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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안개 낀 홍콩(香港) 으로의 여행

by 언덕에서 2015. 3. 12.

 

 

 

 

화양연화(華樣年樺), 첨밀밀(甛密密)의 그곳, 홍콩(香港) 여행

 

 

 

 

 

지난 주부터 금주초까지 아내와 홍콩 여행을 다녀왔다. 십수 년 전 출장을 오고갈 때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공항에 잠시 머물기만 했던 홍콩이라는 도시. 영화 화양연화(華樣年樺)나 첨밀밀(甛密密), ‘색, 계(色, 界)’의 배경이 되었던 도시, 이소룡의 질풍노도와 같은 액션무협이 배어있는 그 도시는 내게 항상 동경의 대상이었다.

 

 

 

 

 나는 홍콩(Hongkong)이라는 명칭이 참 친근하게 느껴진다. 과거에는 '샹장[香江]' 또는 '샹하이[香海]'라고도 불렸으며, 명(明) 나라 만력(万历) 연간에 동완(东莞)에서 생산되는 향나무를 중계운송하기 시작하여 '샹강[香港]'이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홍콩은 샹강의 광둥어[廣東語] 발음을 영어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홍콩은 과거에는 광둥성 신안현[新安县; 지금의 선전[深圳]]에 속하였으며, 아편전쟁 이후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1984년 중국과 영국의 연합성명에 따라 1997년 7월 1일 주권을 회복하고 특별행정구로 지정되었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1국2체제를 취하여 고도의 자치권을 누리는 지방행정구역으로서 50여 년 동안 변함없이 자본주의 사회·경제 제도와 생활방식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새벽 1시 홍콩공항에 도착하니 몇 백 명으로 추정되는 입국 인파로 인해 입국수속이 지연되고 있었다. 중국 본토에서 입국하는 중국인을 심사하는 곳과 일반 외국인 입국 심사하는 곳을 구분하지 못해 내가 잠시 혼동한 사이 입국심사 대기 인파가 배로 늘어버린 탓이었다. 30분 정도를 줄을 서서 기다리다 간신히 입국심사를 완료하고 공항 로비에 도착해보니 여행사에서 편성한 여행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부부보다 더 늦게 들어오는 팀이 있었다. 이후 1시간 이상 시간이 지난 후 부부와 대학생 자녀로 구성된 4명의 가족이 도착했는데 시계는 새벽 3시를 향하고 있어 기다리던 일행은 모두 그들을 향해 분통이 터지는 분위기였다. 갑자기 아찔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몇 분 판단이 더 늦었으면 우리 부부도 저들처럼 한 시간이 훨씬 지난 시간에 로비에 도착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일행의 원성을 듣지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중국 본토로부터 몇 백 명의 인파의 입국으로 인해 정상적인 수속이 움직여지지 않은 경우 누구의 잘못이라고 따진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뒤늦게 그 가족이 도착하자 기다리던 일행 중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늦은 일행을 향해 따지기 시작했다.

 “댁들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피해를 보아야 하겠소!”

 그 가족의 가장(家長)으로 보이는 비슷한 연배의 남자의 성정(性情) 역시 녹록치 않았다.

 “아니, 우리가 일부러 늦게 온 거요? 사람이 이렇게 많으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오? 말조심 하쇼!”

 두 사람 간의 일촉즉발 분위기에서 오지랖 넓은 내가 말리려는 사이에 여행 가이드가 나섰다. 

 “입국 인파가 너무 많아 이민국에서도 이런 일이 처음이랍니다. 원래 그런 거예요.”

 처음에는 늦게 도착한 가족, 특히 가장의 뻔뻔한 태도에 짜증스런 마음이었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역지사지(易地思之), 그분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태도로 이해되었다. 분명 자신들의 잘못도 아닌데 지탄을 받는 가족들을 보호해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동물적 본능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그분이 세상살이에 좀더 능숙한 분이라면 잘못한 것이 없더라도 자신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향해 빈말이라도 ‘본의 아니게 여러분들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라고 했다면 더 보기 좋았을 것이다. 이렇듯 작은 일에도 인생을 사는 이치를 배우게 된다.

 

 

 

 

 

 

 

 

 

 

 

 

 


 22명으로 구성된 여행 일행은 30 ~40대 부부가 2쌍, 40대 부부와 자녀, 60대 부부와 가족 또 다른 60대 부부, 40대의 고모와 조카딸, 40대의 어머니 세 명과 딸 3명, 그리고 우리 부부해서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과 5일간 함께 한 시간 속에 그간 나도 모르게 사로잡혀 있었던 권위의식, 격의 있음 등을 떨쳐버릴 수 있어 좋았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마음가짐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홍콩의 날씨는 늦은 봄 또는 초여름이라고 했는데 이상기온 탓인지 그곳 사람들은 모두들 긴팔 옷을 입고 있었고 어떤 이는 털옷차림도 있었다. 내게 상상으로만 존재했던 구룡반도, 그곳의 화양연화와 첨밀밀이 이루어졌을 법했던 신사추이 골목, 홍콩 섬의 고층건물, 소호거리 주택가, 자유여행날 전철을 타고 찾아간 홍콩대학교(The University of Hongkong )등은 실제로 가보면 별 것 아닌 것들이겠지만 상상과 현실을 재구성해보는 소소한 기쁨을 확인한 순간이기도 했다.

 

 

 

 

 헐리우드 거리 주택가를 지나다 아찔한 순간을, 곧 넘어질 것만 같은 나무, ‘벵골보리수나무’를 만났다. 보리수는 십자성 별빛 아래서  온갖 비바람과 폭풍을 만났을 것이고 품어줄 흙도 지탱해 줄 공간도 없이 홀로 외로웠을 것이다. 벵골보리수나무는 독특한 향으로 해충(害蟲)을 쫓아주고 동남아 특유의 습기를 빨아 당기며 동네 사람들의 벗이 되고 있다니 놀랍다. 저렇게 뿌리가 드러나도 오히려 ‘나는 괜찮아“하면서 사소한 것에 화내고 나약해지는 인간들을 위로하고 감싸주는 것은 아닌지.

 

 

 

 여행이라는 것이 그렇다. 또 다시 떠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 그렇게 ‘출발점’에 다시 서고, 지도 위에서 경계심을 푼다. 그러고는 ‘사람’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간다.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풍경은 달라졌을지라도, 변하지 않는 건 역시 ‘사람’일 것이다. 우리는 인생이란 여행에서도 늘 ‘사람’ 속에 있었으며, ‘사람’에 대한 따뜻한 호기심과 ‘사람’을 기다리는 쓸쓸하거나 저릿한 마음을 거두지 않아야 할 것이다. 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결국 사람의 마음뿐이라는 정호승 시인의 말은, 그래서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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