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숙 단편소설『문(門)』
김인숙(金仁淑.1963∼ )의 단편소설로 1995년 [리뷰]지 여름호에 발표되었다. 이후 1998년 발간된 소설집 <유리 구두>에 게재되었다. 작가는 이 소설집에서 개인의 상처와 여성의 내밀한 갈등을 주로 그리고 있는데 이 소설집에서 일상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지난날의 아픈 기억으로 고통 받는 인물, 아이를 세 번이나 지우거나 유산한 불임의 여성, 공동체에서 일방적으로 타인에 피해만 주는 인물, 치매증세의 노인을 등장시켜 이 시대 젊은이의 정체성 상실과 희망을 찾아가는 여로를 그리고 있다.
단편소설 『문』의 표면적인 소재는 아파트 층간 소음으로 발생하는 이웃간의 분쟁이다. 그러나 층간 소음은 상징적인 것에 불과하고 본질적으로는 가족을 외부로부터 지키지 못하는 가장(家長)에 관한 이야기로 보인다. 가장은 한 가정을 이끌어 나가는 사람 또는 남편을 이르는 말이다. 외견상 평온하게 지내던 가족은 이사한 아파트 아래층의 노인이 가족에 저지르는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고통스러워한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가장은 사태를 해결코자하나 노인은 교활하게 가장의 항의를 피해간다. 결국 가장은 깨닫게 된다. 아내를 비롯한 가족이 괴로워하는 폭력의 가해자는 노인이 아니라 매사에 소극적이고 무계획하며 게으른 남편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또 한편으로는 가난한 사람의 이기심이 다른 가난한 이를 치밀하고 간교하게 짓밟고 파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생활에 무능하기 짝이 없는 가난한 소설가인 ‘나’는 친구의 사무실에 출근하며 5년째 소설을 구상하며 하릴 없이 바둑을 두고 있다. 아내는 두 아이를 키우며 가망 없는 남편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 어느 날부터 빨리 퇴근해라는 아내의 성화가 시작되었고 그녀는 점차 신경질적으로 변해간다. 아파트 아래층의 노인이 내가 출근 후 아내와 아이만 있는 집에 올라와 층간소음이 심하다며 고함과 삿대질을 한다는 것이다. 아내가 외출한 어느 날 출근을 하지 않은 내가 아이들과 함께 집에 있는데 노인이 쳐들어 와서 나와 조우하게 된다. 아내가 아닌 나를 만나서 놀란 노인은 자신이 당뇨병 환자라며 조용히 해 줄 것을 요구한다. 노인에게 사정을 말하고 양해를 구하려 하지만 노인은 일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만 한 후 대화를 거부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버린다. 나는 노인을 따라 아래층에 내려갔지만 '문'은 잠겨 있다.
이후 노인은 새벽 1시만 되면 아래층에서 몽둥이로 천정을 두드리거나 벽에 못질을 하여 가족의 수면을 방해한다. 그때마다 아내는 토하기 시작하고 우울증과 신경쇠약증이 심해진다. ‘나’는 노인을 찾아가 대화를 시도하지만 노인은 문을 잠그고 응하지 않는다. 낮이면 노인이 ‘나’의 부재를 확인한 듯 냉장고 여닫는 소리, 아이들의 엉덩방아 소리 등을 핑계 삼아 위층에 올라와 아내를 심하게 공격한다. 나는 출근을 하지 않고 아이들을 뛰놀게 하면서 노인을 유인해보지만 그는 걸려들지 않는다. 노인을 수 십 번 찾아가도 그는 문을 열지 않는다. 급기야 나도 토하게 된다.
아내는 아파트 이웃들의 동정을 구해보지만 모두들 ‘별난 노인’이니 참고 살라며 개입을 꺼려한다. 나는 아래층으로 가기 위해 베란다에서 밧줄을 걸기도 하고, 아래층을 향해 ‘나와라!’ 고함을 지르기도 한다. 그때마다 문을 잠근 노인은 묵묵부답이다. 나는 계속 토한다. 네 살짜리 큰아이가 가출하게 되는데 우여곡절 끝에 찾게 된다. 아이는 자신의 가출 이유가 아래층에서 벽 두드리는 소리와 그에 반응하는 부모의 고함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후 부부는 이사를 결정하고 ‘나’는 5년간 구상해오던 소설을 포기한다.
이사를 가기 며칠 전, 아내는 오랫동안 종적을 감추었던 아래층 할머니를 만난다. 지방의 아들네에 오랫동안 가 있었다는 그 할머니는 아내와 내가 당한 일에 백배사죄를 하면서 말한다. 그 노인의 정신 병력을, 오죽하면 자기가 아들네로 도망을 다 쳤겠느냐면서.
삶은 결국, 문고리를 붙든 채 문 안도, 문 바깥도 아닌 곳에서 마냥 서성거리는 짓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냥 안전하게 살아야 한다. 문을 열려고 하지 않으면 아예 문이라는 것이 없는 곳에서 살아야 한다. 안전하게 살아야 한다. 긴 숨을 짧게 끊어 쉬면서, 살아야 한다. 안전하게!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층간 소음이라는 사회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아파트에서 늘 일어나는 '층간 소음'이라는 구실을 핑계 삼아 단란한 한 가족을 파탄에 이르게 만드는 한 노인의 이기심을 서술하고 있다. 그 노인은 자신이 필요할 때면 위층의 문을 두드리고 침공하듯 들어와 여자와 아이들에게 폭언을 가한다. 그러나 위층의 세대주인 남자, 자신보다 강해보이는 수컷인 주인공이 자신의 집의 문을 두드릴 때면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도망치기에 바쁘다. 결국은 노인의 집요한 공격에 견디지 못한 가족은 이사를 결심하게 된다.
이 정도면 그럴 수 있는 흔한 이야기고 소설로 만들었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문'이라고 제목을 붙인 이유도 납득하기 어렵다.
♣
이 작품에서 '문'은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하지 못하고 허황된 소설쓰기에 빠져있는 한 남자의 굳어진 사고방식을 상징한다. 아래층 노인이 층간 소음이라는 이유로 아내를 공격하는 것처럼, 그 역시 어찌하다 보면 되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가족의 생계를 위협하고 있다. 가장의 부재중에 아내와 아이들이 아래층 노인으로부터 공격당한다. 마찬가지로 아내와 아이들은 가장의 무책임(5년 동안 직업 없이 소설만 구상하며 바둑으로 소일함)으로 생계가 공격당함을 애써 외면하는 것이 작품의 핵심이다. 그런 점에서 김인숙 작가가 본, 오늘날 여성이 싸워야 할 적은 자신을 둘러싼 외부 환경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의 권위 의식인지도 모른다.
- 80년대에 이십대를 보낸 이들의 고민과 방황, 90년대를 대표하는 후일담 문학, 결혼을 둘러싼 여성문제와 가족문제, 그리고 삶과 존재에 대한 성찰까지 다양한 작품세계와 주제의식의 확장으로 우리 문단에서 확고한 위치를 다져온 작가다. 1963년 서울특별시 은평구 갈현동에서 태어났다. 1967년 5세 때 아버지가 지병으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으며, 이후 하숙을 치는 어머니 밑에서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숙명여자중학교와 진명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87년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였다.198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상실의 계절』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였고, 같은 해 장편소설 『핏줄』을 발표하였다. 1985년 장편소설 『불꽃』을 발표하였으며, 1987년 대학시절 민중문화연합 산하의 굿패 '해원'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장편소설 『'79~'80 겨울에서 봄 사이』(전3권)가 출간되었다. 1988년 단편소설 『강』을 발표하였으며, 보고문학 『하나 되는 날』로 전태일문학상 특별상을 받았다. 1989년 단편소설 『가까운 불빛』, 『부정』, 『봄이 오면』을 발표하였고, 1988년 소설집 『칼날과 사랑』을 발표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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