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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가야국의 김수로 왕비 허왕후(許皇后)는 정말 인도에서 왔을까?

by 언덕에서 2022. 9. 7.

 

 

가야국의 김수로 왕비 허왕후(許皇后)는 정말 인도에서 왔을까?

 

 

<허왕후 영정 : 사진 출처 www.gayasa.net>

 

 

허왕후신행길축제의 홍보대사인 배우 박규남(30. 왼쪽)과 인도 여성 안젤리 싱(31). 김해문화의전당 제공

 

허왕후는 가야국 김수로왕의 왕비로 김해 허 씨의 시조이다. 허왕후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여 왠지 객관적인 서술을 하고 있을 것 같은 백과사전을 찾아보았다.

 

 허황옥. 가야국 김수로왕의 왕비.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녀는 본래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 배를 타고 가야에 와서 왕비가 되었다. 아들 10명을 낳았는데, 2명에게 어머니의 성(姓) 허(許)를 주었다고 한다. 이름은 허황옥(許黃玉)이며 김해 허 씨(金海許氏)의 시조이다. 본래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이다. 서기 48년 (유리왕 25) 7월 27일 배를 타고 가야에 와서 수로왕의 왕비가 되었다. 이듬해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 뒤에 가야국에 상륙한 곳은 주포촌(主浦村)이고, 비단 바지를 벗어 산령(山靈)에게 제사했던 곳은 능현(綾峴)이며, 붉은 기를 꽂고 들어온 바닷가는 기출변(旗出邊)으로 불렸다. 아들 10명을 낳았는데, 장자인 거등(居登) 왕통을 잇게 하였고 2명에게 어머니의 성(姓) 허(許)를 주었다고 한다. 나머지 7명의 아들은 불가에 귀의했다.

 아유타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인도, 태국, 중국, 일본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인도 아요디아라고 알려진 것이 가장 유력하다. 그 연유는 수로왕릉 정문 대들보에 새겨진 두 마리의 물고기가 인도 아요디아 지방의 건축양식에서 볼 수 있는 문양이기 때문이다. 가야가 몰락하게 되자 허씨의 자손들은 흩어졌는데 김해에 남은 김해 허 씨, 하양으로 이주한 하양 허 씨, 양천 허 씨, 태인 허 씨 등이 있으며 태인 허 씨에서 갈라져 나온 인천 이 씨가 있다. 김해시에 허황후의 묘가 있으며 그녀가 인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전하는 파사석탑이 남아있다.

 

허왕후가 가락국으로 시집 올 때 인도에서 싣고 온 돌로 만들어졌다는'파사석탑'. 본래는 김해 호계사에 있던 것으로 절이 없어지면서 고종10년(1873)에 지금의 허왕후 능역으로 옮겨졌다.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왕후의 출신지를 추적하는 일은 고대 국가의 세계관과 당시 한반도 주변 정세 및 외교 상황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다. 허왕후의 출신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어느 하나 확실한 역사적 사실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느 나라에서 온 것일까?

 삼국유사는 허왕후의 입을 빌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로서 성은 허(許)요,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열여섯입니다."라고 전하고 있는데, 이 아유타국이 어디인가를 두고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1. 고대 인도의 아요디아국 왕녀

 1977년 아동문학가 이종기 작가가 주장한 것으로 허왕후는 아요디아 왕국이 태국 메남강 유역에 건설한 식민국인 아유티아 출신의 왕녀라는 것이다. 그는 김해 수로왕릉 정문의 현판 좌우에 있는 네 개의 장식판에 그려진 쌍어문(雙魚文)이 바로 아요디아국의 문장이라고 주장하며 이 가설을 내세웠다.

 <삼국유사>는 허왕후의 입을 빌어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로 성은 허(許)요, 아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열여섯입니다.”라고 전하고 있는데, 이 아유타국이 어디인가를 두고 발생한 논란의 시작이다.

 한 때는 이곳이 인도의 갠지스 강 중류에 있는 ‘아요디아’ 읍이라는 설이 지지를 받더니, 태국 메남 강가에 있는 고도(古都) ‘아유티야’라는 설이 그럴듯한 근거를 가지고 주장되기도 했다. 또 어떤 이들은 허왕후의 시호인 ‘보주태후(普州太后)’에서 힌트를 얻어 중국 쓰촨 성 가릉강 유역의 ‘보주(普州)’가 바로 허왕후의 출신지인 아유타국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모두들 그 나름의 근거를 갖고 주장을 펼쳤지만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현재까지도 그저 그런 하나의 가설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2. 중국의 보주태후(普州太后)

 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인 김병모 교수는 위의 쌍어문에 대한 조사를 심화시켜 좀더 진전된 결론을 내놓았다. 김 교수는 능비에 새겨진 '보주태후'라는 글귀에 착안해 그럴싸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는데 주요 내용은 이렇다.

 허황후 일행이, '쌍어문'을 나라의 문장으로 삼았던 인도의 아요디아국에서 난을 피해 중국의 옛 보주(普州 : 현 사천성 안악현) 일대에 머물다가 김해의 가락국으로 이주했다. 그래서 수로왕릉 정문에 '쌍어문'이 그려지게 되었으며, 허황후 능비에 '보주태후'라는 칭호가 새겨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해시 서상동에 위치한 수로왕릉의 정문 현판에 새겨진 쌍어문. 허왕후를 아요디아국 공주로 언급하는 주요 단서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수로왕 시대를 훨씬 지난, 정조 17년 신축 때나 헌종 8년 건물 이전 때 그려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가설이 '사실'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수로왕릉 정문의 '쌍어문'이 아요디아국의 문장이어야 하고, 그것이 서기 1세기 허왕후 때부터 전승된 것이라는 사실이 먼저 입증되어야 한다. 또 그 뒤 여러 번의 보수과정을 거친 수로왕릉의 정문과 안향각의 쌍어문이 원래 모습을 끝까지 유지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전의 기록들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입증해 줄 만한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수로왕릉의 '쌍어문' 그림은 서기 42년이 아닌 (수로왕 시대를 훨씬 지난), 정조 17년 신축되어 헌종 8년 건물 이전 때 그려진 것으로 능감들의 기록을 정리한 <숭선전지>에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쌍어문'을 새긴 주체는 누구일까? [숭선전지]에 따르면 수로왕릉의 정문인 안향각을 세울 때 승려들이 동원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들이 정조 17년 쌍어문을 새겼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쌍어문'은 본래 불교와 밀접하게 관련된 문장으로, 김해 은하사 대웅선 수미단, 양산 계원사 대웅전 현판 좌우의 공포, 합천 영암사지 비석 귀부, 양양 진전사지 출토 암키와류 등에 부조되거나 또는 단청으로 묘사되어 있다.

 

3. 왜인 해양세력

 허왕후가 왜인 귀족집단의 대표자일 거라는 주장은 역사학자 이희근 박사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삼국유사> 금관성파사석탑조에서 그 단서를 두고 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허왕후의 8대손인 금관가야 질지왕이 허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왕후사라는 사찰을 세웠다. 그리고 왕후사를 세운 후 허왕후 신령의 도움을 받아 당시 적대 세력인 왜를 복속시킬 수 있었다.

 

 왕후사를 세우자 왜가 복속되었다는 삼국유사 본기의 기록은 그녀의 출신지가 왜국이었다는 가정 하에서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허왕후가 왜국 출신이 아니라면 그녀를 위해 왕후사를 창건했다고 해서 왜가 가야에 복속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후사 건립은 그녀로 대표되는 가야 지역의 왜인 집단을 통합하기 위한 상징적인 조치로 해석하는 부분이다.

 이희근 박사가 추가적으로 제시하는 주장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중요한 부분은 <삼국유사> 가락국 기조의 다음 구절이다.

 

‘수로왕이 왕궁에서 서남쪽으로 60걸음쯤 되는 산기슭에 장막으로 궁실처럼 만들어놓고 기다렸다. 왕후가 산 너머 벌포 나룻목에서 배를 매고 육지로 올라와 높은 언덕에서 쉬고 난 다음,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폐백으로 삼아 산신에게 보냈다.

 

 허왕후가 수로왕을 만나기 전에 행한 의식, 즉 ‘비단 바지를 벗어 산신에게 제사한’ 의식은 고대 일본의 규슈 지방에서 행해지던 제사의식이라고 한다. 이로 보아 가락국의 한 집단을 이룬 허왕후의 집단이 왜인 해양세력일 가능성이 커다는 것이다.

 

4. 서북한 지역서 김해로 이주해 온 漢계통 귀족

 고고학자인 인제대 이영식 교수의 주장으로 허왕후는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것이 아니라 평안도나 황해도에서 김해로 이주해 왔다는 설이다.

 현재까지 김해지역의 고고학 조사에서 인도 계통의 유물이나 유적이 확인된 적이 없고, 이를 보완할 만한 문헌 자료적 증거가 없는 데서 착안된 주장으로 고고학적인 설득력을 지닌다.

 즉 ‘가락국기’에서는 허왕후가 배에 싣고 들어왔던 물건들을 한(漢)의 호화로운 여러 가지 문물, 즉 한사잡물(漢肆雜物)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김해의 회현리 패총, 양동리와 대성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한 나라 양식의 중국식 거울, 세 발 달린 청동솥, 통용되던 화폐 등에서 한 나라 계통의 문물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교수는 “허왕후가 가지고 들어왔던 문물은 낙랑 등 한사군이 설치된 서북한 지역인 평안도나 황해도 지역의 선진문물로 추정되며 허왕후 역시 이 지역의 지배계급 출신으로 김해로 이주해 왔다”라고 주장했다. 금관가야가 건국된 서기 42년 당시 평안도 지역에 한 4군이 있었고, 한 나라 화폐가 서기 40년까지 통용된 점, 김해가 서기 3세기까지 동북아시아 교통로의 중심지로서 북방민족의 이주가 많았다는 점이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다. 

 이 교수는 “‘<삼국유사> 가락국기’가 불교가 가장 성행했던 1076년(고려 문종)에 편찬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불교 발생지인 인도에서 허왕후가 출발한 것으로 윤색된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라고 말했다.

 

김해시 구산동에 위치한 김수로왕비 허왕후의 능(사적 74호). 소나무숲에 고즈넉히 둘러싸여 신비감을 더한다. 능에 새겨진 '보주태후'라는 글귀로 인해 혹자는 허왕후의 출신지가 인도의 아요디아국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면 허왕후가 인도 사람인가 하는 물음의 결론으로 들어가 보자. 실제로 서기 1세기 무렵 인도 아유디아국과 김해 가락국 사이에 직접적인 교류가 있었다는 증거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당시에는 중국조차 인도에 대한 정보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서기 1세기의 항해술로는 인도에서 한반도 경남 바닷가에까지 이르는 그 긴 항해를 할 수도 없었을뿐더러 설혹 이 머나먼 항해가 가능하더라도 목숨을 무릅쓰고까지 가야로 시집가는 일을 강행했을 리 만무하다. 이것은 합리적 해석이 가능한 역사적 사실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은, 불교를 숭상하는 후대인들이 만들어낸 신화에 불과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참고 문헌 : 1. 이희근 저. <한국사 그 끝나지 않은 의문>

               2. 국제신문. <이영식의 가야사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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