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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말(言)의 권태(倦怠)

by 언덕에서 2015. 2. 12.

 

 

 

 

 

 

말()의 권태(倦怠)

 

 

 

 

 

 

 

 

 

시내에서 지하철 타려다 무심코 발견한 광고다. 원장이 무려 여섯 명이나 된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사전을 뒤져 보았다. 원장이라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

 

원장(院長)

명사

「1」‘원(院)’ 자가 붙은 시설이나 기관의 우두머리.

「2」『역사역원의 잡무를 보던 벼슬.

「3」『역사서원의 관리와 운영 책임을 맡아보던 사람

 

 결국 저 광고에서 ‘원장’이라는 말은 '병원(病院)이라는 곳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병원은 왜 우두머리가 여섯 명일까. 한 명을 원장이라고 하고 나머지 다섯 명을 그냥 의사라고 칭하면 그 다섯 사람의 권위나 체면이 손상이 되는 모양이다. 의사가 한 명 있어도 그는 원장이고 여섯 명 있어도 모두 다 원장인 셈이다. 이럴 바에는 '의사' 또는 '전문의'라는 단어는 없애도록 하는 게 어떨까. 실제로 종합병원이 아닌 의사가 여럿 있는 의원 또는 병원의 의사들은 예외없이 원장이라고 칭하고 있음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항이다. 그래서 저렇게 모두가 원장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내가 어렸을 때 우리 동네에는 '왕비다방'이라는 동네 다방이 있었다. 커피 두 스푼, 설탕 두 스푼, 프림 두 스푼에다 날계란 노른자를 띄워주던 그런 곳 말이다. 전화가 보급되지 않아 전화가 있는 집은 부자로 소문나기 십상인 그런 시대 분위기였다. 문제는 다방 마담이 “김 사장님 전화 왔어요!”라고 소리치면 여럿 명이 우르르 일어서더라는 것이었다. 여러 명의 원장과 여러 명의 김 사장,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느끼기에는 동네 병.의원의 개업의사에게 대면하여 '의사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모두들 싫어하는 눈치였다. 자칭 특수 계층인 의사들은 사장님과 같은 항렬인 '원장님'이라고 불리어야 스스로 권위에 합당하다고 판단하는 모양이다. 문득 김영승 시인의 ‘권태’ 시리즈 중의 하나가 생각났다.

 

 

 

 

 

권태 72

 

                                                                  김영승

 

남들 안 입는 그런 옷을 입었으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왜 으스대는가. 왜 까부는가. 왜 어깨에 목에 힘이 들어가 있는가. 왜 꼭 그렇게 미련을 떨어야 하는가. 하얀 가운을 걸치고 까만 망토를 걸치고 만원 버스를 타봐라. 만원 전철을 타봐라. 얼마나 쳐다보겠냐. 얼마나 창피하겠냐. 수녀복을 입고, 죄수복을 입고, 별 넷 달린 군복을 입고......

 

왼쪽 손가락을 깊이 베어 며칠 병원을 다녔는데 어떤 파리 대가리같이 생긴 늙은, 늙지도 않은 의사새끼가 어중간한 반말이다. 아니 반말이다. 그래서 나도 반말을 했다.

 

“좀 어때?”

 

“응 괜찮어”

 

그랬더니 존댓말을 한다. 그래서 나도 존댓말을 해줬다.

 

“내일 또 오십시오.”

 

“그러지요.”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웃을지 몰라도 위의 김영승 시인과 똑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종합건강진단 결과 안압이 높은 걸로 나와서 동네 안과에 들렀다. 나보다 열 살 정도 많아 보이는 의사는 반말 투로 나를 '아저씨'라고 불렀다.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아저씨인 것은 확실했다. 아내가 있고 다 큰 자식들이 있으니까 말이다. 

 의사는 경상도 사투리를 섞어가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저씨요, 아저씨는 안압이 높아서 녹내장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있으니 앞으로 매월 진찰을 받으이소."

 내가 답했다.

 "그런데 의사 아저씨, 안압 높으면 전부 녹내장으로 연결되나요?"

 "……. "

 그는 나를 말없이 계속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한마디 했다.

 "아저씨, 나이 많은 내게 말을 그렇게 하면 되겠소?"

 나도 한마디 했다.

 "저도 나이가 좀 되거든요. 그리고 제가 공짜로 치료받는 것은 아니지요. 저와 같은 손님으로 인해 먹고 사는 분이 손님에게 하대(下待)하면 되겠어요?"

 의사는 내게 처방전을 써주었지만 나는 약국에 가지 않았다. 하하, 기분 나쁘다고 행여 실명할 수 있는 치명적인 약을 처방했을지 누가 알겠는가.  번거로웠지만 맞은 편에 위치한 젊은 의사가 운영하는 안과에 갔다. 젊은 의사의 친절한 설명과 처방은 잠시 불쾌했던 기분을 금방 없애주었다.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길을 가다가도 특이한 간판이나 안내문을 발견하면 한참동안 그 뜻을 음미하고 기발한 발상이 보일 때는 혼자 감탄하기도 한다.

 내가 출퇴근하는 길목에 있는 식당의 문 옆에 붙여진 문구이다. '신발은 신발장에 / 분실시 책임지지 않습니다' 맞는 말이다. 동일한 장소에 흥부식당과 놀부식당이 나란히 영업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를 택할 것이다. 맛도 중요하겠지만 그 식당이 주는 푸근함도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저 음식점의 불필요한 안내문은 손님으로 하여금 발길을 돌리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음을 주인은 모르는 것일까? 아마도 손님이 신발을 바꿔 신고 가버린 관계로 주인과 남은 손님이 분쟁을 일으켰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향후에는 그런 분쟁의 여지를 아예 없애기 위해 그렇게 적어놓은 것으로 여겨진다. 주인 나름대로 기지를 발휘한 것이지만 뭔가 많이 삭막하다.

 그리고 저 안내문을 보는 순간 저 식당에서 식사하고픈 생각이 싹 사라졌다. 그런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음식 맛은 물론이고 친절함에서도 수준 이하일 것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내가 저 음식점의 주인이라면 저 안내문을 없애거나 밖에서는 안 보이는 신발장 구석에 비치해둘 것이다.

 

 

 

 고인이 된 박연구 선생의 수필 '바보네 가게(http://blog.daum.net/yoont3/11300511)'가 생각났다.

 

우리 집 근처에는 식료품 가게가 세 군데 있다. 그런데 유독 '바보네 가게'로만 손님이 몰렸다.

 '바보네 가게' - 어쩐지 이름이 좋았다. 그 가게에서 물건을 사면 쌀 것 같이만 생각되었다. 말하자면 깍쟁이 같은 인상이 없기 때문에, 똑 같은 물건을 같은 값을 주고 샀을지라도 싸게 산 듯한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나는 아내에게 어째서 '바보네 가게'라고 부르는가고 물어 보았다. 지금 가게 주인보다 먼저 있었던 주인의 집에 바보가 있었기 때문에 다들 그렇게 불러 오고 있는데, 지금 주인 역시 그 이름을 싫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 집에서는 콩나물 같은 건 하나도 이를 보지 않고 딴 가게보다 훨씬 싸게 주어 버려 다른 물건도 으레 싸게 팔겠거니 싶은 인상을 주고 있다는 거다.(중략)

 

 친구를 사귈 때에도 너무 똑똑한 사람은 어쩐지 접근하기가 망설여진다. 상대방에게도 만만한 데가 보여야 이쪽의 약점과 상쇄가 가능해서 허물없이 교분을 틀 수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저쪽이 빈틈이 없는 사람이라면 항상 이쪽이 못난 놈으로만 비칠 것 같아 싫을밖에. (하략)

 

 '상상이란 생각'은 또 다른 상상을 창조해내는 법이다. 나는 감자탕을 본시 좋아했는데 매일 지나치는 길목의 식당에서 보이는 저 밥맛 떨어지는 안내문으로 인해 감자탕이 맛없는 음식으로 생각되기 시작했고 실제로 몇 년 동안 먹지 않았다. 바보가 없어서 삭막한 세상에서 바보를 그리워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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