쟁(Guerra Cristera)으로 다시 유혈 낭자한 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멕시코 혁명으로 말미암아 1929년 국민혁명당이 결성되었다.(1949년에 '제도혁명당'으로 개칭) 제도혁명당은 2000년 멕시코 총선 때까지 권력을 장악하였다.

 작가는 책의 뒷편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이 많은 연구자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썼다. 이자경3의 <한국인 멕시코 이민사>, 백종국의 <멕시코 혁명사>,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라틴아메리카의 역사>, 서인한의 <대한제국의 군사제도>, 한국인 이민사 전문 연구자 Wayne Patterson 교수의 <The ilse> 등의 서적이 없었다면 이 작품은 시작되지도 못했다고 밝혔다.

 작가는 과거를 끊임없이 현재의 순간과 순간에 연결시킨다. 지나간 시간의 서로 무관해 보이는 경향들, 정념들, 활동들은 과거를 몰입하며 바라보는 그 현재의 순간으로 모여 하나의 덩어리가 된다. 민족적, 보편적이라고 불리던 하나의 제한과 진실은 사라지고 휘발된 가치들은 새롭게 뭉쳐 세계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진정한 현재적 가치는 과거라는 누적된 역사가 던지는 가치이다.

 

멕시코 에네켄(어저귀) 농장의 모습. 멕시코에서도 유카탄 지방에서 만 자라고 있는 용설란과 비슷한 이 식물은 마대나 선박의 로프를 만드는데 쓰여지는데 초기 한인들은 하루에 2천개씩 에네켄 잎을 따서 가시를 없애는 중노동에 시달렸다(사진출처 : 중앙일보).

 

 

 이 작품에서는 한인들이 뿔뿔이 흩어져 일부는 판쵸 비야 편에, 또다른 무리는 사파타 편에, 어떤 이는 오브레곤 장군 편에, 또는 기존 악질 농장 지주 편에서 이합집산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2부는 멕시코 혁명사에 관심 있는 분에게는 일목요연한 역사책이 될 것임을 덤으로 알린다.

 

 


 

 

 

  1. 1905년에 멕시코로 이민을 온 한인들이 생계를 잇기 위해서 일하였던 농장으로, ‘에네켄 아시엔다(henequén Hacienda’라고 부른다. 멕시코 한인의 절반 이상이 이곳에서 노동하였으므로, 멕시코 한인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2. 에네켄은 용설란(龍舌蘭, agave)과의 식물로, 멕시코와 중앙 아메리카 북서부를 포함한 메소아메리카 지역이 원산지이다. 대체로 25년 정도 사는데, 5∼6년 정도 자라면 섬유를 뽑을 수 있다. 마야인들은 에네켄을 자급자족용 필수품으로 생각하고서, 오래 전부터 에네켄에서 추출한 섬유로 노끈, 밧줄, 해먹, 가방, 기타 생활 용품 등을 만들어 사용하였다.멕시코의 에네켄 농장은 19세기 중반부터 형성되었다. 당시 미국의 곡물회사인 맥 코믹사(McCormick社)가 말 대신에 기계로 움직이는 수확기를 발명하면서 밀의 생산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생산된 밀을 포장하는 포대용 굵은 밧줄의 수요도덩달아 증가하였다. 자연히 노끈 제작에 필요한 에네켄은 멕시코 최대의 수출 상품이 되었고, 원래 목축업이 흔하였던 유카탄 반도에 점차 대규모 에네켄 농장이 들어섰다. 아울러 식민지 시기 이후 대토지 소유자와 그의 후손,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신흥부자들은 에네켄 농장을 소유하면서 에네켄 재배를 주도하였다. [본문으로]
  3. 이자경은 1998년에『한국인 멕시코 이민사』(지식산업사)를 출간한 멕시코 한인 이민사의 개척자이다. 그는 멕시코 한인 이민 100년을 맞아 멕시코 한인의 자취를 좀더 구체적으로 정리하여 후세에 알리기 위해서 이 책을 발간하였다. 한인의 국외 이민사를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책 가운데 하나이다. [본문으로]
  4. 혁명은 디아스가 지주와 산업가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펴자 불만이 커지면서 시작되었다. 디아스가 재선 반대파 마데로를 투옥하고 부정선거로 대통령이 되자 마데로가 봉기를 호소했다.반란은 실패로 끝났으나 여러 진영에서 혁명군을 조직하여 정부군 요새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1911년 혁명군의 승리로 마데로가 대통령이 되었으나 우에르타가 마데로를 암살하고 전제적 통치를 시행하자 1914년 반란군의 저항으로 우에르타가 망명하고 유혈이 난무하는 무정부 상태가 이어졌다.1917년 재집권한 카란사는 개헌을 통해 정부에 토지 몰수 권한을 부여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했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리를 제한했다. 1920년 철도 노동자의 파업에서 반발이 최정점에 이르러 카란사가 살해됨으로써 혁명은 끝이 났다. [본문으로]
  5. 멕시코의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고, 1914년 이후 내전과 산악전을 전개한 게릴라 지도자이다. 1909년 독재정권 디아스에 대한 프란시스코 마데로의 봉기에 가담했다. 정규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읽고 쓸 줄 알았던 그는 반란군 조직에서 발군의 재능을 발휘했다. 마데로 정권에서 발생한 반란 때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대통령 마데로의 집행유예 명령으로 수감되었다. 그 후 탈출에 성공하여 미국으로 도망쳤다. 1913년 마데로가 암살된 후 멕시코로 돌아와 베누스티아노 카란사와 연합하여 우에르타의 무단통치에 저항했다. 1914년 정부군을 괴멸시킨 두 사람은 혁명의 개선장군이 되었으나, 곧 카란사와 대립하다가 패배하여 산악지대로 피신했다. 카란사 정권에서 게릴라 활동을 계속하다가 그 정권이 전복된 후 정계은퇴 조건으로 사면을 받았으나 3년 뒤 암살당했다. [본문으로]
  6. 사파타는 멕시코 혁명의 농민군 지도자로 농지개혁주의의 주창자이다. 1911년 농민 게릴라들을 이끌고 멕시코 혁명에 참가했다. 그러나 혁명 지도자 프란시스코 마데로와 토지개혁 문제로 대립하여 아얄라 강령을 발표하고 무장투쟁을 계속했다. 사파타의 부대는 정규전을 피하고 게릴라 전술을 구사했다. 1913년 2월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장군이 마데로를 쫓아내고 살해되었다. 멕시코 북부의 온건한 정치가 베누스티아노 카란사에 의해 우에르타는 1914년 7월 국외로 쫓겨났다. 우에르타가 쫓겨나자 사파타는 아얄라 강령의 수락을 요구했고 이 강령이 실현될 때까지 독자적으로 계속 싸울 것임을 경고했다. 사파타는 토지를 분배하기 위해서 토지위원회를 설치했다. 그는 농촌대부은행을 설립했으며 이것은 멕시코 최초의 농업신용조직이었다. 공화국 대통령으로 카란사가 선출된 뒤 카란사 측의 군인에 의해 사살되었다. [본문으로]
  7. 멕시코의 대통령이었다. 군인이자 개혁가이기도 했던 그는 멕시코 혁명에 참여하기도 했다. 오브레곤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농부와 노동자로 일을 하는 동안 가난한 멕시코인들의 요구 사항이 무엇인지를 잘 터득했다. 1910년에 일어난 독재자 포르피리오 디아스를 타도하는 혁명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1912년 파스쿠알 오로스코의 반란군과 싸우던 프란시스코 I. 마데로 대통령의 지지하에 의용군을 조직했다. 1913년 2월 마데로 대통령이 암살당하고 빅토리아노 우에르타가 대통령에 오르자 이에 맞서기 위해 베누스티아노 카란사와 손을 잡고 우에르타 군대를 쳐부수고 마침내 1914년 8월 15일 멕시코시티를 점령했다. 오브레곤은 판초 비야와 에밀리아노 사파타 등 게릴라 군대와 맞서는 카란사를 계속 지지했고 비야와 맞서 싸우는 동안 오브레곤은 점령 지역에서 교권반대정책과 노동법규를 시행하는 법령들을 공표했다. 게다가 그는 1917년 헌법제정 회의를 주도해 헌법에 급진적 성격의 조항들을 삽입시켰다. 그는 1917년 카란사 내각에서 잠시 일을 맡아 하다가 사임한 후 소노라에 있는 농장으로 돌아가 2년 동안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살았다. 그러나 1920년 4월 오브레곤은 카란사가 반동정책을 강화하자 이에 폭동을 일으켜 카란사를 대통령직에서 축출했다. 오브레곤은 1920년 12월 1일 멕시코의 새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