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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朋滿座

조선 명문장가들의 일상 『문장의 품격』

by 언덕에서 2016. 6. 3.

 

 

 

조선 명문장가들의 소품문 『문장의 품격』

 

 

 

 

 

 

 

좋은 문장이란 무엇일까? 거창한 사회문제나 심오한 사상을 담아야 좋은 글, 품격 있는 글일까? 이 책은 마치 이 시대의 ‘파워블로거’처럼 형식과 내용의 제약에서 벗어나 일상에 대한 다채롭고 섬세한 글쓰기로 동시대의 삶을 움직였던 조선시대의 문장가 7인을 소개한다. 허균, 이용휴,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이옥, 정약용은 낡은 사유와 정서를 담은 고문(古文) 대신 낯설고 새롭고 실험적인 문장에, 도시 취향의 삶과 의식, 여성과 평민 등 소외 계층의 일상, 담배·음식·화훼 등의 기호품까지 다양한 주제로 생동하는 삶의 모습을 담아냈다. 소셜네트워크와 블로그를 통해 짧은 글쓰기에 익숙한 우리에게 자유로운 형식으로 진솔하게 자신의 내면을 드러낸 이들의 문장은 큰 공감대를 불러일으킨다. 동시에 좋은 문장, 품격 있는 문장이 무엇인지 그 정수를 보여준다.

 

 

 

내가 죄를 지어 바닷가로 거처를 옮긴 후부터는, 쌀겨나 싸라기조차 제대로 댈 형편이 못 되었다. 밥상에 올라오는 것이라곤 썩은 뱀장어와 비린내 풍기는 물고기, 쇠비름과 미나리에 불과했다. 그조차도 하루에 두 끼밖에 먹지 못하여 밤새 배 속이 비어 있었다. 산해진미를 입에 물리도록 먹어서, 물리치고 손도 대지 않던 옛날의 먹거리를 떠올리고 언제나 입가에 침을 질질 흘리곤 했다. -〈두려움 없는 저항의 목소리, 허균〉 25쪽

 

 

 

지식과 견문이 나를 해치고 / 재주와 능력이 나를 해쳤으나 / 타성에 젖고 세상사에 닳고 닳아 / 나를 얽어맨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성공한 사람을 받들어 / 어른이니 귀인이니 모시며 / 그들을 끌어대고 이용하여 / 어리석은 자를 놀라게도 했다. / 옛날의 나를 잃게 되자 / 진실한 나도 숨어버렸다. -〈자기다운 삶을 찾는 글, 이용휴〉 62~63쪽

 

 

 

 

이 못난 사람은 단것에 대해서만은 성성이(오랑우탄)가 술을 좋아하고, 긴팔원숭이가 과일을 좋아하듯이 사족을 못 쓴다오. 그래서 내 동지들은 단 것을 보기만 하면 나를 생각하고, 단것만 나타나면 내게 주지요.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초정(박제가)은 인정머리 없이 세 번이나 단것을 얻고서 나를 생각지도 않았고 주지도 않았소. 그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내게 준 단것을 몰래 먹기까지 했소. 친구의 의리란 잘못이 있으면 깨우쳐주는 법이니, 그대가 초정을 단단히 질책하여주기 바라오. -〈문단을 뒤흔든 낯선 문장, 이덕무〉159쪽

 

 

오호라! 영숙이여! 거기서는 또 무슨 일을 하렵니까? 한 해가 저물어가면 싸라기눈이 흩뿌리고, 산중이 깊은지라 여우·토끼가 살져 있으리니 활을 당기고 말을 달려 한 발에 맞춰 잡고, 안장에 비껴 앉아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다면, 악착 같던 의지도 속 시원히 풀리고, 고독한 처지도 잊히지 않을까요? 어찌 또 거취의 갈림길에 연연해하고 이별의 순간에 미련을 가질 필요가 있으리오? 어찌 또 서울 안에서 먹다 남긴 밥이나 찾아다니고, 남들의 싸늘한 눈치를 보아가면서 남에게 하고 싶은 말을 꺼내지 못하는, 말 못할 처지의 꼬락서니를 하며 지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영숙이여! 떠나십시오! 저는 지난날 궁핍 속에서 벗의 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렇지만 영숙과 제 사이가 어찌 궁핍한 날의 벗에 불과하겠습니까? -〈눈빛이 살아 있는 붓끝, 박제가〉200쪽

 

 

 

 

 

 18~19세기 조선의 문단에는 일종의 문장 개혁이라고 부를 만한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당시에도 문단의 주류는 중국의 당송(唐宋) 시대에 만들어진 고문 양식이었고, 형식적인 문체에 정치·사상 등을 주제로 한 이 양식은 오랜 기간 사용되면서 역으로 융통성 없는 틀로 작용했다. 경직되어 활력을 잃어가는 고문에 반발한 문사들은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문장에 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변화를 갈망하는 욕구는 작가 한두 명이 아닌 다양한 계층의 작가들에 의해 상당히 긴 시간을 두고 지속된 흐름이었다. 이들이 추구한 새로운 문장을 소품문(小品文)이라고 불렀으며 17세기 초반 허균을 비롯한 일군의 작가들이 시도한 이래 수면 아래 잠복해 있다가 18세기 전반에 들불처럼 문단에 새로운 글쓰기의 흐름으로 몰려왔다. 소품 창작의 중심에는 이용휴, 박지원, 노긍, 이덕무, 이옥, 홍길주 같은 문사들이 있었고, 문단뿐 아니라 사회 저변에 미친 이들의 영향력이 위협적이라고 느낀 정조는 문체반정을 감행할 정도였다.

 

 

 

글과 그림의 기량을 겨루는 18세기 선비들의 모습을 그린 강희언의〈사인휘호〉 사진출처 : 조선일보

 

 이들의 새로운 문장은 거대 담론에 억눌려 발산하지 못한 개별적이고 작은 가치에 시선을 던지며 고문이 보여주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보여주었다. 전형적인 선비들은 말하려 하지 않았던, 현실 세계의 다양한 진실을 말하려 들었고, 당대의 현실을 당대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당대의 문체로 묘사하려 한 것이다.

 이 책은 18~19세기 조선 문단에 몰아친 문장개혁의 산물인 소품문에 의해 쓰인 걸작들이다. 이 문사들의 창의적인 문장은 충분히 신선하고 파격적인 행보였으나, 막강한 고문의 힘을 누그러뜨릴 순 없었다. 새로운 문장을 쓰려는 시도는 제도와 체제의 지원을 받은 권위적인 고문의 힘에 눌려 19세기 중반 이후 겨우 명맥만 유지하다가 근대와 더불어 이내 사라졌다. 그리고 막강한 고문만을 주장하던 세력이 장악한 나라는 고스란히 일본에 바쳐졌다.

 

 

 

 

☞소품문 : <문학> 어떤 형식을 갖추지 아니하고 자유로운 필치로 일상생활에서 보고 느낀 것을 간단하게 적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