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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朋滿座

다시 찾은 시(詩), 방랑

by 언덕에서 2015. 11. 11.

 

 

 

 

다시 찾은 시(), 방랑

 

 

 

 

 

 

 

 

 

 

Ⅰ. 삼중당문고

 

 

70년대 후반 「삼중당문고」라는 것이 있어서 빵 한 개 사먹을 돈으로 유명한 세계명작은 물론 한국소설이나 시집 그리고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프랑소와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 같은 도발적인 작품까지 읽을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삼중당문고」야말로 주머니가 가벼운 학생들에게는 단비와 같은 존재였음이 틀림없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심훈의 <상록수>나 이광수의 <사랑>과 같은 우리나라의 고전에 속하는 소설은 물론이고 <청록집>이나 <때로 때때로> 같은 시집도 「삼중당문고」를 통해 읽었다. 뿐만 아니라 김형석 교수의 <운명도 허무도 아니라는 이야기>나 <영원과 사랑의 대화>와 같은 철학 수필집도 「삼중당문고」를 통해 읽었으니 내 정신세계의 보고였음은 틀림없다. 나와 비슷한 연배인 1962년생 장정일이 쓴 ‘삼중당 문고1'라는 시는 그래서 공감이 간다.

 

 

Ⅱ. '소설문예' 그리고 추억의 『범우문고』

 

 그 「삼중당문고」에 대한 기억 때문에 잊고 있었던 다른 문고를 최근 기억에서 복원해내었다.

 고교 시절, 나의 장형은 공과대학에 다녔는데 ‘공돌이’라는 지칭이 싫었는지 <문학사상>이나 <현대문학>을 자주 사서 읽곤 했다. 그런데 그 시절 (70년대 후반)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읽던 그 두 잡지가 싫었는지 구독하던 월간 문학지를 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소설문예」라는 잡지로 어느 날 갑자기 바꾼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인문학에 대한 일반 소양이 없는 공대생이 읽기에는 문학사상이나 현대문학의 평론 부분은 상당히 난해했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어쨌든 장형이 구독하기 시작한 그 「소설문예」라는 문학잡지는 국내작가의 단편소설 몇 편과 시 몇 편, 그리고 생소한 북유럽 쪽의 단편소설이 몇 편 실렸던, 그러니까 월간지 「샘터」 규모의 콤팩트한 사이즈의 쉬운 문학잡지로 기억한다. 그 잡지의 편집인은 당시로는 신예 작가군에 속했던 소설가 조정래씨와 부인인 김초혜 시인인 것 같은데 맞는지 모르겠다. 형이 다 읽은 그 잡지를 돌려 읽던 어느 날 헤르만 헤세의 ‘방랑의 시’라는 특집 코너에서 헤세가 쓴 여러 편의 시를 감상하게 되었는데 나는 매우 큰 감동을 받았고 틈만 나면 그 시들을 외우기 시작했다.

 

 

 

 

 

 

 세월이 40년 가까이 흐른 동안 대부분 다 잊어버렸지만 가을날이 오면 헤세의 그 시를 읽었던 감동이 되살아나 어떻게 그것들을 찾을 수 없을까 하고 고심하곤 했다. 지금도 그 싯귀 중 ‘옛날에 불렀던 노래, 다시 한 번 불러보자’라는 구절만을 어슴푸레 기억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블로그에 올린 내 글에서 헤세의 시로 답글해준 문향님(http://blog.daum.net/yjmoonshot)께 ‘방랑, 방랑자’ 등이 소재인 그 시들은 어느 시집에 있는 것인지요? 라고 물었다. 문향님은 ‘<방랑 - 헤르만 헤세>, 범우사 같습니다만’으로 답을 해주었다. 그 책을 주문했고 펼쳐서 일일이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놀라워라! 내가 40년 가까이 찾았던 그 시가 고스란히 모셔져 있는 것이 아닌가.

 

Ⅲ. 헤르만 헤세의 시

 

 

밤 길

 

 

늦은 밤 먼지 속의 길을 간다.

담 그림자 비스듬히 깔려있고

포도덩굴 사이로 실개천과

길 위에 비친 달빛을 보게 되네.

 

옛날에 불렀던 그 노래

다시 한 번 불러 보자.

끝 없었던 방랑의 그림자가

나의 여정에 교차되네.

 

여러 해에 걸친 바람과 눈과 햇볕이

나의 뒤를 쫓으며 따라온다.

한여름 밤과 푸른 빛 번개와

폭풍과 여행의 괴로움도.

 

햇볕에 갈색으로 그을리고

이 세상 풍요로움 마음껏 마셔

앞으로 나아감을 느낀다.

어둠 속으로 내일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죽음으로 이르는 방랑자

 

 

그대 언젠가는 나에게로 오리.

그대 나를 잊지 않고.

하여 고통은 끝나고

사슬은 풀리리라.

 

아직은 낮설고 멀게 보이누나.

그대 사랑하는 형제인 죽음이여!

냉랭한 성좌처럼 그대는

내 괴로움 위에 서 있노라.

 

하나, 그대 갑자기 가까워져

불꽃에 싸이리라.

오라, 사랑하는 그대여. 나 여기 있으니

나를 데려가 주오. 나는 그대의 것이니.

 

 

 

저녁에

 

 

저녁이면 연인들이 쌍쌍이

들판을 가로질러 천천히 거닌다.

여인들은 머리를 풀고

장사꾼들은 돈을 헤아리며

석간신문에서 시민들은 불안스레

새로운 뉴스를 읽는다.

아이들은 조그마한 주먹을 움켜 쥐고

만족스럽게 단잠을 잔다.

누구나 단 하나의 참다운 일을 하고

숭고한 의무에 따른다.

시민들도, 젖먹이도, 연인들도.

그런데 나는 이렇게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그럴리는 없다! 나 역시

밖의 일에 몸을 바친다.

그것도 세계 정신에서는 빼놓을 수 없으며

나름대로 의미를 갖는 일이다.

나는 이리저리 서성이며

마음 속으로 춤을 추며

바보스런 유행가를 읊조리며

신과 나를 찬양하고

술을 마시며

자신이 터키 총독쯤 된다고 공상한다.

콩밭이 어떻게 되었나 불안해 하면서도

미소지으며 한 잔 더하고

내일은 이러지 않으리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지나간 괴로움을 되새겨

한 편의 시를 짜내고

달과 별들의 운행을 보면서

그 의미를 예감한다.

그들과 함께 여행하며

그들이 가는 곳으로 함께 따라가듯.

 

 

 

Ⅳ. 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는 해외 파견 선교사를 지도하던 부모의 영향을 받아 인도주의적이고 평화적인 사람으로 자라나게 된다.

 14세 때 아우르브론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나, 시인이 되든가 그렇지 못하면 아무 것도 되고 싶지 않다는 결심으로 반 년 만에 자퇴한다. 신경쇠약증으로 자살을 기도하기도 한 그는 시계공의 견습공, 책방의 점원을 하면서 독학으로 문학을 공부한다. 25세 때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바치기 위해 시집을 간행하였으나 시집이 나오기 직전에 어머니가 세상을 뜬다. 위의 시는 그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젊은 나이였지만 세상의 온갖 신산함을 겪은 흔적이 작품 구석구석에서 느껴진다. 이후 헤세는 27세 때 베를린에 있던 [파셔]사의 권유로 <피터 카멘친트>를 발표하여 문학적인 인정을 받는다. 그리고 인도, 싱가포르, 수마트라, 세일론 등지로 여행을 하면서 동양문화에 심취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쟁보다는 평화가, 증오보다는 사랑이’라는 반전적인 논문을 발표하여 자신의 조국인 독일로부터 매국노라는 낙인이 찍혀 스위스로 국적을 옮기게 되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전쟁을 반대하는 신념을 문학으로 승화시켰고 그로 인해 여러 곳을 방랑한 삶은 놀랍고도 존경스럽다. 늦은 가을밤, 삶의 고단한 무게에 마음을 추스리기 어려운 젊은이들에게 일독을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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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삼중당 문고 열 다섯 살, 하면 금세 떠오르는 삼중당 문고 150원 했던 삼중당 문고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두터운 교과서 사이에 끼워 읽었던 삼중당 문고 특히 수학시간마다 꺼내 읽은 아슬한 삼중당 문고 위장병에 걸려 1년간 휴학할 때 암포젤 엠을 먹으며 읽은 삼중당 문고 개미가 사과껍질에 들러붙듯 천천히 핥아먹은 삼중당문고 간행목록표에 붉은 연필로 읽은 것과 잃지 않은 것을 표시했던 삼중당 문고 경제개발 몇 개년 식으로 읽어 간 삼중당 문고 급우들이 신기해 하는 것을 으쓱거리며 읽었던 삼중당문고 표지에 현대미술 작품을 많이 사용한 삼중당 문고 깨알같이 작은 활자의 삼중당 문고 검은 중학교 교복 호주머니에 꼭 들어맞던 삼중당 문고 쉬는 시간 10분마다 속독으로 읽어내려 간 삼중당 문고 방학중에 쌓아 놓고 읽었던 삼중당 문고 일주일에 세 번 여호와의 증인 집회에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는다고 교장실에 불리어가, 퇴학시키겠다던 엄포를 듣고 와서 펼친 삼중당 문고 교련문제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을 때 곁에 있던 삼중당 문고 건달이 되어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와 쓰다듬던 삼중당문고 용돈을 가지고 대구에 갈 때마다 무더기로 사 온 삼중당 문고 책장에 빼곡히 꽂힌 삼중당 문고 싸움질을 하고 피에 묻은 칼을 씻고 나서 뛰는 가슴으로 읽은 삼중당 문고 처음 파출소에 갔다왔을 때, 모두 불태우겠다고 어머니가 마당에 팽개친 삼중당 문고 흙 묻은 채로 등산배낭에 처넣어 친구집에 숨겨둔 삼중당 문고 소년원에 수감되어 다 읽지 못한 채 두고 온 때문에 안타까왔던 삼중당 문고 어머니께 차입해 달래서 읽은 삼중당 문고 고참들의 눈치보며 읽은 삼중당 문고 빳다맞은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읽은 삼중당 문고 소년원 문을 나서며 옆구리에 수북이 끼고 나온 삼중당문고 머리칼이 길어질 때까지 골방에 틀어박혀 읽은 삼중당 문고 삼성전자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문흥서림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레코드점 차려놓고 사장이 되어 읽은 삼중당 문고 고등학교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고시공부 때려치우고 읽은 삼중당 문고 시공부를 하면서 읽은 삼중당 문고 데뷔하고 읽은 삼중당 문고 시영물물교환센터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박기영형과 2인 시집을 내고 읽은 삼중당 문고 계대 불문과 용숙이와 연애하며 잊지 않은 삼중당 문고 쫄랑쫄랑 그녀의 강의실로 쫓아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여관 가서 읽은 삼중당 문고 아침에 여관에서 나와 짜장면집 식탁 위에 올라 앉던 삼중당 문고 앞산 공원 무궁화 휴게실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파란만장한 삼중당 문고 너무 오래되어 곰팡내를 풍기는 삼중당 문고 어느덧 이 작은 책은 이스트를 넣은 빵같이 커다랗게 부풀어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네 집채만해진 삼중당 문고 공룡같이 기괴한 삼중당 문고 우주같이 신비로운 삼중당 문고 그러나 나 죽으면 시커먼 뱃대기 속에 든 바람 모두 빠져나가고 졸아드는 풍선같이 작아져 삼중당 문고만한 관 속에 들어가 붉은 흙 뒤집어쓰고 평안한 무덤이 되겠지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