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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김애란 단편소설 『나는 편의점에 간다』

by 언덕에서 2016. 2. 4.

 

김애란 단편소설 『나는 편의점에 간다』

  

 

김애란(金愛爛. 1980 ~ )의 단편소설로 서울의 대학가에서 자취하는 여대생의 눈에 비친 편의점의 모습을 통해, 후기자본주의의 일상을 예리한 시선과 단순 명쾌한 문장에 담은 작품이다. 2004년 [현대문학상] 후보작으로, 2005년 발간된 소설집 「달려라, 아비」에 실려있다.

 작중 ‘나’는 편의점 세 곳을 번갈아가며 들러 생필품을 산다. 그러면서 나는 세 곳의 편의점에서 각각 다른 인간이 되어버린다. 편의점에서 나는 익명의 편안함 속에 숨고 싶지만 또한 누군가에게 나의 존재를 알리고자 소통을 시도하기도 한다. 내가 구입하는 상품의 목록은 일반화된 대도시의 소비패턴을 벗어나지 않지만, 나를 드러내는 소비의 코드들이기도 하다.  

 소비주체로서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나와 구입 물품 목록으로 환원되는 나, 타인과 인간적인 유대를 맺고 싶은 나와 타인의 무언의 폭력으로부터 숨고 싶은 나의 괴리가 다양한 에피소드에서 날카롭게 드러난다. 또한 번역 작품집 『나는 편의점에 간다(Ma vie dans la superette)』는 2014년 프랑스의 비평가와 기자들이 제정한 [주목받지 못한 작품상]을 받았다. 문학평론가 겸 르몽드 신문 문학전문기자인 닐 알은 "어느 하나만으로 특징지을 수 없이 우울함, 현기증, 세세함과 여유로움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1980년에 태어난 젊은 한국작가의 재능은 절제돼 있지만, 작품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라고 평했다.

 이에 앞서 김애란의 작품들은 프랑스에 꾸준히 소개됐다. 최근에는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이 필립 피키에 출판사를 통해 번역, 출간됐다. 한편 [주목받지 못한 작품상]은 언론에서 주목받지 못한 '숨겨진 걸작'에 수여하는 상이다. 올해 7회째로 프랑스 언론과 문단에서 영향력을 인정받고 있다. 앞서 소설가 신경숙(51)이 2009년 <외딴방>으로 이 상을 받았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나는 K대학에 다니는 자취생이다. 자취방 근처에는 3개의 편의점이 있다. LG25시, 패밀리마트, 세븐 일레븐. 나는 귀갓길에 있는 세븐일레븐에 자주 갔다. 세븐일레븐 사장은 나에게 이래저래 말을 걸며 친한 척하여 내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그래서 두 번째 단골로 삼은 곳은 패밀리마트다. 그런데 그곳 여주인은 불친절하다. 내가 콘돔을 계산대로 가져갔을 때 그녀는 나에게 몇 살이냐고 물었다. 그 후로 내 마지막 단골 편의점은 LG25시 자리에 새로 생긴 큐마트가 되었다. 큐마트에서 일하는 청년이 내게 사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 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어쩐지 큐마트의 아르바이트생 청년에게 호감을 느낀다. 하지만 다른 편의점들과 달리, 큐마트는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 생일을 반복해서 알려줘도 항상 제주 삼다수랑 디스플러스를 사가도 그것을 기억해주지 않는다. 나는 이점에 배신감까지 느끼고 집안에 틀어박힌다. 하지만 생필품은 떨어지게 되어있고, 외로움은 사람을 만나야만 충족되기 마련이다. 나는 다시 큐마트로 향한다. ​큐마트 청년은 여전히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청년의 관심은 오로지 내가 건네는 상품들, 그리고 핸드폰에 한정되어 있다. 그는 누구의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그때, 세븐일레븐, 패밀리마트, 그리고 큐마트의 한가운데에서 뺑소니 사고가 일어난다. 여고생 하나가 속옷을 내보인 채 죽어 있다. 목격자들은 모두 핸드폰을 꺼내든다. 하지만 여고생 곁에 다가가진 않는다. 큐마트 청년마저 그것을 구경 간 사이, 나는 손님 중 하나인 남자가 한 뭉치의 복권을 훔치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친다. 나는 남자의 상한 것 같은 눈을 보며 생각한다.

 낯이 익은 그 얼굴은 패밀리마트에서 봤던가? 엘지25에서 봤던가? 어디에서였지? 그러나 나는 그를 기억해 낼 수 없다. 다만 어쩌면 그도 나처럼 편의점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이 스치고 지나갔을 뿐이다.

 나는 큐마트 청년에게 남자의 범행을 일러바치지 않는다. 그것은 청년이 나를 평소 알아보지 못한 데서 비롯된 반발 심리일 수도 있고, 또 청년과 접점이 생기면 그가 나를 기억할 거라는 염려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면 연이은 범죄 장면에 당황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나는 말없이 큐마트에서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여고생이 사고를 당하게 된 경위를 알게 되고, 또 복권을 훔친 남자가 여고생의 치마를 내려주는 것도 보게 된다. 한 차례 사건이 끝나고, 동네는 다시 조용하다. 그리고 나는 편의점에 간다. 여전히 생필품은 필요하고 여전히 고독하다.

 

 

 #28일 오전 7시. 편의점 유리문을 열고 들어오는 20대 여성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온장고에서 바로 생강차를 꺼낸 뒤 계산대에 올려놨다.

 생강차의 바코드를 리더기로 찍고 “1600원이요”라 말하자 말없이 신용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카드를 긁고 사인이 끝난 뒤 “영수증 드릴까요?”라고 물었다. 카드를 받아 든 여성은 고개만 흔든 채 문을 열고 나갔다.

 편의점은 익명성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편의점에선 가격을 말하고 지불하는 기계적인 행위만 이뤄진다. 고객과 점원 사이에 대화는 거의 없다.

 대학생 김모(22·여)씨는 “생리대나 콘돔 등 민망한 상품도 눈치 볼 것 없이 편하게 살 수 있다는 게 편의점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전상인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수많은 사람과 상호작용을 감당해야 하는 도시인들은 중요하지 않은 사실은 무시하는 ‘대도시적 무관심’을 원하게 된다”며 “편의점은 이 같은 익명성에 대한 욕구를 잘 파악해 현실에 구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출처: 중앙일보 2016. 2/2] “내 하루를 소비하는 곳, 편의점은 나의 냉장고”

 


♣ 

 

 

 작가는 편의점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편의점에 갈 때마다 어떤 안심이 드는 건, 편의점에 감으로써 물건이 아니라 일상을 구매하게 된다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비닐봉지를 흔들며 귀가할 때 나는 궁핍한 자취생도, 적적한 독거녀도, 무엇도 아닌 평범한 소비자이자 서울시민이 된다.” 그래! 방금 내가 산 것은 배고플 때를 대비한 컵라면과 내일 아침에 먹을 대용량 요구르트와 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운 스티커가 들어 있는 빵이 아니다. 나는, 내 소중한 일상을 구매한 것이다.

 단편소설 『나는 편의점에 간다』는 도시에 사는 인간이 누릴 수밖에 없는 가난함과 결핍을 드러내 보인다. 타인에 대한 관대함은 무관심으로 나타나는 다른 얼굴이며 원하는 물건은 무엇이든 즉각적으로 충족시키는 편의점의 풍요로움은 결국 허기이고 결핍임을 이야기한다. 결국 현대사회에서 구성원인 우리는 거대한 물신에게 먹히는 한 조각의 먹이일 뿐이라는 소비의 메커니즘을 증명하는 좋은 소설이다.

 편의점은 한 푼의 에누리도 없으니 밀고 당기는 흥정도 없다. 바코드와 삑삑거리는 기계가 한 치의 빈틈도 없는 깔끔한 거래를 하게 만드는 곳이다. 이것은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위태롭고 외롭게 흔들리며 사는 현대인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삶도 편의점처럼 24시간 가동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